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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연대위원회  l  국경을 넘어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합니다

  • 칼럼
  • 2013.07.24
  • 4507

* 한국은 아시아에 속합니다. 따라서 한국의 이슈는 곧 아시아의 이슈이고 아시아의 이슈는 곧 한국의 이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에게 아시아는 아직도 멀게 느껴집니다. 매년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아시아를 여행하지만 아시아의 정치·경제·문화적 상황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낯설기만 합니다.

 

아시아를 적극적으로 알고 재인식하는 과정은 우리들의 사고방식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또한 아시아를 넘어서 국제 사회에서 아시아에 속한 한 국가로서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나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고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2007년부터 <프레시안>과 함께 '아시아 생각'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필자들이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 문화, 경제, 사회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인권, 민주주의, 개발과 관련된 대안적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집트의 참으로 이상한 쿠데타

미국은 왜 군부쿠데타에 침묵하는가

김재명 국제분쟁전문기자 · 성공회대겸임교수

 

지난해 6월말 이집트 대선 결선투표(2012년 6월24일)에서 무슬림형제단 출신인 무함마드 무르시가 득표율 51.7%로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었을 때다.

 

바로 그 무렵 필자는 이집트 민주화 진통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글에서 이렇게 썼다. "이집트와 한국의 시차는 7시간이다. 어느 날엔가 자고 일어나면 우리는 이집트에서 제2의 민주화 혁명의 불길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관련 기사: "배반당한 시민혁명, 누굴 위해 피를 흘렸나" )

 

그런데 꼭 1년이 지난 뒤인 2013년 7월 3일 '제2의 혁명'이 일어나긴 일어났다. 그런데 이상스럽고 이해하기도 혼란스런 '혁명'이다. 무슬림형제단 출신으로 절반 이상의 지지표를 얻었던 무함마드 무르시 정권을 시민들과 군부가 함께 무너뜨린 모양새다.

 

이집트 민주화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티흐리르 광장에선 무르시 축출 소식을 듣고 시민들이 춤을 추고 대통령궁을 점령한 탱크부대원에게 시민들이 박수를 보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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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을 축출한 군부쿠데타에 항의하는 시위. ⓒAP=연합뉴스

 

 

노벨평화상 수상자, "쿠데타 아니다"

이른바 '중동전문가'라는 사람들도 혼란을 느낄만한 일들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분석해야 하는가. 누굴 위한 혁명이란 말인가. 그 뒤의 진행상황을 보면 더욱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군부 지도자들과 반무르시 정치지도자들이 함께 새로운 정치일정을 상의하는 모습이다. 민주적인 선거 절차를 거쳐 뽑힌 대통령이 군인들에게 붙잡혀 수용소에 갇히고 헌법이 정지됐는데도 '쿠데타'가 아니라고 한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 출신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무함마드 엘바라데이(이집트 야당인 헌법당 지도자)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중도적 자유주의자(또는, 세속주의자)로 알려진 그는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쿠데타에 참여해야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이것은 쿠데타가 아니다. 2000만 명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무르시가 퇴진하지 않았다면 파시스트 국가가 되거나 내전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법적인 틀에서 벗어났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무르시, 무엇이 문제였나

과연 그럴까. 무슬림형제단 출신의 무르시 대통령이 한 때 대통령의 권한과 이슬람 종교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폈던 것은 사실이다. 무르시가 이집트를 이른바 '세속국가'보다는 이란처럼 이슬람 종교의 입김이 센 이른바 '신성국가' 바랬던 흔적은 보인다.

 

그렇다고 엘바라데이의 주장처럼, 종교 독재로 나아갈 움직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다만 30년 무바라크 독재 기간 동안 누적돼왔던 경제적 모순(부의 불평등, 빈곤, 실업)을 풀 능력과 시간, 그리고 굳이 까탈을 잡자면 의지가 모자랐을 뿐이다.

 

돌이켜 보면, 2011년 봄 이집트 민주화 바람 속에 무바라크를 축출했던 혁명의 주력군인 민주시민들(청년층과 중산층 시민들, 좌파세력)의 눈길로 보면, 무바라크 하야(2011년2월12일) 뒤 지난 2년6개월 동안에 진행되온 이집트 혁명의 결과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들은 정치민주화는 물론 사회개혁과 경제정의 등 이집트의 전반적인 변화를 바랬다. 따라서 그들은 두세 가지 실망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이념적으로는 보수적이고 종교지향적인 무슬림형제단의 무함마드 무르시 정권이 출범하게 된 것에 실망했고, 둘째는 무르시가 이슬람 색채가 강화된 정책을 추진하면서 한편으로는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한 이른바 '파라오 헌법'을 국민투표(2012년12월)라는 형식으로 밀어붙인 것에도 실망했다. 게다가 처음 기대했던 만큼 경제 사정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저런 이유로 무르시 지지자들과 비판자들의 격렬한 충돌이 벌어져 피를 흘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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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무르시 시위대가 이집트 군부 쿠데타를 주도한 알시시 장군의 초상화를 불태우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혼란을 즐기는 어둠의 세력

