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감시센터 기록개혁 2005-06-13   2058

[정부문서 접근금지 비밀공화국④] 미국, 비밀해제 문서 `비공개’는 없다

비밀관련법 정비해야…비밀관리 외국에선 “최소 지정 최대 해제”

“9·11 관련 비밀 가운데 4분의 3은 비밀로 분류하지 말았어야 했다.”

미국 9·11 테러 진상조사위원회의 토머스 킨 위원장은 지난해 ‘9·11 테러 최종 보고서’를 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보안을 위해 정부 부처 사이에서도 테러 관련 비밀들이 공유되지 않아 테러를 막지 못했다는 반성에서 나온 말이다.

9·11후 ‘비밀 생산’ 늘었지만

“과도할땐 국가안보 방해” 반성

비밀 지정때 이유 설명은 필수

‘대외비’ 안둬 생산책임성 높여

첩보기관 관리 한국말곤 드물어

비밀의 ‘과잉’은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미 행정부가 지난해 생산한 비밀은 35만1150건으로, 2003년보다 11만316건이 많다. Ⅰ급 1만1435건(3%), Ⅱ급 25만8762건(74%), Ⅲ급 8만953건(23%)이다. 비밀보호 기간이 10년 이하인 것이 전체의 34%인 11만8648건, 10년~25년 이하가 23만2502건(66%)이다. 10년 이하 비밀 지정 건수는 1996년 이후 가장 낮다. 9·11 테러 이후 ‘비밀 관료주의’가 심해지며 비밀의 양은 물론 보호기간도 늘어나는 추세다.

그렇지만 미국이 생산·보유하는 방대한 비밀에 견줘볼 때 비밀 관리체계는 엄밀하면서도 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려 있다. 비밀의 생산·관리·해제를 규정한 ‘대통령 행정명령 12958호’(2003년 13292호로 개정)는 비밀을 △군사계획 △첩보활동 △대량살상무기 정보 등 8개 범주에 따라 Ⅰ급·Ⅱ급·Ⅲ급의 3단계로 구분한다. 비밀등급 기준은 한국과 비슷하지만 ‘자의적’ 비밀 분류는 엄격한 단서조항들 때문에 쉽지 않다.

비밀을 지정할 수 있는 사람은 2004년 현재 4007명. Ⅰ급 비밀 지정권자 958명, Ⅱ급 2911명, ┣급은 138명이다. 4월에야 중앙정보국(CIA) 국장과 9·11 테러 이후 신설된 국가정보국 국장이 Ⅰ급 비밀 지정권자로 새로 정해졌다. 비밀 지정권자들은 비밀 생산에 앞서 해당 정보가 공개됐을 때 국가 안보에 어떤 영향이 미치는지 판단하고 설명해야 한다. 또 비밀로 분류한 정보가 기존 비밀과 어떻게 다른지도 밝혀야 한다. 동일한 비밀의 생산을 막기 위한 조처다. 특히 △정부의 잘못을 덮기 위한 비밀지정 △국가 안보와 상관없는 정보의 공개를 막기 위한 비밀지정 등은 철저히 금지된다. 한국에서 남발되는 ‘대외비’가 없는 것도 비밀 생산의 책임성을 높인다.

비밀 해제도 법률로 엄격하게 규정돼 있다. 비밀은 기본적으로 10년간 보호되며 ‘예외’ 조항에 따라 25년까지 연장할 수 있다. 그러나 알권리를 제한하는 과도한 보호기간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대통령령은 “비밀이 더 이상 비밀의 기준을 맞추지 못할 때 즉각 해제돼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해당 정보가 공개되면 공공의 이익이 더 클 경우에도 비밀을 해제해야 한다. 한국이 ‘공개할 수 있다’는 태도라면, 미국은 ‘공개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비밀을 다루고 있는 셈이다.

이런 차이는 비밀 공개 건수의 차이로 나타난다. 미국은 지난해 비밀해제를 검토한 비밀(5588만7222쪽)의 51%를 공개했다. 16개 기관이 모두 2841만3690쪽의 비밀을 해제했다. 중앙정보국도 185만1266쪽을 공개했다. 비밀문서의 제목이나 건수조차 공개하지 않고, 비밀에서 해제된 문서를 또다시 ‘비공개’로 옭아매는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세이다.

비밀을 관리하는 기관도 한국과 다르다. 미국의 경우 비밀기록 관리는 정보보안감독국, 국가보안정책 업무는 국가안전보장회의·국무부·국토안보부가 맡는다. 이상민 국가기록원 전문위원은 “한국처럼 첩보기관(국가정보원)이 비밀, 보안 관련 업무를 맡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독일은 내무부, 벨기에·아일랜드·오스트리아·핀란드·스웨덴 등은 외무부가 맡는다. 프랑스는 국방부가 담당한다.

