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위원회 미분류 2003-01-29   1260

[지구촌 시민사회와 이슈 36호] 비극의 섬 : 억압과 빈곤이 초래한 살육

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공격이 고조되는 가운데 최근 9.11테러 희생자 가족모임인 평화로운 내일(September 11 Families for Peaceful Tomorrows) 소속 회원들이 이라크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지난 1991년 걸프전 당시 오폭으로 어린이 52명, 여성 261명 등 403명이 희생된 알이미리야지역을 방문하여, 지역 희생자 가족들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이 지역은 미국이 군사작전기지로 오해하여 폭탄을 투하했던 곳으로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뜻으로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편견을 버리고,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들이 같은 이유로 또다시 이라크를 방문하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은 아시아 분쟁지역 중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을 살펴보겠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아체(Aceh)분리운동

7세기부터 14세기경까지 인도네시아의 주요지역을 장악했던 슈리비자야 왕국이 인도네시아지역의 통합의 시초였습니다. 슈리비자야왕국은 각 지역 부족의 자치를 인정하면서 무역권을 독점하여 이를 통해 모든 부족을 다스렸습니다. 그후 인도네시아지역은 영국, 네델란드, 포르투갈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습니다. 아체지역은 인구 4백만명의 수마트라 서북쪽에 위치한 자치주입니다. 원래 이슬람 율법 국가를 표방한 독립국으로, 네델란드의 식민지 하에서도 강력하게 독립투쟁을 벌였던 지역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네덜란드는 종족 및 지역별로 독립을 약속하면서 인도네시아 연방정부와 협상을 하였는데, 이 통합과정에서 아체지역은 자치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바족(전체 인구의 45%)을 중심으로 한 인도네시아에 편입됨으로써 독립의 꿈은 무산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자치주로의 승격을 요구해온 아체지역주민들의 반발로 7년여의 분쟁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분쟁의 결과로 아체지역은 이슬람율법과 전통관습 및 교육에 대한 자율권을 획득하는 특별지구로 지정되었지만, 1966년 수하르또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강한 통합정책과 경제개발을 추진하면서 갈등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아체지역의 아룬(Arun)지방의 액화천연가스(LNG)는 인도네시아의 심각한 경제위기를 타개할 수 있었던 계기였습니다. 1977년 생산에 들어간 아룬유전으로부터 얻은 연평균 21억 달러의 국가수익은 1980년대 연평균 7%의 경제성장을 이룩하도록 한 발판이 되었으며, 수하르또를 ‘개발의 아버지’로 추앙받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경제개발과정에서 아체지역주민들은 소외되었습니다. 아체지역의 개발은 1975년 이래로 중앙정부의 주도아래 이 지역에 이주시키기 시작한 자바인들을 생산현장에 투입시켰고(1991년까지의 자바 이주민 숫자는 당시 아체 인구의 약 3%인 10만 5천명이었음), 이 지역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수익에 비해 아체지역에 돌아오는 것은 극히 미비하였습니다. 1997년의 경우 약 26억 달러(30조 루삐아)의 외화를 벌여들였지만, 아체주에 할당된 연간 예산은 수입의 0.34 %인 약 1021억 루삐아였습니다. 또한 아체지방의 산림자원이 주면적의 3/4인 413만 ha 산림이 그 동안 19개의 수하르또 측근 기업에 의해 무차별 벌목되어, 산간지방에서 얻은 수확물로 생계를 유지해오던 지역주민들에게 많은 타격이 되었으며, 1995년과 1996년에 약 1000억 루삐아 이상의 재산손실을 가져온 대홍수의 원인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수탈로 인하여 1976년 자유아체독립운동(GAM) 단체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무장투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하여 낮에는 정부군의 반군공격, 밤에는 아체 독립주의자들의 습격 등 살육전이 반복·지속되고 있습니다. 무장투쟁과 더불어 1998년 자유아체독립운동은 아체 전체 인구의 40%에 해당하는 약 150만 명의 주민이 모여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요구하는 집회를 개최한데 이어 1999년 자유아체독립운동은 아체주의 수도 반다아체에서 대규모 평화집회를 열었습니다. 1999년 집회에서는 하루에만 100명이 넘는 비무장 민간인들이 죽고 수백명이 총상을 입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인권유린은 수하르또 시절부터 비롯되었는데, 1990년 7월 붉은 그물작전(OJM: Operasi Jaring Merah)으로 명명된 토벌로 아체지역의 민간인에 대한 살인, 방화, 강간 등 인권유린은 극심하였으며, 특히 1995년 수하르또 사위인 쁘라보오의 특전사(꼬빠수스) 사령관 재임 시에 파견된 예하 부대의 만행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만행으로 1976년부터 작년까지 12만명이 숨졌고, 폭력의 희생자와 실종자를 위한 아체위원회(The Aceh Commission for Disappearances and victims of violence)에 의하면 2002년 1월부터 11월 동안 1,307명이 살해되었고 1,806명이 고문당했으며, 1,186명이 체포 또는 자의적 구금을 당하였으며, 몇몇 시체로 발견된 377건의 실종사고와 46명의 여성들이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위원회에 의하면 이 통계는 90년대 말 이후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아체지역에 대하여 분쟁종식을 위한 평화협정이 2002년 12월에 체결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자유아체운동(GAM) 대표들은 ▲ 적대관계 청산, ▲ GAM 무장해제, ▲ 정부군 철수, ▲ 자치선거 실시, ▲ 유엔 감독관 파견 등에 합의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평화협정 체결 즉시 모든 적대행위를 중단하며, 자유아체운동은 모든 무기를 국제 감시인단이 관할하는 병영에 넘기고, 공수부대 및 경찰기동여단을 포함한 대다수 정부군을 아체에서 철수시키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체지역은 오는 2004년 자유롭고 공정한 지방선거를 실시해 중앙정부로부터 광범위한 자치권을 넘겨받고, 공동안보위원회를 설립해 치안상황을 감시하기로 하였습니다. 협정의 체결에는 스위스 인권단체 앙리 뒤낭 센터 등 국제사회의 노력도 기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12월 9일의 평화협정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다시 폭력사태가 발생하는 등 갈등과 긴장은 전혀 사라지고 있지 않습니다. 폭력의 희생자와 실종자를 위한 아체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1월 9일 이 평화협정을 지지하는 평화집회가 개최되었는데, 대부분의 시민사회단체들은 인도네시아 치안당국의 제지로 집회장소에 도착하지 못하였고, 각 지역에서 집회장소로 가기를 원하는 현지 주민들에 대하여 인도네시아 군대가 발포하여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또한 수명의 주민들이 구타로 인한 심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들 부상자는 대부분 20대로서 17세 청소년도 포함되었습니다. 평화협정에는 적대행위 중지와 시민사회의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였지만, 인도네이사 정부는 평화적 대화보다는 여전히 군사적 접근을 취하고 있습니다.