 

여기서 짚고 넘어갈 대목이 있다. 무바라크 축출 뒤 과도기 이집트의 혼란을 은근히 즐기는 어둠의 세력이 이집트 안팎에 있다는 점이다. 국내적으로는 이집트 군부, 국외적으로는 미국과 이스라엘이다. 왜냐고? 거칠게 표현해서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먼저 군부. 30년 무바라크 독재의 하수인들인 군부는 무르시가 대통령에 오르기 전, 그리고 대통령에 오른 뒤까지도 과도기의 정치 일정을 주무르며 군부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 이집트 대선 결선투표일을 보름 앞둔 시점(2012년 6월8일)에서 군최고위원회(SCAF)는 이집트 헌법재판소로 하여금 "하원의원 3분의 1이 불법 당선됐다"며 의회를 해산하려 들었다. 의회 의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무슬림형제단을 견제하려는 꼼수임이 누가 봐도 분명했다.

 

군부의 움직임을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집트 대선 결선투표일을 열흘 앞둔 시점(2012년 6월14일)에서는 군부가 입법권과 예산감독권을 갖는 초헌법적인 임시 헌법을 발동해 곧 나올 새 대통령을 '식물대통령'으로 만들려는 오만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르시는 대통령에 오르자말자 의회를 재소집하고 입법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대통령령을 발령함으로써 군부에 정면으로 맞섰다.

 

힘겨루기를 둘러싼 대통령과 군부의 갈등 양상은 아무래도 명분이 약한 군부가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봉합이 되는 듯 했다. 그렇지만 군부는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무르시의 무슬림형제단 세력과 반무르시 세력의 대결구도 속에 결국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 아래 2013년7월의 쿠데타로 이어졌다.

 

이집트 군부의 장성들이 어떤 인물들인가. 지난날 무바라크 30년 독재를 물리적으로 떠받쳐온 공범자들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반무르시 야당세력은 군부 쿠데타의 '들러리'로 나선 셈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권력 게임에 몰입한 나머지 군부의 반민주적 속성을 돌아보지 않고 우군이라 착각하는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쿠데타의 단골 명분은 '혼란 수습'

 

정치사회적 혼란상을 수습한다는 명분 아래 군부가 쿠데타를 합리화하는 모습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이 그랬다. 12년에 걸친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1960년 4·19 학생혁명은 민주화의 시대를 열었다. 노동자 농민들의 생존권 요구를 비롯해 사회 여러 계층의 요구가 봇불처럼 터져나오는 것은 민주화 시대의 자연스런 진통이었다.

 

거의 날마다 서울 중심가 거리는 데모대의 물결로 채워졌다. 보기에 따라선 그런 진통은 '혼란'으로 비쳐졌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정치군인들이 5.16 쿠데타를 일으키며 내세운 명분은? '정치사회적 혼란을 막는 구국의 결단'이었다. 1980년 5월 광주 학살을 저지른 전두환 신군부의 정치개입 명분도 같았다.

 

1973년 9월11일 칠레에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을 우두머리로 한 군사 쿠데타도 그 명분은 '혼란 수습'이었다. 1970년 '인민연합'의 살바도르 아옌데가 남미 최초로 선거혁명에 따른 사회주의 정권을 출범시킨 칠레도 (1961년, 1980년의 한국과 마찬가지로) 민주화의 진통을 거듭했다. 경제정의와 평등을 내세운 아옌데가 구리 광산 등 다국적 자본이 움켜쥐고 있던 주요기업들의 국유화를 추진하자, 워싱턴에서 작전팀이 꾸려졌다.

 

지금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쿠데타 작전의 주역은 당시 미국의 대외정책을 주무르던 헨리 키신저(백악관 안보보좌관)와 정보기관 CIA였다. CIA의 공작금은 800만 달러. 그 자금으로 트럭업자들을 움직여 물자운송을 마비시키는 등 사보타지가 잇달았다. 미국은 칠레에 대한 대외차관과 의약품 등 중요 물자의 수출을 막았다.

 

결국 칠레는 키신저와 CIA, 그리고 칠레의 기득권층이 바란대로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다. 그런 상황을 빌미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고, '인민연합' 지도부와 지지자들을 포함한 3만명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칠레의 민주주의도 함께 무덤에 묻혔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혼란수습'이었는가를 묻고 싶다.

