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감시센터 칼럼(ts) 2003-11-20   1385

[기고] 비자금 수사, 시간과의 싸움

현직 기자가 살펴 본 정치자금 검찰수사의 전개 추이

대검 출입 기자들의 하루는 오후 2시께 시작된다. 이 시간이면, 안대희 중수부장실 등이 있는 대검청사 7층 복도에 50여명이 기자들이 몰려가 “차 한 잔 달라”며 ‘농성’에 들어가고, 안 중수부장 등이 마지못해 문을 열어주면 뜨거운 질문공세가 이어진다.

브리핑 뒤 기자실로 내려온 기자들은 마감시간과의 전쟁을 치르며 기사를 써야 한다. 기자실 한 쪽에서 방송기자들은 전화로 급히 기사를 부르는 가운데 신문기자들의 자판 두드리는 소리는 낮게 웅성거리는 듯하다.

사실 이런 기자실 풍경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과거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등 굵직한 정치자금 수사가 벌어질 때마다 이런 풍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이번 수사는 과거 정치자금 수사와 여러모로 구분되고, 이 차이는 주목받아 마땅하다.

출발부터 차이가 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 등은 정권 쪽의 하명사건이었다. 각종 의혹 내용이 먼저 언론을 통해 불거지고, 정권은 여러 변수를 고려한 끝에 수사 개시를 지시했다. 그러나 지금의 ‘2002년 대선 불법 선거자금 사건’은 검찰 스스로 감행한 모험이라 할 수 있다.

출발은 어쩌면 간단한 대기업의 회계부정 사건이었다. 금감원이 에스케이그룹의 2000억원대의 분식회계 사실에 대해 검찰에 고발했던 것이다. 그런데 분식회계를 들여다보던 검찰은 거대한 비자금 조성의 흔적을 찾았고, 그 돈의 일부가 지난해 대선 때 정치권에 흘러들어간 정황을 포착했다.

‘꿀꺽!’

덮을까, 그냥 갈까. 에스케이그룹이 불법 정치자금을 전달한 대상이 국회 절대 다수당인 한나라당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불리는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까지 걸려있다. 정치권 전체를 적으로 돌려 세울 것인가.

여기서 검찰은 조직의 명운을 건 결정을 내렸다. 정공법을 선택함으로써 사건은 기업수사에서 정치권수사로 도약하게 된다. 이에 대한 노 대통령의 반응은 극적이었다. 자신의 측근비리가 검찰의 수사대상에 떠오르자 “눈앞이 캄캄하다”며 재신임 카드를 빼든 것이다. 이는정치권은 물론 국민들 전부를 경악으로 몰고 갔고, 정치권이 대검 중수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희귀한 국면이 열린 것이다.

검찰이 에스케이 비자금 사건의 실체를 공개하자 국민들은 경악했다.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인사가 “선거빚은 갚아야 한다”며 11억원을 받아 대부분 사적 용도로 썼다. 여기에 원내 1당인 한나라당은 선거운동본부 차원에서 100억원을 빳빳한 현금으로 받아 당사 사무실에 쌓아두고 썼다. 그것도 범죄집단이 거래를 하듯 지하주차장에서 ‘차치기’를 해서 받아 왔다. 전셋돈에 쫓기는 서민들은 “1억원짜리 쇼핑백 100개라…, 그 중에 하나만 나한테 왔으면 어떻게 될까”라며 소주 한 잔을 더 마셔야 했다.

검찰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해방 이래 정권의 하수인이라는 오명에 시달려 왔던 검찰이 대통령 및 ‘집권야당’과 맞짱을 뜨는 희안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송광수 검찰총장과 안대희 중수부장-그는 노무현 대통령과 사법시험 동기다-의 팬클럽까지 생겼으니, 많은 검찰 인사가 “올해 초 ‘검사와의 대화’에서 욕 먹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며 신기해했다.

이 국면에서 검찰은 또 한번 조직의 명운을 건 도발을 꿈꾸게 된다. 수사확대 여부를 결정해야 했던 것이다. 에스케이그룹 수사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했지만, 다른 기업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을 것임을 국민들 모두가 안다. 더구나 이 수사 과정에서 다른 기업들과 관련된 불법 정치자금의 단서도 일부 확보됐다. 그러나 수사를 확대하게 되면 정치권의 반발 뿐 아니라 재계 전체를 적으로 돌려세워야 한다.

자신감의 표현일까, 검찰 지휘부의 캐릭터 탓일까. 검찰은 전면적 수사확대를 선언했다. 이에 대해 검찰 주변에서는 “수사확대 방침은 지휘부 몇 명이 내린 용단의 결과가 아니다”라며 “특검제도와, 부족하지만 그대로 개선된 기업의 투명성, 국민적 요구 등 사회적·제도적·문화적 장치가 검찰로 하여금 수사확대를 결정하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해졌다는 말이다.

하지만, 쉬운 길은 아닌 듯 하다. 수사 초기 국면이라 섣부른 판단은 어렵지만, 재계와 한나라당의 비협조 자세가 뚜렷하다. 이들이 사회발전의 저항세력은 아닐지라도, 정치개혁과 정경유착의 고리를 스스로 끊기엔 준비가 부족한가 보다.

이번 국면이 희극이라고 하면 그 주인공은 단연 한나라당이다. 수사 초기 최도술씨 관련 비리가 나올 때 침이 마르도록 검찰을 칭찬했다. 그러다 최돈웅 의원의 100억원 수수 사실이 밝혀지자 얼굴을 싹 바꿨고, 급기야 측근비리 특검으로 국면을 전환하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정기국회 예결위마저 측근비리에 대한 폭로전을 벌이며 예산심의는 뒷전이다.

재계의 비협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는 분석이다. 검찰 수사에 협조한다면, 한나라당과 사이가 틀어질 것이 뻔하다는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국회 절대 다수당으로 단독 입법이 가능한 한나라당의 미움을 살 수는 없고, 더구나 4년 뒤 집권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정당인데 알아서 모셔야 하지 않겠는가.

언론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지난 20일치 <중앙일보>가 총대를 메고 나섰다. 1면 머리기사로 “총수 출금만으로 외국투자 등돌려, 대기업 투자 마비 조짐”이라는 기사를 올렸다. 검찰 수사 탓에 모처럼 회복세를 타고 있는 세계 경제의 호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엘지그룹 압수수색에 따른 주가 폭락이 주요한 논거로 제시됐다. 이날 주가 하락의 주요 이유인 미국 증시 침체는 고려의 대상에서 빠졌다. 같은 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은 강신호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대행이 송광수 검찰총장을 방문해 “기업 수사를 빨리 끝내달라”고 요청한 사실을 1면 주요기사로 다뤘다.

지난 3일 검찰이 수사확대 방침을 공식 천명한 뒤 2주일만에 재벌과 언론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 대해 한 검찰 간부는 이날 “일부에서 검찰 수사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경제학자들과 많은 국민은 ‘대기업의 비자금 조성과 불법 정치자금 제공 관행이 경제의 발목을 잡는 주범이다’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검찰의 의지가 강하다 해도, 검찰은 시간에 쫓기고 있다. 지금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검찰이 이번 사건을 내년 1월까지 끌고 간다면 재계와 정치권의 총공세로 역풍을 맞을 것이 뻔하다.

검찰에게 진정한 적은 한나라당도 대기업도 아닌, 시간인지 모른다.

안창현 한겨레신문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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