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위원회 미분류 2003-02-26   1753

[지구촌 시민사회와 이슈 40호] 강대국과 외세가 빼앗은 민족자결 : 쿠르드 민족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대구지하철 화재 사고 희생자분들에게 조의를 표합니다. 아울러 희생자 및 실종자 가족 여러분께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꼼꼼한 대책마련이 필요하겠습니다. 오늘은 ‘국가없는 민족’ 쿠르드족을 알아보겠습니다.

끈질긴 유배인들 : 쿠르드

아리아 계통의 종족으로서 대부분이 이슬람교의 수니파에 속하며(이라크 남부의 쿠르드족은 시아파에 속함) 고유언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약 2천명정도의 쿠르드민족은 중앙아시아, 중동, 러시아지역까지 넓게 퍼져있지만, 쿠르디스탄(Kurdistan)지역에 주로 거주하고 있는데 이 지역은 이란과 아르메니아의 국경 부근 아라라트산(5,165m) 북서쪽에서 티그리스강의 지류인 디얄라강 유역에 이르는 약 8만km2의 지역으로 터키·이란·이라크·시리아·아르메니아에 분할 소속되어 있습니다. 고도 2-3천m의 황량한 산악지대가 갖는 지형적 한계와, 전통적인 부족생활로 통합된 국가를 건설하기 어려운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이들이 수천년동안 국가없는 민족이 된 것은 주변국가들의 흥망과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유산때문이었습니다.

19세기에 들어서 서구의 본격적인 침략과 이에 대응하기 위해 오스만 투르크제국과 페르시아의 카자르 왕조는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고자 하였고, 이에 따라 쿠르디스탄지역의 자치는 박탈당하게 되자 쿠르드인들의 저항이 1826-1880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쿠르드민족의 독립은 1차 대전 이후 전후처리과정에서 국제적으로 보장받았습니다. 1차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자 전승국들이 오스만 제국과 맺은 1920년의 세브르 조약(Sevres)에 따르면 쿠르드 주민이 원한다면 본조약 발효 1년 이내에 독립적인 완전한 자치권을 새로운 터키 공화국 내에서 부여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쿠르디스탄 지역에서 터키 영토내의 부분만 인정된 것이었습니다. 즉 쿠르드인 영토는 다섯조각으로 분할되어 쿠르디스탄 지역의 1/3에 해당하는 쿠르드 독립국을 중심으로 서쪽은 프랑스령, 남쪽은 시리아, 동쪽은 페르시아, 북쪽은 아르메니아에 편입하도록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이 조약은 터키의 입장에서 보면 서구에게 많은 부분을 빼앗긴 주권을 침해당한 조약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터키내에서는 케말 파샤를 중심으로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 그리스군대와의 전쟁을 통해 그리스군을 몰아내고 오스만 투르크 정부를 폐지하고 터키 공화국을 수립하였고, 세브르 조약 대신 1923년 새로이 로잔(Lausanne)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세브르조약은 폐기되었습니다. 로잔조약을 합의한 영국은 세계최대 산유지역 중 하나인 모술지역이 자신의 관할하에 있는 이라크에 편입되는 이유로 로잔 조약을 쉽게 철회하였습니다. 이처럼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부합되었기 때문에 쉽게 세브르조약을 철회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쿠르디스탄의 영토적 지위와 쿠르드 민족문제는 언급되지도 못한 채, 영토는 분할되어 현재의 모습인 터키-이란-이라크-시리아-구소련 등 5개국에 걸쳐 제멋대로 구획되었습니다.

이후 쿠르드족의 독립 혹은 자치운동은 각 해당국가별로 중앙정부와의 투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진행된 독립/자치운동은 이후 냉전시대의 시작과 함께 중동지역의 국제정세변화에 따라 매우 복잡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즉 이라크 혁명, 이란 혁명,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전 등 중동지역의 정세변화는 미국과 소련 등의 외세간섭과 더불어 각 국가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쿠르드족이 이용되거나 탄압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터키와 이라크에서의 민족운동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터키에서의 민족운동

1920년대 터키 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케말정권은 쿠르드족의 자치를 인정하지 않았고, 비이슬람 세속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에 순니파 무슬림이 절대다수인 쿠르드인들은 적극적으로 저항하였습니다. 그러나 터키의 쿠르드족 저항은 어느 국가에서 보다 더욱 가혹하고 철저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1938년까지 25차례의 봉기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1925년 쉐이크 사이드(Sheikh Said)에 의한 반란이었습니다. 이것은 케말정권이 칼리프제도의 폐지와 종교교육기관인 마드리사의 금지와 같은 비이슬람 세속주의 정책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엄청난 학살과 함께 제압된 이 저항 이후 1920년대말에는 100만명의 쿠르드인을 강제추방하여 이란과 이라크 국경지방에는 수만의 쿠르드인이 사망했고, 난민이 발생하였습니다.

