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위원회 미분류 2003-02-19   1420

[지구촌 시민사회와 이슈 39호] 끝나지 않은 전쟁 : 아프가니스탄

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지난 2월 15일에는 전세계적으로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시위가 있었습니다. 전 세계 600여 도시에서 1천만명이 집회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960년대 베트남전 반대 시위 이후 최대 규모로 알려진 이날의 시위는 미국과 영국 등 이라크 공격을 주도하는 국가들을 비난하며, ‘부도덕한 전쟁 반대’, ‘석유를 위한 피흘림에 반대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평화적 사태해결을 촉구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도 33명이 서명한 이라크 전쟁 반대 결의안에 이어 2월 17일 한국군의 파병반대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였습니다. 안영근, 김홍신, 박명환 의원, 이미경, 김희선, 이호웅, 배기운, 송영길, 최용규, 정범구 의원, 김원웅 의원 등 11명은 이날 제출한 결의문을 통해 ‘이라크 파병 반대가 세계평화를 위한 실천이자 한반도 평화를 위한 의지임을 확신하며, 대한민국 국군의 이라크파병 반대를 결의한다’고 밝혔습니다. 한반도의 상황 역시 불투명한 지금, 평화를 지키기 위해 힘을 결집해야할 때입니다. 오늘은 지난 2001년 9.11 테러에 대한 보복이란 명분으로 미국과 영국에 침공당한 아프가니스탄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양한 민족의 땅

기원전 6세기 조로아스터교가 발흥하였고, 그리스 문화와 불교문화를 융합한 간다라 미술을 낳았던 지역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은 아시아와 중동, 동서양이 연결되는 지정학적 조건과 함께 다양한 민족이 분포하고 있어 민족간 분쟁, 그리고 외세와의 전쟁이 근대 이후 쉼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지역은 대부분 고도 1,000m를 넘는 고산지대에 험한 산맥과 사막이 있어 고립적이고 분산적인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 각 민족들은 독립성이 강하고 가족과 부족중심의 생활전통이 강하였습니다. 이 지역에는 다수민족인 파쉬툰족(인구의 약 50%), 농촌지역에 많이 분포한 이란계통의 타직족(인구의 25%), 중앙 고산지대에 살고 몽골계통의 하자라족(시아파, 인구의 약 16%) 등 대표적인 민족들과 우즈벡족, 키르기즈족, 투르크만족 및 누리스탄족이 있습니다.

파쉬툰족은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통일하여 국가를 세운 민족으로 파쉬툰와레이(파쉬툰 정신)라고 하는 독특한 도덕·관습법을 지키고 있는데, 용기·자유·독립을 숭상하며 이슬람교 이상으로 그들을 규제하고 있습니다. 이중에서 특히 바달(Badal, 복수), 멜마스티아(Melmastia, 환대), 나나와티(Nanawati, 보호)를 중요시 여기고 바달은 가장 중요한 의무사항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파쉬툰 정신을 지키며 강한 부계사회이자 대가족제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다른 민족과의 전쟁, 외세의 침략에 단호하게 대처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민족분포는 크게 파쉬툰족(Pashtun) 대 비파쉬툰족(non-Pashtun)으로 나눌 수 있는데, 18세기 들어와서 파쉬툰민족 내의 두라니부족이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통일국가를 건설하면서부터 이 지역의 갈등은 시작되었습니다. 즉, 중앙정부의 파쉬툰족 우대정책과 강한 부족중심의 자치 전통에 대한 간섭이 갈등을 초래한 것입니다. 더욱이 서구의 제국주의 진출과 냉전체제는 민족갈등과 더불어 외세와의 투쟁에 각 민족들이 이합집산을 하면서 더욱 복잡하게 갈등이 전개되었습니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경계하던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고자 3차례에 걸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제1차 아프간전쟁(1838∼1842), 제2차 아프간전쟁(1878∼1880)을 거치면서 영국의 통치에 맞서 투쟁하였지만 1905년에 이르러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중 아프가니스탄은 중립을 지키다가 1919년 반영국주의를 국왕이 표명하면서 인도에 적대행위를 취하자 제3차 아프간전쟁(1919)이 발발하였고, 이 전쟁 이후 라왈핀디 조약이 맺어져 영국의 외교지도권이 폐지되면서 아프가니스탄은 독립하였습니다.

