<경제프리즘> 법 앞의 평등한 정의 (Equal Justice under Law)

우리나라의 현실 문제를 지적하면서 외국, 특히 미국의 예에 견주는 것이 썩 공평한 글쓰기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필자가 미국에서 보았던 것 중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이 바로 워싱턴 D.C.의 의회 언덕 꼭대기에 있는 대법원 건물이다. 이 계획도시의 설계자가 백악관은 언덕 밑 낮은 곳에 두는 대신 의회와 대법원을 언덕 꼭대기에 배치함으로써 ‘Rule of Law'(법의 지배 또는 법치주의)의 이상을 구현하려 했었다는 여행 가이드의 설명을 들을 때까지는 그저 그러려니 했다. 교과서처럼 무미건조했다.

그런데, 아름답지만 이미 눈에 익숙한 의회 건물 뒤를 돌아 거의 박물관 수준으로 호화로운 의회 도서관 건물 옆을 지나, 그리스 신전 흉내 내다가 만 것처럼 멋대가리 없이 지어 놓은 대법원 건물 앞에 이르렀을 때 여행 가이드의 그 교과서 같은 말은 전혀 새로운 감흥으로 내게 다가왔다. 대법원 건물 위에 크게 부조된 글씨는 ‘Equal Justice under Law’(법 앞의 평등한 정의)였다. 그리고 그 앞에서는 낙태의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단체와 이에 반대하는 기독교단체가 동시에 침묵 피케팅을 하고 있었다.

법학자의 눈에는 ‘Rule of Law’나 ‘Equal Justice under Law’나 그게 그거일 것이다. 그러나 법에 문외한인 필자에게는 이 두 가지 표현이 주는 감흥이 완전히 다르다. 왜 그런가? 한국 사회에서는 법률이 기득권층의 지배 수단으로 악용되어 결국 법 앞의 평등한 정의를 짓밟는 일들을 너무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 했던가. 과연 한국 사회에서도 법률이 평등한 정의의 수단이 될 수 있을까?

물론 한국이 특수한 만큼 미국도 특수하다. 따라서 미국 사회의 원칙이 한국 사회에 꼭 들어맞으리라는 보장은 없고, 모든 것을 모방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겉으로 드러난 원칙과 그 속의 실질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면 ‘법 앞의 평등한 정의’의 실태에 대해 여러 나라를 비교해 보면 어떨까? 특히 미국과는 전혀 다른 사회 구성 원리를 갖고 있다는 유럽대륙 국가들은 어떨까? 필자가 유럽대륙을 여행하면서 각국의 대법원 건물에 무슨 글귀가 새겨져 있는가를 조사하지는 않았으니, 여기서는 통계숫자를 언급하겠다.

아래 자료는 2003년 다보스 포럼(World Economic Forum)이 세계 49개국을 대상으로 기업지배구조지수 순위를 조사하여 발표한 것이다. 다보스 포럼이 이른바 신자유주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으며, 특히 여기서 발표되는 자료는 우리나라의 재계단체가 정부의 비효율성과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비판할 때 자주 인용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이 자료가 이른바 개혁적 또는 진보적 시각과는 전혀 무관한 것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세부 항목 중 (준)사법질서와 관련된 몇가지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요약하면, 주주 자본주의 모델(미국, 영국)과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모델(스웨덴, 핀란드, 독일)이 사회 구성 원리 측면에서 매우 상이한 요소를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기업지배구조가 작동하는 구체적인 원칙까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국의 기업지배구조가 가장 우수하지만 핀란드도 이에 못지 않으며, 미국에 대비되는 모델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스웨덴의 경우 (놀랍게도!!!) 미국보다 순위가 높다. 특히 사법부의 독립성, 정보의 이용가능성, 파산법, 분쟁조정, 소액주주 보호, 금융자산의 보호, 부당내부거래 방지 등 흔히 영미식 주주 자본주의 모델의 요소라고 생각되는 항목에서 핀란드와 스웨덴은 영미에 못지 않은, 아니 그 이상의 성과를 기록하고 있다. 독일도 영미와 북구3개국에 근접하는 순위를 보이고 있는데, 흔히 독일과 유사한 사회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되는 일본은 사실 한국보다 별로 나은 것이 없다.

