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을 국경너머로] 주요 원조 공여국 연재④ 스페인

분산과 조정의 이중주

스페인은 원조 수행의 질에 있어서나, 원조 규모에 있어 노르웨이, 덴마크와 같은 모범적인 원조공여국이 아니다. 그럼에도 스페인 사례를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이유는 스페인의 원조 역사가 한국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EU가입국임에도 불구하고 1977년까지는 수원국이었다. OECD개발원조위원회(DAC)에 가입한 시점도 비교적 최근인 1997년이다.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탈바꿈한 나라로서 새로운 원조체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 스페인 대외 원조의 경험은 1995년 공식적인 수원대상국의 지위에서 벗어나 새로운 원조공여국가로서 역사를 쓰기 시작한 한국이 눈여겨봐야 할 점이다. 또한 스페인도 한국의 경우처럼 독재 정치의 경험이 있는 나라이다. 이런 점에서 프랑크 총통 사후 민주화 경험이 대외원조 정책과 방향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아울러 스페인 사례를 보며 대외원조의 효과적 실행과 관리 제도에 대한 시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스페인이 1998년부터 추진해 온 원조담당 기구의 조정과 통합의 제도 구축 노력은 지난해부터 국무총리실 산하에 ‘국제개발협력위원회’를 두고 대외원조의 통합성을 높이려고 시도하였지만, 그 효과가 지지부진하다고 평가받는 최근 한국의 현실에서 더욱 주목해보아야 할 것이다

EU에 못 미치는 원조 규모와 질

먼저 스페인 대외 원조의 규모부터 살펴보자. 스페인의 원조액은 2005년 기준으로 국민총소득대비(GNI)대비 0.29%이다. 1990년 0.20%, 2003년 0.23%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한국의 0.1%규모에 비해 매우 높지만 EU국가의 평균치를 훨씬 밑도는 규모이다. 2003년 기준으로 노르웨인 0.93%, 덴마크 0.84%, 벨기에 0.6%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이며, 총액수도 31억불(2005년 기준)로 인구나 경제력 측면에서 규모가 훨씬 작은 스웨덴보다 적은 액수를 집행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스페인 정부는 2002년 바르셀로나 유럽연합회의와 몬트레이회의에서 2006년까지 0.33%달성을 약속하고(현재 최종통계 미확인), 2008년에는 0.5%, 2012년에 0.7%를 달성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한편, 2003/4년 통계를 보면 총원조액수의 58%가 중간소득국가에 집중되어 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스페인의 ODA가 최빈국이나 저소득국가의 극심한 빈곤과 기아 퇴치 등을 목표로 하는 새천년개발목표(MDGs) 달성에 소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현 정부는 2003/4년 12%에 불과했던 최빈국 원조비율을 20%선까지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이 설정한 목표는 OECD국가 중에서 그리스와 미국을 제외하고 가장 낮은 비율이다. 스페인 ODA가 빈곤 감소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못한 이유는 스페인이 역사적으로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원조를 집중해 온 점에서 찾을 수 있다. 2005년 스페인 ODA의 최대 수원국은 니카라과와 온두라스이며, 상위 10개 국가의 반을 남미국가가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2003/4년에는 단 13%만이 가장 원조를 필요로 하는 사하라 남쪽국가에 집행되었을 뿐이다. 스페인 대외원조의 질을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다.

스페인의 구속성 원조 실태도 스페인 대외 원조의 수준을 낮게 평가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즉 스페인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다르게 여전히 스페인의 물자와 서비스를 원조와 연계시키는 구속성원조를 실시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최빈국의 경우에는 비구속성원조 형태로 전환하는 중이라는 점이다. 또한 양자간 원조에서 유상원조의 비율이 높은 점도 국제적으로 많이 지적되고 있다. 스페인의 유상 비율은 92년 80%에서 2001년 36%로 감소하였지만 DAC기준보다 현저히 높다.

스페인은 위에서 지적된 문제를 개선하고자 그동안 대외원조에 대한 평가를 반영하여 ‘개발협력마스터플랜(2005~2008)’, ‘아프리카계획’(2006-8) 등을 수립하여 발표하였다. 일종의 전략적 방향을 제시한 계획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전히 지원대상국에 대한 선정기준이나 재원 배분의 우선순위에 있어 문제가 있어 보인다. 예를 들어 마스터플랜에서 스페인은 라틴아메리카, 북아프리카의 아랍국가, 중동, 역사적 문화적 연계를 가진 나라들을 우선순위로 하여 29개 국가를 지원대상국가로 선정했는데, 이는 지역 전략적,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대외원조와 국제협력의 우선순위를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스페인 원조모델 – 분산된 원조 집행 조직

스페인 대외원조 체계에 대해서 살펴보자. 스페인 원조모델의 중요한 특징은 중앙과 지방자치체에 분산된 원조집행조직이다. 외무부, 경제부 등 15개의 중앙행정부와 17개의 지방자치단체가 모두 독자적으로 원조사업을 실행해 온 것이다. 이처럼 대외원조가 분산된 체제 속에서 실행되자, 스페인 의회는 대외원조의 일관된 집행과 효율적 조정을 위해 1998년 국제개발협력법을 통과시켰다.