필리핀 무슬림의 독립운동

필리핀 남부지역의 민다나오(Mindanao)와 술루(Sulu)지역은 원래 필리핀에 속하지 않는 독립된 이슬람국가였습니다. 한때 마닐라가 있는 루손(Luzon)섬까지 세력을 확대했던 이슬람 세력은 스페인의 통치가 시작된 16세기 중엽이후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지역으로 이주하여 기독교로의 개종을 강요하는 식민통치에 끊임없이 대항하였습니다. 필리핀 남부 무슬림들에 대하여 스페인은 300여년에 걸쳐 정복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이후 미국의 식민통치(1898-1946)에서도 기독교화와 필리핀 내로의 통합정책이 추진되었습니다. 미국은 무슬림 거주지에 많은 기독교인을 이주시켰는데, 이와 같은 정책은 필리핀인들의 우월함을 조장함과 동시에 무슬림에 대한 차별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여, 미국이 통치하던 1930년대부터 독자적인 국가수립의 요구가 제기되었습니다.

분리독립운동은 1960년대부터 본격화되었습니다. 이는 1950년대 이후 필리핀정부가 민다나오섬의 모로인(Moro 말레이-인도네시아 인종 그룹으로 민다나오와 술루 군도를 중심으로 하는 필리핀 남부지역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들을 일컫는 총칭) 거주지로 가톨릭교도인 필리핀인들을 대량 이주시켰기 때문인데, 이 정책을 실시하게 된 배경에는 루손섬의 토지문제가 있었습니다. 식민지시대부터 유지된 대토지소유제로 인하여 농민의 불만이 쌓였고, 농지개혁은 대지주계급에 의해 좌절되었습니다. 이러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농민들을 민다나오섬으로 이주시켰지만, 이지역은 공동체적 토지 소유제도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필리핀인의 이주와 함께 근대적 소유권이 도입되면서 모로와 이주자 사이에는 토지 이용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는 분리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특히 1971년 필리핀 정부군의 학살을 계기로 분쟁은 모로와 필리핀 정부의 대결로 확산되었습니다.