 

미 중동정책의 두 축, 석유-이스라엘

 

이쯤해서 이집트 쿠데타와 관련된 미국의 반응을 짚어보자. 전통적으로 미 워싱턴의 중동정책 입안자들은 △중동석유의 안정적인 수급, △이스라엘 안보, 이 두 가지 축이 흔들려선 안 된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석유 확보와 친이스라엘 일방주의라는 두 개의 축은 민주당 공화당 가릴 것 없이 미국의 역대 정권에선 한결같은 중동정책의 핵심적 요소이다.

 

중동정치상황의 변화와 관련해 미국이 중동지역에서 지금 가장 신경을 쓰는 지역은 내전 양상을 보이는 시리아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사우디 아라비아다. 이스라엘은 전통적인 미-이스라엘 동맹의 차원에서, 사우디 아라비아는 세계 최대의 석유자원 보유국으로 미국에의 안정적 석유 수급이라는 차원에서다. 미국이 사우디 민주화를 말하지 않는 것은 사우디의 친미독재왕정의 안정이 미국의 국가이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인구는 세계 총인구의 0.1%도 채 안된다. 그렇지만 미국은 대외원조액 가운데 20%쯤을 이스라엘에 할당한다(해마다 30억 달러의 군사원조). 미국의 대외원조 1위 수혜국인 이스라엘이 이어 이집트가 2위 수혜국(해마다 군사원조 13억 달러, 경제원조 2억 달러)인 것도 국경선을 맞댄 이스라엘과 전쟁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부탁이 깔려있다.

 

그렇지만 2011년 2월 이스라엘과 유기적 협력관계를 맺어오던 이집트의 무바라크 친미 독재정권이 무너지자, 워싱턴의 지도자들은 머리가 아파졌다. 무바라크에 비해 이스라엘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무르시는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런 무르시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이집트 군부의 행위를 미국과 이스라엘이 '쿠데타'라고 비판하지 않는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미국, 이집트 군부와 손잡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최근 보도는 이집트 쿠데타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준다. 이 보도에 따르면, 쿠데타가 일어나기 겨우 몇 시간 전에 한 아랍 국가의 외무장관이 무르시 이집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장관은 '미국 정부의 특사'라고 하면서 무르시의 권한을 축소하는 방안을 받아들이라는 미국쪽의 요구를 전했다. 무르시는 이 요구를 거절했고, 그 통화 뒤 무르시의 외교보좌관이 이집트 주재 미국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의 제안을 거부한다'는 무르시의 입장을 확인시켜줬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그런 대화가 오고간 바로 그날 저녁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 뒤로도 미국 외교관들은 무슬림형제단 간부들에게 '무르시의 실각을 받아들이고 앞으로의 정치 과정에 참여해달라'는 주문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로 미뤄보면 미국은 이집트 군부와 더불어 쿠데타 시점을 조율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마치 1973년 9월11일 칠레 쿠데타를 뒤에서 조종했듯이...

 

알제리 내전의 복사판 될까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한술 더 떠 "이번 달(7월)에 이집트가 내전에 빠질 수도 있었으나 군부 덕분에 내전을 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집트 군부의 행동이 쿠데타가 아니며 이집트 군부를 지지한다는 미국의 입장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발언이다.

 

여기서 케리 장관이 비춰보아야 할 거울이 하나 있다. 이집트가 속한 북아프리카의 알제리다. 지난 1991년 이슬람정당인 이슬람구국전선(FIS)이 총선에서 승리하자, 이슬람국가로 바뀌어갈 것을 두려워한 알제리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총선 무효를 선언했다. 그러자 내전이 터졌고, 7년 동안의 내전(1992-1998년)은 희생자 10만명을 낳았다.

 

알제리로부터 석유를 수입해가는 미국은 알제리 군부의 전쟁범죄적 행위에 눈을 감았다. 강성 이슬람주의자들의 소멸을 바란다다는 점에서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미국은 사하라사막과 지중해에서 군사 합동훈련을 하면서 협력관계를 다져왔다. 알제리는 지금도 내전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미국의 친이스라엘 일방주의, 석유이권을 위한 중동 친미독재정권 유착에 바탕을 둔 미국의 중동정책은 당연히 이슬람권의 반미정서를 증폭시켰다. 지구촌을 흔드는 테러의 뿌리를 캐보면 이스라엘을 일방 지원하고 중동 독재자들과 유착한 미국의 잘못된 대외정책이 깔려 있다.

 

이집트가 알제리의 복사본이 될 가능성은 낮지만, 쿠데타 주역들이 주장하고 미국이 기대하는 '안정'과는 거리가 멀 전망이다. 중동 불안이 유가상승으로 이어지면 중동석유 의존도가 85% 안팎인 우리 한국에도 좋은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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