국제개발협력법은 다른 무엇보다도 각 담당기관의 원조사업 목표의 일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때 일관된 목표는 ‘빈곤감소’이다. 인권, 지속가능개발, 양성평등, 공정한(equitable) 경제성장을 원칙으로 하여, 최우선 목표인 빈곤타파를 위해 사회경제적 개발, 안보, 평화, 민주주의, 인권의 기본 가치를 천명하고 있다. 특히 기본적인 사회적 요구(basic social needs) 분야에 빈곤감소 노력을 집중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비교적 짧은 시기에 민주화의 제도적 틀을 갖춘 스페인은 다른 어느 국가보다도 민주주의와 인권 등의 가치와 제도 구축의 경험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위치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한편 분산되어 있는 원조 담당 기구를 구속할 수 있는 목표를 법에 명시한 것도 매우 눈에 띄는 점이다. 지방자치정부가 자율적 예산편성권을 헌법으로부터 보장받고 있는 현실에서 모든 원조프로그램에 적용되는 원칙과 목표를 세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스페인의 이런 노력은 ODA집행의 혼란과 비효율을 겪고 있는 한국을 비롯한 다수 국가들에게 모범이 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스페인 원조 기구 개혁의 목적은 당연히 분산화된 원조 기구의 조정 기능을 강화하기 위함이다. 즉 행정부,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등으로 넓게 퍼진 원조 시스템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조정 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한 목적인 것이다. 통합대외원조법의 위상을 갖는 국제개발협력법에 따르면 외무부는 국제협력연간계획(PACI)과 다년간의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게 되어 있다. PACI에서는 개별국가별 원조목적을 각기 명시하도록 하며, 원조기관, 지역, 무상원조 섹터별로 예산을 배정한다. 이는 지방자치정부나 여러 중앙 행정부서의 원조실행을 하나로 묶어 통괄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외원조의 일관된 집행과 효율적 조정을 위한 기관들

주요 자문 및 조정(co-ordination bodies)을 위한 기관으로는 ‘개발협력협의회’(Development Co-operation Council)를 들 수 있다. 1995년 설립된 자문기구로서 시민사회, 개발전문가, 개발관련 민간기구들의 대화 포럼의 성격을 가진다. 주요 활동은 평가보고서와 마스터플랜이나 개발협력연간계획의 초안을 검토하는 것이다. 일 년에 네 차례 모임을 가지며, 특정분야에 관한 특별실무그룹 설치도 가능하다. 협의회는 16명의 시민사회인사, 10명의 정부인사로 구성되며, 외무부내의 국제협력과 라틴아메리카 차관 (SECIPI)이 의장을 맡으면서 시민사회와 협의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국제협력을 위한 행정부간위원회’(Inter-Ministerial Committee for International Co-operation)도 조정 기관 중의 하나이다. 이 위원회는 1986년에는 중앙행정부의 각기 다른 조직들의 원조정책을 조정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역시 외무부의 국제협력과 라틴아메리카 담당 차관이 의장이며 일 년에 최소 두 번, 소위원회가 최소 3개월마다 열리고, 실무그룹이 필요에 따라 모임을 가진다. 위에 언급한 ‘개발협력협의회’와 협의하면서 마스터플랜이나 개발협력연간계획의 계획서를 검토하고 국무회의에 제출한다. 2000년에는 중앙과 지방정부 원조기관 간 자문, 조정, 협력을 위한 기구로 ‘개발협력을 위한 지역간 위원회(Inter-Regional Committee for Development Co-operation)’를 설립하였다. 한편 스페인 의회에서도 최근 ‘국제개발협력위원회’를 설치하여 관련법이나 마스터플랜, 개별 국가계획을 심의하고 시민사회단체와 협의도 자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원조집행기구 – 중심적 역할을 맡고 있는 외무부

이제 스페인 원조가 어떤 기구를 통해서 집행되는지 살펴 볼 차례이다. 무상원조는 주로 외무부 산하 국제협력과 라틴아메리카 담당 차관과 스페인 국제협력단(Spanish Agency for International Co-operation, AECI)이 담당하고 있는데, 특히 스페인 외무부가 개발협력정책에 중심적 책임을 맡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개발협력과 라틴아메리카 부서가 같이 있을 정도로 라틴아메리카에 집중하고 있는데, 마스터플랜, 연간계획, 다른 전략적 사업과 평가를 모두 이 부서에서 담당하고 있다. AECI는 핵심 실행기구로서 무상원조와 소액금융대부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데, 외무부 산하에 있는 다른 원조담당 부서를 2000년부터 국제협력단으로 흡수통합 중에 있다고 한다.

