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감시센터 칼럼(ts) 2005-06-07   1083

<안국동窓> 참여정부 위원회제, 정말 무엇이 문제인가

최근 행담도 개발사건을 계기로 현정부의 각종 위원회에 대한 비판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단순한 사건보도에서부터 심층적인 기획보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보도되고 있다. 지면을 장식하고 있는 용어들도 매우 자극적이다.

“무소불위의 참여정부 위원회들”

“법에 없는 월권 행사하는 위원회들”

“통제받지 않는 참여정부 국정위원회”

“대폭 정비되어야 할 위원회”

제목만 놓고 보면 참여정부의 각종 위원회가 실로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는 것 같고, 또 이 위원회가 현정부의 국정운영을 망치는 주범인 것처럼 보인다.

분명히 현정부에서는 과거 정부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많은 위원회들이 국정운영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현 정부가 핵심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개혁과제들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할이 적지 않다.

현정부가 국정개혁을 추진함에 있어서 이와 같은 각종 위원회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름대로 그 이유를 유추해볼 수 있다. 그중의 하나는 기존의 국정운영방식으로서는 현정부가 의도하는 개혁의 효과적 추진이 어렵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즉 그 동안 국정운영은 소위 계층제적인 독임제적 구조를 특징으로 하는 공식적 행정조직들에 의하여 주도되었으며, 여기에 극히 제한적으로 개혁을 강조하는 일부 자문위원회가 간접 참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실질적인 변화와 혁신, 개혁은 기존의 지배적 구조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구조의 목소리에서 비롯된다. 즉 기존 구조와 질서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그것이 아무리 변화와 혁신을 주장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내재적 한계가 있다. 기존 구조가 갖고 있는 문제와 모순을 제기하고, 이것이 제대로 해결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지배질서에서와는 다른 목소리를 내고 또 들을 수 있고, 수용될 수 있어야 한다.

이점에서 보면, 여기에 걸 맞는 구조는 역시 기존 질서 유지적인 독임제적 계층구조보다는 다양성을 강조하는 수평적 조직이다. 다양한 목소리를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열린 구조이어야 한다. 기존의 폐쇄적 계층구조는 위원회와 같은 수평적, 개방적 구조와 비교하여 변화와 혁신의 목소리를 허용하고 수용하는데 내재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위원회제는 기존의 독임제적인 계층구조가 갖고 있는 한계, 특히 변화와 개혁에 대한 소극성과 저항을 극복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위원회는 문제가 새롭게 인식되고, 새로운 생각이 유입되고,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일부 언론이나 정치권에서 현정부의 위원회가 노출한 문제점들에 근거하여 위원회제 자체의 무용론을 제기하고 나아가서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위원회가 수행하는 기능이나 운영과정상의 문제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개선방안이 논의되는 것은 타당하지만, 그것이 위원회의 무용론과 폐지론으로 귀결되는 것은 결국 변화와 혁신을 위한 다른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주장한다. 기존의 계층제적 행정구조를 이용하여 변화와 혁신을 충분히 꾀할 수 있는데도 현정부는 이를 도외시하였다는 것이다. 규범상 틀린 말은 아니다. 바람직한 것은 기존 조직이 변화와 개혁을 이끌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는데 있다. 기존의 지배조직이나 의사결정구조가 현존하는 문제와 부조리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중단없이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동안의 경험으로 첫 단추부터 꿰기 어렵다는 것을 너무도 많이 배웠다.

내부로부터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자발적 인식을 기대하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 그것은 내부 구성원의 자질 문제라기보다는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늘 문제는 내부가 아닌 외부로부터 용이하게 지적될 수 있으며, 보다 엄격하게 비판될 수 있다. 다른 생각과 다른 목소리를 가진 사람으로부터 변화와 혁신의 동인이 시작된다.

현정부 이전에도 계층제적이고 폐쇄적인 국정운영 방식이 갖는 문제점을 보완하고 개혁하기 위하여 각종 위원회제를 활용하였었다. 그러나 대부분 행정 각부의 들러리에 머물렀다. 각종 자문위원회는 너무도 빨리 형해화 되거나 행정 각부에 포획되었을 뿐이다.

위원회가 무소불위의 활동을 하거나 법적으로 부여된 범위를 넘어서 월권을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이다. 비판받고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몇몇 사건의 경우 그러한 문제점들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폐지나 무용론은 아니다.

정부 내건 정부 밖이건 수많은 위원회들이 존재하고 있다. 심지어 언론사에도 존재하는 등 실로 없는 곳이 없다. 그러나 과연 위원회 설치의 취지에 맞게, 충분한 권한을 부여받고, 제대로 그 기능을 수행하는 곳이 얼마나 될까? 긍정적인 답변을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 눈가림용, 장식용, 생색용으로 만들어 논 것은 아닌가?

몇몇 위원회의 설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국정운영은 계층제로 구성되어 있는 정부 각 부처 중심이며, 위원회들은 변방을 겉돌고 있을 뿐이다. 제대로 된 권한과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지적되어야 할 것은 아직도 많은 위원회들이 명목상으로만 존재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각종 국정과제 위원회는 대부분 대통령의 의사결정을 자문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내부적인 의사결정과정을 거쳐서 대통령에게 보고되고, 대통령에 의하여 수용여부가 결정된다. 그리고 그 과제는 다시 행정 각부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결정 및 집행된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과연 행정 각부로 넘어간 개혁과제들 중에서 얼마나 수용되고 또 실제로 실행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언론에서는 무소불위라고, 월권이라고, 통제받지 않는 권력이라고 평가하고 있지만, 과연 개혁 자문위원회의 자문내용이 얼마나 수용되었을까? 별반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수많은 권고안들이 공식적인 정책결정과정을 거치면서 거부되고, 완화되고, 보류되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언론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위원회의 자문내용이 행정 각부에 의하여 마구잡이로 수용되는 것 같지는 않다.

지금 재검토되어야 할 것은 위원회의 무소불위(無所不爲)가 아니라 위원회의 형해화(形骸化) 가능성이다. 도처에는 위원회의 기능과 역할을 가로막고 무력화시키는 온갖 장애물들이 널려있다. 행정 각부는 아직도 각종 위원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권한과 기능을 갖고 있다. 무소불위는 위원회가 아닌 행정 각부 등 기존의 지배적 질서와 구조에 의하여 자행되고 있음을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변화와 혁신이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그 출발은 다름 아닌 기존의 지배질서내에서는 들을 수 없는 다른 목소리에서부터 출발된다. 다른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하는 구조라면 변화와 혁신은 당초부터 존재할 수 없다.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다른 것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개혁위원회를 만들었다면, 그에 걸 맞는 역할을 부여하고, 위상을 재정립해주어야 할 것이다. 또 다시 많은 위원회들이 과거와 같이 형식적인 들러리로 전락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윤태범 (방송대 행정학과 교수, 맑은사회만들기본부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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