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감시센터 칼럼(ts) 2004-06-14   1062

<안국동窓> 백지신탁이 공산주의?

지난 10일, 행정자치부는 공직자윤리법 개정을 통해 내년부터 ‘주식 백지신탁’을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다. 백지신탁은 공익과 사익의 ‘충돌’을 막기 위한 장치이다. 공직자의 경우 일반인에 비해 고급 정보에 접할 기회가 많고, 직무를 통해 얻은 정보를 개인의 재산불리기에 이용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공직자의 재산을 금융기관에 의무적으로 맡기도록 해 변칙적인 재산증식을 막고자 하는 것이 백지신탁제도 도입취지라고 할 수 있다.

미흡한 행정자치부 개정안

그동안 백지신탁제도의 도입을 강력히 주장해왔던 시민사회가 행정자치부 발표안에 대해 보인 반응은 ‘미흡하다’는 것이었다. 우선 종합적인 이해충돌해소방안의 제시가 없는 점, 그 대상범위가 1급 이상에 한정된 점, 주식 외에 부동산과 채권은 제외된 점, 경제부처 등 직무관련성이 높은 공무원들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점, 제17대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등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는 점, 대상금액기준이 지나치게 높다는 점 등이 그 근거였다.

한마디로 기왕에 도입할 바에는 빈틈없이 제대로 해야 할 텐데, 이것저것 재다보니 알맹이가 빠졌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여론을 반영하여 여야는 주식 외에 부동산, 채권을 신탁대상에 포함시키고 대상범위도 1급에서 4급 이상으로 확대하는 한편, 제17대 국회의원들에게 예외없이 적용하는 등의 방안에 대해 검토에 들어갔다.

백지신탁은 자본주의에 반한다?

그런데, 시민사회와 정치권의 움직임과는 반대로 ‘미흡한’ 행정자치부안에 대해서조차 이를‘자본주의의 근본취지를 훼손시키는 공산주의적 발상’이라는 반발하는 이들이 있다. 사유재산권을 침해하고 공무담임권을 제한하므로 헌법위반이라는 주장도 하고 있다.

특히, 기업경영권을 가지고 있는 경영인이나 대주주의 정치참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어느 지방의원은 “지방의원직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어느 정도 재력이 필요하다”고 알쏭달쏭한 근거를 내놓기도 한다. 일부 언론도 이에 편승해 백지신탁제도의 도입취지를 분석하기보다는 제도도입의 부작용과 문제점을 부각시키기에 분주하다.

백지신탁은 국민과 공직자 모두를 위한 제도

그러나, 미국이나 캐나다 등 개인의 재산권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에서 백지신탁제도가 폭넓게 인정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미 연방대법원의 판결문의 표현대로 “가장 선한 사람조차도, 정부를 대신하여 그가 집행하는 사업에 의해 그의 재산이 영향을 받는다면 공명정대하지 않은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백지신탁의 기본정신이다. 이해충돌의 가능성 자체는 부패행위가 되지 않지만, 결국 직무수행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해칠 수 있기 때문에 공직자 스스로 이를 회피할 수 있어야 소위 정직한 부패(honest graft)를 예방할 수 있다.

결국 백지신탁은 국민들을 위한 제도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공직자들을 위해 설계된 제도이다. 공직자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공직 진출여부를 결정하면 그것으로 족하고, 백지신탁이나 매각을 통해 재산의 존재형태를 잠시 변형시킨 후에, 공직을 마친 후에 그것을 찾아가면 그만이다. 경영권방어를 문제삼지만 그보다는 정경유착과 변칙적 재산증식의 위험성을 제거한다는 공익적 가치가 훨씬 크다고 할 것이다.

제도도입은 신중하면서도 철저하게

백지신탁제도의 도입에 대해 대다수 국민들이 그 취지에 공감하고 있다. 물론, 큰 틀에서 보완되어야 할 내용도 있고, 세부적으로 준비해야 할 것도 많을 것이다. 우선 큰틀에서는 백지신탁외의 이해충돌해소방안이 체계화되어야 하고, 신탁재산의 범위, 제17대 국회 적용여부, 주식외 부동산과 채권의 포함여부 등이 신속히 확정되어야 할 것이다. 세부적으로는 위탁기관과 위탁절차, 자녀결혼 등 불가피한 경우의 재산처분 방식 등에 대한 구체적 방안이 준비되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백지신탁제도 도입에 대한 국민적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도입 자체에 대해 이념적 공세를 가하고, 색깔론과 물타기, 지연작전으로 제도시행을 방해하는 시도를 경계해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공직부패 척결과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높은 때이다. 백지신탁제는 그 열망에 대해 공직사회와 정치권이 보내는 최소한의 대답이다.

장유식 (변호사,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