30년대부터는 쿠르드이주법을 제정, 강제이주를 시작하였으며 1950년대와 1960년대는 과거 일제가 한반도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쿠르드족에 대한 민족말살정책을 추진하여 언어사용 및 민족의상 착용을 금지하였고, 교육의 기회도 박탈하였습니다. ‘쿠르드’ 란 용어 자체의 언급이 금해졌고, 쿠르드인들은 공식적으로 ‘모국어를 잃어버린 산악인’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터키에서 공화당 일당체제가 종식되고 1950년 이후 다당제가 도입되면서, 제한적인 정치활동의 길이 열리고, 마르크스주의의 확산, 이라크의 자치운동에 영향을 받아 1978년 압둘라 오잘란(Abdullah Ocalan)이 창설한 쿠르드 노동당(Partia Karkaren Kurdistan : PKK)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초로 반봉건, 반제국주의를 표방하며 쿠르디스탄의 독립을 주장하였습니다. 1984년부터 이란/시리아 등에서 훈련지원 받은 후 터키 내 쿠르드 밀집지역에서 테러 및 게릴라 활동을 시작한 쿠르드 노동당은 1992년 지도자인 오잘란이 케냐에서 체포되어 터키로 압송되어 국가보안법원에서 사형선고가 확정된 이후 주요활동거점을 이라크 북부지방으로 옮겨 무장투쟁을 현재까지 지속하고 있습니다.

터키정부의 쿠르드족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은 미국의 원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터키는 미국의 전략적 동맹국이기 때문에 항상 상당히 높은 수준의 군사 원조를 받아왔는데, 터키군 장비의 약 80%를 제공했습니다. 1984년에 미국의 원조가 급증하였는데, 바로 이 해에 대대적인 쿠르드 노동당 반군에 대한 군사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잔악무도한 만행이 증가하던 1990년대 전반에 걸쳐 미국의 원조는 최고 정점에 달했습니다. 그 최고봉을 이루던 해는 1997년이었는데, 그 해 한해에만 미국이 터키에 제공한 군사 원조는 냉전 기간이었던 1950년부터 1983년에 걸친 전 기간에 미국이 쏟아 부은 것을 능가하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수만 명이 살상되었고, 2백만에서 3백만에 달하는 난민이 발생하였으며, 3천5백개에 달하는 마을이 파괴되는 동시에 대대적인 인종청소가 자행되었습니다(이 수치는 나토가 코소보에 감행한 폭격으로 파괴된 것의 7배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걸프전 이후 이라크 영토내 비행 금지 구역에서 조차 터키군이 월경하여 수많은 잔악행위와 공격이 자행되었습니다. 바로 미국이 제공한 비행기와 탱크, 폭탄으로…

이라크에서의 민족운동

이라크 내에서 쿠르드족의 독립운동은 1919년∼20년 영국군에 대항하는 최초의 봉기를 시작으로 1936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초기의 운동은 부족장의 권력유지를 위한 부족주의 운동 또는 단순히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운동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이라크 내 쿠르드족의 저항이 민족주의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1946년 물라 무스타파 바르자니가 이란내 쿠르드족이 독립국가인 마하바드 쿠르드 공화국수립(1946년)에 자극을 받아 쿠르드 민주당(Kurdish Democratic Party : KDP)을 조직하면서부터입니다.