미수아리(Nur Misuari)가 이끄는 모로 민족 해방전선(MNLF : The Moro National Liberation Front)은 모 조직인 무슬렘독립운동(MIM)의 무장단체로써 리비아, 말레이시아,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등 회교권 국가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약 30년 동안의 무장투쟁 과정에서 정부군과 모로 민족해방전선측의 사망자는 1971부터 현재까지 12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1976년 리비아의 중재로 필리핀 정부와 모로 민족해방전선 간에 트리폴리 협정(Tripoli Agreement)이 체결되어 이슬람 지역 14개주와 9개시가 ‘민다나오 자치지역(ARMM : Autonomous Region in Muslim Mindanao)’으로 지정되었는데, 주민투표 결과 결국 4개주만이 자치지역에 포함되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 위축되던 분리독립운동세력은 투쟁방식과 관련한 노선갈등으로 1984년 강경파 하심(Salamat Hashim)이 이끄는 1만∼1만 5천명 규모의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 : Moro Islamic Liberation Front)이 형성되었고, 1천 5백명 정도의 극렬 무장단체인 아부사야프(Abu Sayyaf) 집단도 등장하였습니다.

필리핀 무슬림들의 분리 독립운동에 대한 평화적 해결모색은 1986년 필리핀 2월 민중혁명(Peoples power)이후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분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1996년 9월 2일 마닐라의 대통령궁에서 라모스 대통령과 모로 민족해방전선(MNLF)의 미수아리 의장은 내전을 종식시키고 민다나오 지역의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평화와 개발을 위한 남부 필리핀 평의회(The Southern Philippine Council for Peace and Development, SPCPD)구성 등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평화협정의 주요 내용은 ▲ `평화 및 개발 특별지역’ 지정(1976년 트리폴리 협정에 명시된 민다나오 회교지역 14개주와 9개시를 특별지역으로 선포), ▲ 평화와 개발을 관장할 한시 기구로써 `남부 필리핀 위원회’ 설치, ▲ 일부 모로 민족해방전선 요원의 군경 전환, ▲ 지역 치안을 담당할 보안군 설치 등이었습니다. 한편 2001년에는 필리핀 정부와 이슬람 최대 반군단체인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이 공식 휴전협약에 서명했습니다. 말레이시아의 중재로 이뤄진 휴전협정은 1996년 모로민족해방전선(MNLF)과 체결한 것과 마찬가지로 남부 필리핀에서 어느 정도의 자치를 인정한다는 합의를 구체화하였으며, 휴전 이행, 이슬람지역과의 관계정상화 방안, 보안, 사면 문제 등이 휴전협정의 주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슬람세력 중 극렬 무장단체인 아부사야프(Abu Sayyaf)는 아직 무장투쟁을 지속하고 있고, 폭탄테러와 군대의 소탕작전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지금까지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2002년 10월에는 아부사야프를 추적하던 필리핀 정부군이 반군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7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했고, 12월에는 필리핀 남부 마긴다나오주의 다투 피앙시 시장이 폭탄테러를 당했으며, 올해 1월에도 벌어진 정부군과 이슬람 분리주의자들간의 충돌로 최소한 반군 28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더욱이 필리핀의 경우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필리핀에 다시 주둔하기 시작한 미군이 있어 이 지역에서의 군사적 긴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의 분리독립운동은 종교와 민족(종족)간의 갈등으로 볼 수 있지만, 빈곤과 소외 등 경제적인 원인과 무장투쟁과 진압과정에서 자행되었던 인권유린, 정치적 탄압이 더욱 구체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구의 식민지쟁탈로 인하여 자의적인 영토분할과 억압적인 식민통치는 분쟁의 씨앗을 만들었으며, 독립과정에서 지역주민들의 요구가 좌절되고, 독재정치에 의한 탄압은 분쟁을 더욱 키웠습니다.

최근 양 지역 모두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분쟁을 종식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폭력은 악순환되고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들에 진정한 평화가 정착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단지, 국제사회가 함께 마음을 기울인 노력으로 마련한 평화협정을 바탕으로 평화가 정착될 수 있기 위한 국제사회의 감시와, 지원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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