미국 의회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비밀의 관리가 법률이 아닌 대통령령으로 이뤄지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 ‘정부비밀개혁법’ 제정을 1999년부터 추진하고 있다. 기본권 제한을 행정부의 임의적 판단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다. 한국도 대통령령인 ‘보안업무규정’으로 비밀 관리를 규정하고 있다. 반면 영국·프랑스·싱가포르 등은 공공비밀법에 따라 비밀을 관리한다.

이 전문위원은 “미국 등 외국의 비밀체계가 세밀한 부분까지 기준을 정해두고 있지만 비밀 생산기관이 스스로 보유한 비밀의 양이나 보호기간이 적절한지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며 “이 때문에 미국은 비밀 지정의 적정성과 해제를 감독하는 제3의 기관(정보보안감독국)을 운영한다”고 말했다. 그는 “잘못 지정된 비밀이 오히려 국가 안보를 해치는 만큼 한국도 법 제정과 함께 이런 기관의 설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최소 지정 최대 해제

엄격한 ‘정보 감독자’ 아래 ‘자동해제’ 조항둬 철저관리

미국은 연방정부의 비밀을 효과적으로 관리·감독하기 위해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아래 정보보안감독국(ISOO)을 두고 있다.

1978년 만들어진 정보보안감독국은 정부가 한해 생산한 등급별 비밀 건수와 비밀 해제 건수, 해제 정책 등을 담은 연차보고서를 낸다. 또 비밀 지정 및 해제에 관한 이의신청·중재·조정·권고 기능을 맡는다. 각 부처가 생산한 비밀이 기준과 절차에 따라 적절히 지정됐는지 따지는 ‘정보 감독자’의 구실을 한다. 정보보안감독국은 안보를 위한 비밀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지만 ‘최소한의 비밀지정, 최대한의 비밀해제’를 구호로 내걸고 있다.

또 미국은 95년 ‘대통령 행정명령 12958호’를 통해 ‘자동 비밀해제’ 조항을 신설했다. 비밀을 보유한 모든 기관은 내년 12월31일까지 25년 이상 된 문서의 공개를 끝내야 한다. 95년 이후 생산된 비밀도 25년이 되면 마찬가지로 공개된다. 다만 △정보요원 △대량살상무기 △미국 암호체계 △군사작전계획 등 9가지 범주에 해당하는 비밀은 자동해제에서 제외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비밀은 다시 ‘체계적·의무적 비밀해제 조사’ 제도에 의해 공개가 결정되기도 한다.

자동해제 조항이 생긴 뒤 9년 동안 공개된 문서는 모두 10억2800만쪽이다. 이 조항이 생기기 전인 80~95년 사이에 공개된 문서가 2억5700만쪽인 것에 견줘보면 자동해제 조항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5년마다 흔들 법 제정 필요 (홍석인 투명사회국 간사)

‘대통령령’ 안정성 떨어져, 비밀 전문관리기관 설치를

민주주의의 진전에 따라 정부 정책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요구 수준도 높아졌다. 한국 정부의 비밀 관리체계는 후진적이다. 30년 전의 기본틀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비밀 관리도 변화한 환경에 맞춰 개선돼야 한다. 큰 방향은 국민의 알권리 확대와 국가안보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대통령 명령’에 근거하는 현행 비밀 관리체계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비밀의 지정 및 해제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 최선의 방안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령에 근거하면 비밀 관리제도의 일관성과 안정성을 확보할 수 없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대통령의 뜻대로 비밀 관련 정책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행정기관의 재량에 따라 멋대로 비밀을 지정하고 관리하는 것은 국민의 오해와 불신을 부른다. 법률이 제정되면 국민은 지금보다 비밀관리에 대한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국민의 알권리는 자연히 확대되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 등이 법률 제정을 추진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법률의 기본 방향은 실질적으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 것을 비밀로 지정하고, 지정된 비밀을 철저히 보호하도록 하는 것이다. 동시에 비밀이 해제된 정보는 국민에게 신속하게 제공되도록 법률의 목적을 분명히 밝힌다.

우선, 공공기관의 업무를 분석해 비밀 분류의 세부적인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은 비밀 취급인가권자에 대한 규정만 있으나 비밀을 만드는 생산권자에 대한 규정을 둬, 이들만이 비밀을 설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비밀을 설정할 때부터 자의적 판단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이다.

비밀의 총괄 관리기관을 별도로 두고 이 기관에서 비밀 생산 및 관리의 제도적 통제를 담당해야 한다. 현 정부조직 체계로 보면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그 구실을 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또 비밀 전문관리기관을 설치해 공공기관의 비밀 수집과 관리, 비밀의 보호, 30년이 경과한 비밀의 해제와 재분류의 업무를 맡도록 한다. 주기적으로 비밀을 해제하고, 재분류를 하도록 의무화하는 제도와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비밀을 자동으로 해제하는 제도는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

행정부를 감시하는 의회가 비밀에 접근할 수 있는 폭을 넓히되 비밀 누설과 유출은 면책특권에서 제외하는 것을 포함한 처벌조항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한겨레 김남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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