이라크에서 쿠르드족의 독립운동은 이라크 혁명과 이란 혁명, 이란-이라크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양국의 정치관계에 따라 각국내의 쿠르드 민족은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란과 이라크 양국간에는 이라크 국민이 아랍족인 반면 이란 국민은 페르시아 민족이라는 인종적·문화적 차이, 종교에 있어서도 이라크가 수니파를 신봉하는 데 반하여 이란은 시아파를 신봉하는 등 갈등이 존재하였으며, 특히 페르시아만으로 흘러들어가는 샤트 알 아랍 수로의 지배권과 호르무즈 해협에 위치하는 3개 도서에 대한 국경분쟁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갈등 속에서 1960년대 후반에는 이란이 이라크의 약화를 목적으로 이라크내 쿠르드족을 지원하였으나, 1975년 알제리 협정을 통해 이란과 이라크 모두 쿠르드족에 대한 지원중단에 합의를 하는 등 쿠르드족 문제가 양국간의 갈등에 이용되기도 하였습니다.

1975년에는 잘랄 탈라비니가 쿠르드 애국동맹(The Patriotic Union of Kurdistan; PUK)을 조직하여 도시지역에서 토지분배와 지주 및 부족 지도자의 권한을 억제하는 정책의 사회주의 노선을 취했습니다. 이러한 쿠르드 애국동맹의 활동은 쿠르드 부족전통에 충실한 쿠르드 민주당과 잦은 노선마찰을 빗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이란-이라크 전쟁 중에는 이란이 쿠르드지역을 전략적으로 침공하였으며, 전쟁 중 이라크의 쿠르드족 탄압에 의해 쿠르드민주당과 쿠르드 애국동맹은 다시 연합하여 이란의 지원을 받아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이란-이라크 전쟁이후에는 이란에 협조했다는 구실로 이라크는 쿠르드족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하였습니다. 특히 1988년 후세인 정권은 미국의 원조하에 획득한 화학무기를 쿠르디스탄 지역에 사용함으로써 5천여명이 사망하여 국제사회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걸프전 이후에는 1992년 5월 쿠르드족 자치구는 이라크와 별도의 정부를 출범시키기 위한 총선을 실시하여 쿠르디스탄 자치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하지만 쿠르드족 내의 쿠르드 민주당과 쿠르드 애국동맹간의 권력투쟁은 사담 후세인의 개입을 초래하였고, 1996년 이란의 지원을 받은 쿠르드 애국동맹과 후세인에게 지원을 요청한 쿠르드 민주당간의 전투로 100만명 이상의 쿠르드족 난민이 발생하였습니다.

“쿠르드족한테 친구는 없다. 산이 있을 뿐이다” : 쿠르드 속담

이라크에 또 한번의 전운이 감돌고 있는 지금, 쿠르드 민족에게는 이 역시 불안한 미래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라크 북부지방의 쿠르드족들은 1988년 화학무기로 자신을 공격했던 경험 때문에 이라크전이 터질 경우 후세인 정권이 “쿠르드족이 미국과 협력했다”고 주장하며 생화학무기로 자신들을 다시 공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쿠르드족사이에 번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라크 전쟁이 그들에게 독립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라크에 거주하는 쿠르드족들은 1991년 걸프전 이후 미국이 설정한 비행금지구역(북위 36도 이북)에 기대어 사실상의 자치를 해왔지만, 국경에 의해 토막난 민족의 영토와 각 국가별, 그리고 국가내에 분열된 정치조직들로 인하여 단일한 독립국가 건설에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쿠르드족은 후세인 정권이 붕괴된 뒤 민주적 연방정부가 들어서 합법적인 자치 국가를 세울 수 있기를 바라고 있지만 터키의 경우 쿠르드족의 독립을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라크 전쟁을 위해 미국과 터키간의 합의에 따르면 미국은 이라크 북부지역을 침공할 미군 4만여명을 터키에 배치하는 대신 150억달러의 경제지원을 하고 터키군을 이라크 북부지역에 배치하는 데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터키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때 △ 쿠르드족 난민의 유입, △ 쿠르드족의 독립국가 건설, △ 쿠르드족의 이라크 유전지대 키르쿠크·모술 점령 등을 막기 위해 군대를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쿠르드족 무장세력의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에 대하여 쿠르드족은 터키가 이라크 북부 지역에 진입할 경우 충돌이 생길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어 이 지역의 위기는 이라크전의 위험과 함께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라크 지역의 쿠르드 민족은 또 다시 중대한 갈림길에 놓여있습니다. 이들에게 전쟁은 불안한 미래를 강요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라크전쟁을 반대하는 이유는 여기에도 있습니다. 서구 열강에 의해 자의적으로 그어진 ‘국경선’에 의해 찢겨진 쿠르드민족의 자결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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