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감시센터 기록개혁 2003-09-24   1850

기록물 폐기 실태조사를 마친 뒤…

<참여연대 /미디어다음 공동기획> 사라지는 국가기록 ②

공동기획

국가 기록물이 무차별 폐기되고 있다. 참여연대는 지난 7월부터 정부 각 부처의 기록물 관리 실태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 역사적 가치가 있는 귀중한 국가 기록물이 무단으로 폐기되고 있음이 드러났다. 심지어 법령이 정하고 있는 폐기절차마저도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는 지난 9월 3일 보도자료를 통해 기록물 폐기의 문제점을 폭로한 바 있다. 여기에 더해 참여연대는 미디어 다음과 공동으로 기록물폐기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구체적 사례를 좀 더 꼼꼼이 살펴보고 그 원인과 개선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정부부처, 지방자치단체의 기록물 관리 인식 ‘낙제점’

▲ 대부분의 정부부처는 기록문관리법상의 기록물 폐기 절차를 준수하지 않았다. 사진은 정부종합청사내 행자부 자료관. ⓒ미디어다음 김준진
“기록하지도 않고, 관리하지도 않으며, 공개하지도 않는다”

어느 신문사설에서 우리나라의 기록물관리실태를 비판한 말이다. 우리나라의 기록물 관리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지적이다.

참여연대는 지난 7월부터 2개월동안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 실태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조사 대상 기관 중 ‘기록전문요원’의 심사를 거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대부분의 기관들은 기록물 폐기 심의 회의조차 소집하지 않았으며,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기록물을 무차별 폐기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결과를 접한 전문가들은 행정기관의 무차별적인 기록물 폐기 실태에 대해 놀라워 했다. 귀중한 자료가 담당 공무원의 개인적 판단에 따라 한 해에도 몇 천 건씩 폐기되고 있다는 현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 앞에서는 모두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주옥 같은 기록들 별다른 절차 없이 사라져

▲ 공무원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문서가 폐기되기도 했다. 사진은 정부종합청사. ⓒ미디어다음 김준진
폐기 기록물 목록 청구에 대해 담당 공무원들은 매우 부담스러워 했다. 그들이 오랜 고민 끝에 내놓은 폐기 기록물 목록은 충격적이었다. 전문가들과 함께 폐기 기록물을 분석한 결과 엄격한 절차 없이 공무원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폐기물 목록이 작성됐으며, 결국 영원히 문서파쇄기 속으로 사라졌다는 게 입증됐다.

조사 대상 기관이 보내 온 ‘폐기심의서’에는 ▲심의일자 ▲폐기 심사관의 성명 ▲폐기 심사의견 ▲폐기 처분일 등이 빠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기록물 폐기 심의를 형식적으로 했다는 반증이다.

특히 재경부는 ‘기록물 폐기 심의회’를 구성조차 하지 않은 채 기록물을 무차별 폐기 했고, 기록물관리 주무 부처인 행정자치부도 보존기간이 10년 이상 설정된 자료는 기관 자체에서 폐기하지 못하도록 돼있는 지침을 어기고 2001~2002년에 걸쳐 400여건이나 폐기한 사실이 드러났다. 서울시도 형식적인 기록물 폐기 심의회를 통해 한해 8만 여건의 기록을 폐기하고 있었다.

폐기된 기록물들 중에서 보존 기간표를 명백히 어긴 대표적인 폐기 오류 사례는 ▲재정경제부 ‘택지개발 예정지구 지정’ ▲행정자치부 ‘재해지역 지방세 감면’, ‘김대중 대통령 일본국빈방문’, ‘주요 재난분석 및 원인조사’ ▲건설교통부 ‘주거환경 개선사업 현황’ ▲교육인적자원부 ‘전문대학 유아교육과 3년제 추진’ ▲서울시 ‘도시고속도로 기본설계자료’ 등이었다. 이 자료들은 보존기간표상 설정되어 있는 보존기간을 애초에 잘못 설정해 폐기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가치가 있는 귀중한 사료들로서 반드시 보관되어야 할 문서들이다.

행정자치부가 폐기한 ‘재해지역 지방세 감면’ 문서의 경우 보존기간표상 보존기간이 10년으로 설정되어 있음에도, 5년으로 짧게 설정해 폐기한 대표적 사례이다. 고려시대 고문서를 보면 재해를 입은 백성에게 지방세를 감면해 준 역사적 기록들이 나온다. 이는 현재의 기록보존문화가 1000여년 전의 그것보다 오히려 후진적임을 보여주는 수치스런 사례이다.

‘김대중대통령 일본국빈 방문’ 문서가 사라진 것도 매우 슬픈 일이다. 자료 자체가 폐기돼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지만 국빈 방문에 대한 예우, 절차, 경호, 협의과정 등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 기록에 대해서는 대통령과 그 보좌기관이 생산하고 접수한 모든 기록을 보존한다는 기록물관리법의 관련 조항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이런 자료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된다면 잦은 실수를 반복하는 외교관계도 실수 없이 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주요 재난 분석 및 원인조사’는 수많은 재난이 발생하게 된 원인 및 과정을 분석해 놓은 자료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자료들이 폐기되고 있다는 것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기록이 폐기되고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정책의 연속성 확보도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서울시의 ‘도시고속도로 기본설계’와 같은 자료들은 도시고속도로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기초자료로 분석 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폐기되고 말았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행정자치부의 ‘삼풍관계 자료’, 재정경제부의 ‘한보사태 관련 자료’가 폐기목록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자료들은 보존기간표상 보존기간 설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었던 사건으로 보존가치가 높은데도 10년도 되지 않아 폐기되고 말았다. 역사적으로도 삼풍사고나 한보사태는 두고두고 새기며 교훈을 찾아야 할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시행 중인 기록물 관리법을 준수하라

▲ 현행법만 준수해도 많은 주요 자료를 보호할 수 있다. 사진은 문서 수발 중인 행자부 공무원들. ⓒ미디어다음 김준진
현재 시행되고 있는 ‘공공기관의 기록물에 관한 법률'(기록물관리법)은 기록의 작성, 관리, 이관, 폐기, 관리감독 분야를 상세하게 규정한 선진화된 법이다. 기록물을 폐기할 때는 전문요원의 심사와 ‘기록물 폐기 심의회’의 심의를 반드시 거치도록 하고 있고, 이를 어길 경우엔 7년 이하의 징역과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벌써 제정된 지 4년이 지나고 있지만 예산 부족과 정부의 관심 부족으로 법 자체가 사문화될 위기에 처해 있다. 법이 규정한 자료관, 기록전문요원, 문서관리시스템 등을 갖추고 있는 공공기관은 거의 없었으며, 법을 이해하고 있는 공무원도 만나기 힘들었다. 그런 과정에 공공기록은 사라지거나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사건의 기초기록이나 핵심기록들이 폐기되고 있다는 사실은 후진적인 기록문화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행정 편의주의에 길들여진 공무원 조직의 타성 탓이라는 것이 관련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공직사회는 “기록은 남겨서 좋을 것 없다”는 그릇된 인식을 버려야 한다. 정부는 후진적인 기록문화를 극복하기 위해 기록물관리법에 규정된 내용만이라도 지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또한 해당 공무원들에게 기록 폐기에 대한 책임을 엄중히 물어 국가기록 관리에 대한 의지를 보여 주어야 하고, 체계적인 훈련을 시켜야 한다.

전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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