민족 자결을 위한 지난한 투쟁

독립이후에도 왕정은 다양한 민족간의 갈등으로 끊임없이 불안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1973년 무하마드 다우드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채택하여 아프가니스탄공화국을 선포하였습니다. 지식인과 중산층 공산세력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던 무하마드 다우드는 쿠데타 이후 파쉬툰족 우대정책과 이슬람 약화를 시도하는 비파쉬툰족과 이슬람세력들의 거센 저항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 1978년 소련과 아프가니스탄내 반대파인 왕가세력의 지원을 받는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주의 정당(the People`s Democratic Party of Afghanistan : PDPA)의 쿠데타로 공산주의 정권이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나 정권출범 이후 다우드 정권의 와해에 동조하였던 이슬람교도 동맹과 대립하였고, 군부숙청작업에서 상당수 군인들의 반발과 토지개혁과 지방자치제 폐지 등의 조치를 취하는 과정에서 지방 부족들의 맹렬한 반발을 초래하였습니다. 인민민주당은 ▲ 중앙집권화 대 지방자치, ▲ 사회주의 대 이슬람주의, ▲ 무리한 근대화 정책 대 고유의 전통문화 등의 측면에서 반대파와 대립하여 대중적인 투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아프가니스탄의 28개주 중에서 23개주에서 항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내전의 지속으로 1979년 말까지 사상자 수가 5만명이 넘었고, 10만명 이상의 난민이 파키스탄으로 유입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정국이 혼미하자 당시 이란혁명의 성공 등 중앙아시아와 중동지역에서 확산되고 있던 이슬람 확산분위기 속에서 소련의 타지크 공화국이 이슬람화되는 것을 막고 완전한 소련파에 의한 새로운 정권의 수립 등을 목표로 1979년 소련은 대규모 병력을 투입시키면서 직접 개입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로써 아프가니탄 분쟁은 이슬람 정부수립을 위한 반군연합과 공산정권 및 소련을 축으로 한 전쟁(무자헤딘)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이후 9년간 계속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마침내 1988년 유엔의 중재 하에 휴전협정이 성립되어 소련군이 철수하였습니다.

소련군 철수이후 나지불라 정권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반군세력은 1992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공화국을 수립하였습니다. 여러 분파로 이루어진 반정부연합세력의 정권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은 또 다른 내전으로 이어졌습니다. 크게 타직족(Tajik)을 중심으로 한 랍바니(Burhanuddin Rabbani) 전 대통령과 대소련항쟁의 영웅 마수드(Ahmad Shah Masud) 장군이 이끄는 세력, 총리로 내정되었으나 불복하며 내전을 시작한 헤그마티야르(Gulbuddin Hekmatyar)의 파쉬툰족(Pashtun) 중심의 정파, 시아파인 하자라족(Hazara)을 중심으로 한 정파 및 소련군의 장군이었던 우즈벡족(Uzbek)의 도스탐(Abdul Rashid Dostam)이 이끄는 세력이었습니다. 이 세력들의 갈등과정에서 파쉬툰족을 바탕으로 한 탈레반 세력이 파키스탄의 지원에 힘입어 주도권을 장악하였습니다(이슬람 율법을 배우는 ‘학생’이라는 의미를 지닌 탈레반은 원래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원리주의자에 의해 파키스탄 난민촌에 설립된 종교학교 출신들이 주류를 이룬 세력입니다).

1996년 수도 카불을 점령한 텔레반은 국명을 아프간 이슬람 토후국으로 개칭하고 철저한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정책을 시행하여 여성의 직장활동과 교육이 금지되었고, 범법자에 대한 가혹한 극형(손발 절단이나 투석형)도 부활되었고, 2001년 3월 우상 숭배라는 이유로 2천년 역사를 가진 문화재인 바미안 석불을 파괴하는 등 이교도에 대한 배타적인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한 때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탈레반 정권이 반미주의 세력으로 변화한 것은 1998년에 있었던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였습니다. 아프리카 케냐와 탄자니아 주재 미국대사관에 대한 폭탄테러사건으로 빈 라덴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수단과 아프가니스탄에 미국이 미사일 공격을 단행했기 때문입니다.

9.11 테러 이후 테러의 주범으로 빈 라덴을 지목하면서 미국은 신속하게 아프가니스탄에 대하여 보복전을 개시하였습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현재의 이라크 전쟁과 마찬가지로 중앙아시아의 석유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 있습니다. 전세계 10%의 매장량으로 추정되는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아프가니스탄 주변국들의 석유를 아라비아해로 연결하는 송유관건설에 있어 아프가니스탄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에 반미정권이 서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보복전으로 인하여 미국 등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북부동맹 측의 지상전과 미국의 공중폭격으로 탈레반 정권이 사실상 와해되었고, 텔레반 정권의 몰락 이후 아프간정파회의에 따라 파쉬툰족 11명, 타직족 8명, 하자라족 5명 우즈벡족 3명, 기타 3명으로 배분된 과도정부를 수립하였고, 파쉬툰족 출신의 하미드 카르자이가 수반을 맡고 있습니다.

지울 수 없는 전쟁의 상처

20여년이 넘는 전쟁의 기간동안 참으로 많은 인권침해가 있었습니다.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에 따르면, 1978년 공산주의 정권은 수천명의 실종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인권침해를 자행하였습니다. 1979년 소련의 침공 이후에는 발생한 수많은 고문과 즉결 처형이 있었고, 무차별 공중폭격으로 인하여 1989년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에 의하면 55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였습니다. 수천명이 정치범으로 수용되었고, 불공정한 재판을 받았으며, 전기고문과 구타 등과 함께 심문을 받았고, 1980년부터 1988년까지 8,000명 이상이 처형당했습니다. 이러한 고문과 처형은 반군세력에 의해서도 역시 자행되었습니다.

