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감시센터 칼럼(ts) 2009-11-12   1456

정보공개법의 위기

선진국들이 선진적인 제도를 갖추고 있는 것은 소득이 높기 때문이 아니다. 그와 같은 제도를 요구 및 감시하고 비판하는 국민의 입과 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헌법재판소 창설 직후 국민의 알 권리는 표현의 자유가 전제라며 국가가 생성하거나 수집하는 정보는 원칙적으로 국가의 주인인 국민들에게 공개되어야 함을 천명한 뒤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다. 이후 정보공개법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정착과 건전한 시장경제 확립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제 이를 완전히 무력화시킬 수 있는 법이 정부에 의해 발의되었으니 바로 ‘비밀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이다. 국가가 관리하는 정보를 ‘비밀’로 지정하는 법이며 이미 국가정보원법 보안규정이 규정한 것을 법률로 만드는 것이다.

국가가 ‘비밀’로 지정한 정보는 정보공개법상의 공개에서 배제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선진국과 우리 보안규정은 ‘비밀’ 지정은 ‘국가안보’에 관한 것들로 한정하여 왔다.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서다.

그런데 이번 법안은 ‘비밀’ 지정 사유에 ‘국가이익’을 새로 포함시키고 있다. ‘국가이익’이 정보공개 배제사유가 된다면 정보공개법은 사문화될 것이다. ‘국가이익’과 관련된 것으로 치부되는 모든 국가사업들이(예컨대, 4대강 개발·미국산 쇠고기 수입·자유무역협정) ‘비밀’로 지정될 수 있고 국민은 이에 대해 아무런 감시와 비판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도대체 ‘국가이익’과 관련 없는 국가작용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혹자들은 ‘국가안보’의 개념이 폭넓어지고 있다면서 영업비밀이나 프라이버시 등을 이야기하지만 이미 정보공개법에는 국가안보와 관련이 없더라도 타인의 인격권이나 재산권을 침해하거나 재판 등에 영향을 주는 경우 공개를 거부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삼성전자가 모든 국민을 배불리 먹일 기술을 개발하여 소유하고 있고 국가가 그 기술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이미 현행법상 공개 대상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이번 법안은 입안자들이 외국 첩보영화 등을 통하여 접하였을 선진국의 비밀관리 시스템을 흉내만 냈을 뿐 핵심적인 부분을 왜곡 및 누락하여 사실은 제도를 퇴보시키고 있다. 미국은 1급 비밀이 아닌 이상 그 보호기간이 10년이 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또 모든 비밀은 비밀의 재지정을 고려하더라도 총 30년이 넘으면 무조건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이 법안은 최초 비밀보호 기간의 상한이 애초에 정해져 있지 않음은 물론 30년이 지나도 이런저런 예외를 들어 계속 ‘비밀’로 유지되도록 하고 있다.

또 모든 국제협약 관련 정보들은 별도의 조항을 두어 더욱 엄격하게 다루려는 것 역시 선진국 시스템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처사다. 앞으로의 시장개방 논의 등에서 국민의 비판과 감시를 원천적으로 막겠다는 불온한 의도마저 엿보인다.

이미 우리나라의 정보공개 상황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하면 수십년 뒤처져 있다. 미국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를 보면 주인공인 법률사무장(실존인물)은 수도국에서 운영하는 도서관 같은 시설을 통해 수도국이 피고 회사에 내렸던 과거의 징계 사실들을 찾아내고 이것이 사상 최대 규모 소송의 발단이 된다. 즉 국가작용에 대한 정보가 ‘검색’이 가능한 형태로 공개되어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공개 대상 정보를 특정해서 요청해야 그 정보가 공개되는 법밖에 없어 ‘뭘 달라고 해야 할지를 모르는’ 대부분의 국민에게는 ‘젬병’이다. 그나마 국민의 귀를 열어준 정보공개법이 이제 사문화의 위기에 놓여 있다.

박경신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소장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이글은 11/12 한겨레 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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