유상원조는 주로 경제부 산하 무역과 관광 담당 차관이 담당하고 있다. 2000년에 조직개편을 실시하여 6개국에 나눠져 있던 원조업무를 해외무역 담당 사무국에 집중하고 우리나라 대외협력기금과 유사한 개발협력기금(Development Aid Fund, FAD)을 관리한다.

흥미로운 점은 스페인이 한국과 같은 유상-무상 시스템으로 대외원조를 실시하고 있으나, 외무부와 경제부가 모두 유무상 원조를 집행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외무부는 무상 중심, 경제부는 유상 중심으로 원조사업을 실행하고 있으나 국제개발협력법의 규정에 따라 외무부가 중심이 되어 있다. 왜냐하면 계획, 예산배정, 평가를 외무부가 담당하기 때문이다.

분산화된 협력모델 – 지자체의 역할과 NGO의 참여

한편 스페인은 분산화된 협력모델(Decentralized co-operation)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 평가할 수 있다. 2000년 통계를 살펴보면 전체 ODA의 16%를 지방자치단체가 집행한 것을 알 수 있다. 양자간 원조는 25%까지 수치가 올라간다. 대부분의 이 기금은 NGO를 통해 집행하는데 이를 통해 시민사회의 대외원조 참여가 활발하다는 것과 대외원조에 대한 스페인 국민의 대중적 지지를 알 수 있다. 2001년 유엔인구기금(UNPF)이 스페인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0%가 예산에서 원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낮다고 답했으며, 2000년 통계청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경제적 부담이 따르더라도 84%의 응답자가 개발도상국에 원조를 해야 한다고 답했다. 1990년의 58%에 비해 국민들의 인식에 많은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스페인 사례의 시사점

개략적으로 스페인 대외원조 사업의 현황과 큰 특징을 일별해보았다. 거칠게 살펴본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대외원조의 경험에서 주목할 것들이 분명하다. 첫째 ‘빈곤감소’라는 대외원조의 일관된 목표가 다양한 원조기관에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 대외원조의 방향을 규율할 기본 원칙과 철학조차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은 현 한국의 ODA실정에서 다원화된 ODA집행시스템의 정비까지 거론하는 것은 이른 감이 있다고 일각에서 주장할 수 있으나, 그런 현실이기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더불어 실제적인 ODA집행에 있어 분산화된 기관간의 다양하고 활발한 조정의 역할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눈여겨보아야 한다. 현재 한국의 ODA는 외통부와 재경부를 중심으로 집행되고 있으나, 복지부, 과기부, 국방부 등 많은 행정부처와 지자체에서 ODA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적절한 근거법이 없이 추진하고 있는 기관이 대부분이라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떤 분야에서 실시되는지,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DAC에서 권고하고 있는 ‘ODA 정책 조정위원회’라도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인 한국 현실에서 다양하게 조율되고 있는 스페인의 ODA조정기관의 역할을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구체적 사업내용 중 소액신용금융(micro credit finance)와 공치(Good Governance)도 우리의 주목을 끈다. 스페인은 1998년 마이크로 크래딧 기금(Micro-Credit Concession Fund, FCM)을 법제화하여 최하위층이 기본생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금융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1999년 볼리비아에서 6만 명이 2,700만 불의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이 기금 규모는 전체 유상원조의 25%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ODA 실행에 있어 스페인의 민주적이며 책임성있고, 투명한 제도구축에 대한 노력도 매우 인상적이다. 이는 짧은 기간에 민주화에 성공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민주화 과정에 있는 국가들에게 입법체제, 행정개혁, 분권화, 세제, 재정, 경찰훈련까지 민주적 제도수립을 지원하고 있는 스페인의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은 빈곤감소를 단지 경제적 차원에서 보지 않고 인권보호의 가치와 민주주의 제도 확립이라는 문제와 연결시키고 있는 독톡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

현재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의원을 비롯해 각 당에서 대외원조의 이념과 원칙에서부터 원조의 책임 주체와 시기, 평가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담은 법안들을 제출하고 있다. 그동안 각계에서 요구가 높았던 이른바 대외원조기본법 제정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각 법안에는 그동안 미묘한 차이가 드러났던 대외원조의 목적, 원칙과 논란이 되었던 대외원조업무의 이원화에 대한 나름의 대안들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시점에서 스페인 사례가 던지는 시사점을 검토하는 것은 유의미할 것으로 보인다.

손혁상(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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