한마디로, 한 나라가 선진국이 되는 경로는 다양하겠지만, 선진국이 공통적으로 갖추고 있는 기본적인 원칙들 역시 있다. 여기에는 영미형과 유럽대륙형의 차이가 없다. 한국 사회에는 이 기본원칙들이 결여되어 있으며, 이를 갖추는 것이 개혁의 일차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 ‘법 앞의 평등한 정의’는 그 최소한의 요건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법 앞의 평등한 정의’를 확립할 수 있는 중대한 기회를 맞이했다. 도청 테이프의 ‘형식’이 불법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 담긴 ‘내용’도 불법이다. 도청 테이프를 만든 안기부 관계자들과 그 내용을 보도한 MBC 이상호 기자를 수사하는 것과 동일한 선상에서 그 테이프에 등장하는 인물들, 즉 이건희 회장, 이학수 본부장, 홍석현 대사, 김대중 전 대통령, 이회창 후보, 그리고 검사들도 수사하여야 한다. 통신비밀보호법도 법이고, 상법과 형법도 법이다. ‘법 앞의 평등한 정의’는 이 법들의 평등한 집행을 요구한다.

그러나 지금 돌아가는 모양새가 수상하다. 역시 아직까지는 한국 사회에서 법은 정의의 수단이라기보다는 기득권층의 수단에 더 가까운 모양이다.

공연한 우려가 아니다. 지난 목요일 참여연대가 발표한 ‘삼성의 인적 네트워크 보고서’를 보라. 이들 278명의 인사는 모두 한국의 최고 파워 엘리트들이다. 장관급 출신을 모으면 국무회의를 열 수 있고, 최고위급 판사 출신들로 대법원 구성이 가능하다.

특히 우려되는 사실은, 삼성과 직접 고용관계를 맺은 고위공직자 출신 74명 중 82.4%인 61명이 재경부, 금감원, 공정위, 국세청 등 감독기구 출신이거나 검찰, 법원 등의 사법기구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정한 법 집행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삼성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우수 인재의 영입일 뿐이고, 공직자라고 해서 직업선택의 자유를 제한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항변하다. 그러나 어느 나라의 판사가 법복을 벗자마자 민간기업에 취업하는가? 그리고 민사 전문 변호사가 아니라, 특수부 출신 형사 담당 검사를 이처럼 대거 채용하는 민간기업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또 1994년 승용차산업에 진출하면서 불과 1년만에 4명의 통상산업부 관료를 채용하고, 1999년 이재용씨의 불법 세습 문제가 불거진 이후 8명의 국세청 고위 관료를 사외이사로 영입하고, 최근 금융관련법 논란이 진행되는 와중에 금융감독기구 관료를 대거 영입한 것도 오비이락인가? 이들 관료의 일부는 삼성경제연구소에 연구위원으로 취업했는데, 이는 2년간 관련 민간기업체에의 취업을 금지한 공직자윤리법을 우회하기 위한 편법 아니가? 이들이 그토록 우수한 인재라면, 삼성경제연구소 홈페이지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이들 이름으로 출간된 연구보고서를 단 한 건도 찾을 수 없는 것은 어찌된 노릇인가?

삼성공화국 비판은 ‘반삼성’의 삐뚤어진 심성의 표현이 아니다. 삼성공화국은 ‘법 앞의 평등한 정의’를 유린함으로써 민주질서와 시장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

독재권력이 무너지고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뽑았으니 시민들이 할 일은 끝난 것인가? 아니다. 이제 한국의 민주질서와 시장질서를 위협하는 것은 독재 정치권력이 아니라 독점 자본권력임을 목도하고 있다. 민선 대통령이 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도 분명히 드러났다. 우리가 살고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나라인 만큼 우리가 나설 수밖에 없다.

검찰과 법원과 국회와 대통령이 대한민국은 주권재민의 민주공화국임을 깨닫도록 우리 모두 ‘법 앞의 평등한 정의’를 소리 높여 외쳐야 할 때다.

* 이 글은 민주노동당의 진보정치연구소 홈페이지에도 실렸습니다.

김상조(한성대 교수,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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