소련군의 철수 이후에도 민중의 인권침해는 여전히 계속되었고, 탈레반이 주도권을 장악해나가는 과정에서도 시민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 무차별적인 공중폭격, 시민들에 대한 보복살인, 즉결처형, 고문과 강간 등 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위반이 있었습니다. 또한 텔레반 정권 하에서는 여성들의 활동과 교육, 직업 등을 엄격히 제한하여, 여성이 외출시 엄격한 옷차림 규제를 따르지 않았을 때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최근 Human Rights Watch 에 의하면 2003년 3월 이후 발생하는 이와 같은 전쟁범죄에 대하여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에서 다룰 수 있을 것이라 밝혔습니다. 국제형사재판소 규약에 따라 이 규약은 아프가니스탄에서 2003년 3월부터 발효될 예정이며, 이때부터 국제형사재판소는 전쟁범죄, 대량학살, 인권에 대한 중대한 범죄들에 대한 조사와 기소권한을 가지게 됩니다. 강한 부족사회 전통으로 인하여 사법체계가 매우 허약한 아프가니스탄에 있어 국제형사재판소의 활동은 전쟁범죄의 예방과 범죄를 저지른 이후 처벌받지 않는 상황들이 개선될 것으로 전망되어, 매우 중대한 진전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여성의 권리에 대해서는 여전히 암울한 전망입니다. 최근 과도정부의 정책은 다시 탈레반 시대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Human Rights Watch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 서부의 허래트시(City of Herat) 이스마일 칸 장군의 정부는 최근에 여성과 여자아동들에 대한 교육기회를 박탈하는 정책을 취했습니다. 남성은 더 이상 여성과 소녀들에게 개인교습을 하지않고, 소녀들은 소년들과 함께 학교건물에 있는 것이 불허되었습니다. 불행히도 이 사례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수도 카불을 벗어난 아프가니스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는 미군에 협조하였던 반텔레반 연합의 강력한 보수적인 지역 지도자들에 의해 여성에 대한 교육은 위협받고 있습니다. 많은 여성들과 소녀들은 학교와 대학으로 되돌아 갔지만, “단지 학교문만이 열려있을”뿐이었습니다.

난민과 이주민들에 대한 문제 역시 아프가니스탄에 남겨진 심각한 문제입니다. 국제사면위원회의 보고서에 의하면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은 미국의 공격이전에 이란과 파키스탄에 3백 5십만(2001년 12월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이 발생하였고 백십만명 이상의 이주민이 발생하였다고 밝혔습니다. 현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과 아프간 난민과 귀환국(Afghan Ministry of Refugees and Repatriation : MoRR)이 벌이는 귀환사업의 도움으로 2002년에 1백 8십만명 이상의 난민들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2십 5만명 이상의 이주민들(internally displaced persons : IDPs)도 이 귀환사업에 따라 귀향하였고, 2십만명의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스스로 귀향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난민유입에 따라 아프가니스탄은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파괴된 인프라구조를 복구하고, 사회경제적 시스템을 정상화하는 것과 더불어 난민과 이주민들의 삶에 대한 안전을 보장하는 것과 정착과 귀환에 필요한 즉각적인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에는 유엔 산하 기구들과 많은 국제 NGO들이 다양한 분야에 걸쳐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교육, 농업과 식량안보, 식량원조, 상업 및 산업, 개발분야, 보건과 공공복지, 인권, 지뢰제거, 정착과 주택, 물과 공중위생 등의 분야에 걸쳐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Migration(IOM), OXFAM Campaign, International Committee of the Red Cross(ICRC), CARE, Medicins Sans Frontieres(Doctors Without Borders), The International Rescue Committee(IRC) 등의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단체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는 국제사회의 더 많은 관심과 실질적인 지원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에는 알 카에다 잔당 소탕을 목적으로 아직도 미군이 남아있습니다. 2001년 10월 이후 미군에 의한 폭격과 북부동맹에 의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은 민간인들의 정확한 수와 재산피해정도는 알려지지 않지만 미국의 오폭과 불발탄, 대인지뢰 등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사례가 여전히 빈번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2001년 12월에는 미국의 폭격으로 25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52명의 민간인 시체를 유엔이 확인하였고, CNN뉴스http://www.cnn.com/에 따르면 최근 2월에 있었던 폭격에서도 적어도 17명의 민간인이 사망하였는데,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이라고 현지관리의 말을 인용하여 밝혔습니다. 또한 미국 관타나모기지로 압송된 탈레반 군인과 알 카에다 군인들에 대해 수갑과 발을 묶어 놓는 등 인권침해의 사실도 제기되는 등 이른바 ‘대테러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끝나지 않은 전쟁의 피해는 폭격이 진행되는 기간동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은 고스란히 아프가니스탄의 민중들이 겪고 있습니다. 2월 15일 지구촌의 곳곳에서 울려퍼진 반전과 평화의 목소리는 이와 같은 참상이 지역을 옮겨 이라크에서 다시 한번 발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전쟁은 수단으로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구촌 시민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벌이는 전쟁은 더욱더 찬성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Stop the War! No Blood for O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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