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감시센터 칼럼(ts) 2005-05-11   1154

<안국동窓> 법(法)은 진화(進化)한다?

진화(進化)의 사전적 의미는 “생물의 조직이나 기능이 간단한 것에서부터 복잡한 것으로, 하등에서 고등한 것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때문에 진화에는 발전의 의미가 담겨져 있으며, 그 발전은 한 순간이 아닌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진화 중에 화학진화(化學進化)라는 것이 있다. 단순한 화학물질에서 복잡한 분자가 형성되어 종국에는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일컫는다. 이러한 진화는 분기(分岐;cladogenesis)와 향상(向上;anagenesis)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분기는 한 종이 둘 이상의 종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향상은 새로운 경향이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진화론을 우리 생활을 규율하는 법(法)에 적용해 보아도 그렇게 틀리지는 않는 것 같다. 처음에 제정된 법과 나중에 개정된 법을 비교해보면 분명히 발전하고 진화된 부분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단순하였던 규정들은 좀 더 정교하게 표현되고, 두루뭉술하였던 규정들은 세분화되어 각각 규정되기 때문이다. 법도 분기와 향상의 복합적 과정을 거쳐서 화학적으로 진화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법들이 늘 우리가 원하는 대로만 진화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가장 가까운 예로 부패방지법을 들 수 있다. 참여연대는 오랜 노력 끝에 부패방지법안을 만들고 국회에 청원하고, 입법화를 위하여 많은 활동들을 하였다. 그러나 국회를 통과한 법은 당초의 기대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실망이 말도 못하게 컸다. 그러나 아무리 못난 법이라도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것이 났다는 생각으로 부패방지법의 제정을 애써 반겼다. 속으로 진화를 기대했음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가 기대하는 진화는 요원할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부패방지법과 유사한 취지를 가진 법으로 공직자윤리법이 있다. 이 법은 제정된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지난 1981년에 제정되었으니 올해로 벌써 24년이 되었다. 입법 당시의 내용과 지금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물론 많은 차이가 있다. 발전된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서 제정 당시에는 총24조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총30조로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등록의무자의 확대, 등록재산의 구체화 및 확대, 공직자윤리위원회의 확대 등 다양하게 진화하였다.

최근 백지신탁제도의 도입 논의를 계기로 또 한 차례 공직자윤리법의 진화를 앞두고 있다. 그러나 그 동안의 공직자윤리법의 진화과정을 보면, 가지만 잔뜩 늘어나는 분기 진화는 과잉으로 이루어졌지만, 향상 진화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조화롭지 못한 진화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진화는 하였으되 제대로 된 진화라고 말하기 어려운 형상이다. 공직자윤리법의 핵심인 이해충돌에 대한 규정을 전혀 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직자윤리법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공직자의 이해충돌(Conflict of Interest) 발생 여부의 확인 및 회피이다. 재산을 등록하고, 심사하고, 공개하고, 취업을 제한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모두 공직자의 이해충돌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현 공직자윤리법에는 이해충돌의 회피는커녕, “이해충돌”이라는 단어조차 없는 실정이다. 당연히 공직자윤리법에 담겨져 있는 많은 내용들은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적 없이 공직자의 윤리를 확보한다는 추상적인 명분에 근거하여 상당 수준 형식적으로 시행되고 있을 뿐이다. 거의 전 규정을 이해충돌의 회피와 관련하여 운용하고 있는 미국의 정부윤리법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여연대는 오랜 준비과정을 거쳐서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을 국회에 입법청원하였다. 이해충돌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의 규정은 물론 다양한 이해충돌 해소방안을 담는 등 공직자윤리법의 실효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개정안을 마련하여 제출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많은 국회의원들이 다양한 내용을 담은 개정안을 앞 다투어 제출하였다. 그러나 어느 의원도 이해충돌이라는 공직자윤리법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또 가장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개념을 담은 개정안을 제출하지 않고 있다. 공직자윤리법의 기본적인 취지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주식을 백지신탁하고, 부동산 소유를 제한하고, 재산등록 기간을 10년으로 연장하는 것은 단순한 분기진화에 불과할 뿐이다. 줄기는 가늘고 약하고 보잘 것 없는데, 수많은 가지들은 제멋대로 웃자라서 결국 줄기가 가지를 지탱하지 못하는 기형의 형국이다.

공직자윤리법만 놓고 보면, 법의 진화는 기대하기 쉽지 않은 것 같다. 그 동안 20여 차례의 개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잰 걸음으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좀처럼 제대로 진화하지 않는다. 백지신탁 제도의 도입 논의를 계기로 향상 진화를 기대할 만한 시점인데도, 여전히 가능성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 다수의 여야 의원들이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을 경쟁적으로 내놓았지만, 어느 누구도 공직자윤리법을 전향적으로 향상 진화시킬 수 있는 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해충돌 논의가 전제되지 않는 백지신탁만의 도입 논의는 문제의 본질은 제쳐두고 엉뚱한 해법만 찾아 헤매는 꼴이다. 어디에 쓸 물건인지도 모르면서 보기 좋다고 덥석 사들이는 것과 하등 차이가 없다.

국회는 정말로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지난 수십년 동안 국회는 수많은 법들을 만들었다. 진화도 시켰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무수히 많은 법들을 퇴화시키기도 하였다. 공직자윤리법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 공직자윤리법은 진화냐 아니면 퇴화냐 하는 갈림길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직자윤리법을 퇴화시킬 것이 아니라면, 이번에는 제발 제대로 진화할 수 있도록 그에 걸 맞는 개정안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법에도 제대로 된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고 싶다.

윤태범 (방송대 행정학과 교수, 맑은사회만들기본부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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