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위원회 칼럼(is) 2008-05-21   1032

<아시아 생각> 그들의 ‘집’이 남다른 이유


태국 빈민운동의 결실, 홈리스 센터


2008년 4월 9일은 태국에서 방콕 노이의 철로주변에 노숙자 쉼터가 문을 여는 날이었다. 태국에서 첫 번째로 문을 여는 노숙자 쉼터의 이름은 ‘스윗 와트누 홈리스 센터’였다. 태국의 홈리스단체 및 빈민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철도청이나 사회복지부에 지속적으로 요구하여 완성된 시설에 빈민들은 작년에 작고한 빈민운동가 ‘스윗 와트누’의 이름을 사용되길 원했다. 태국 최대 명절인 송크란 직전에 있었던 개관식에 스님들은 물을 부어 축복했고, 방콕 부시장, 사회복지부 관계자 등을 비롯한 200여 명이 운집했다.
 
미디어에는 이날 참석한 명망가들이나 정부의 지원사업이라는데 의미가 있겠지만, 주민들에게는 빈민지역 주민운동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직접 참여하여 얻어낸 성과라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지는 날이었다. 방콕 시내의 공원이나 광장에 산재되어 있는 노숙자에 대해서 쫓아내거나 보호 시설에 수용하던 기존의 국가 정책과는 달리, 금번 노숙자 쉼터는 60여 명이 머무르면서 쓰레기 수거나 막노동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장소로 이용하는 곳이다. 방콕 시내에만 1500명 이상이 넘는 노숙자를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지만 제2, 제3의 센터를 개관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빈민이나 노숙자들을 범죄자나 사회의 골칫거리로 치부하는 국가 권력에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던 빈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요구할 수 있게끔 의식과 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스윗 와트누라는 인물을 ‘빈민의 대통령’이라 칭한 이유는 이러한 환경의 변화 때문이다. 스윗과의 인연으로 행사에 참여한 한 일본인 홈리스 대표는 자신들의 홈리스센터는 감옥과 같은 곳이었지만, 이 센터는 집과 같은 곳이라고 칭했다.
   


▲ ‘스윗 와트누 홈리스 센터’ ⓒ정법모

  철길 근처 장기임대 승인 얻어낸 태국 빈민들
 
방콕 시내를 가로지르는 철길 근처에는 어느 개발도상국과 마찬가지로 빈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 1961년 시행된 국가 경제 및 사회 개발 계획 이후에 시골 지역에서 터전을 잃은 빈민들이 대도시로 많이 유입되었고 공유지인 철길 주변이나 다리 밑에 많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주로 도심에서 쓰레기 수집이나 거리 청소, 건설 노동자, 운전기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이나 구석진 일들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태국 정부는 ‘불법침입자'(trespassers)로 규정하고 이들을 도심에서 쫓아내는데 주력해 왔다.
 
빈민운동단체 COPA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전국에 3750개 (513만 명)의 슬럼 지역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최근 태국이 경제 성장하면서 이들에 대한 강제 철거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대략 위에 언급한 지역 중 445개 지역이 철거 중이나 철거 공시를 받은 상태라 한다. 과거 국가 기관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도심 밖으로 쫓기거나 빈민용 공공 주택으로 내몰려야 했던 빈민들도 1980년대 후반부터는 새로운 협상 방법을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사유지나 공유지에서 빈민들이 집합적인 행동을 통해 그 지역에 대한 업그레이드 작업을 맡으면서 저임대의 장기임대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이들은 본인들이 새로운 주택 및 동네 설계를 하여 정부로부터 승인을 얻고 사회복지단체로부터 후원을 받아 직접 주택 건축에도 참여하게 된다.
 
어느 국가에 있는 빈민들과 마찬가지로, 도시 빈민들은 도시 중심이나 도심 변두리에서 자신들의 직업을 찾을 수 있으며 도시의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았을 때만, 비공식부문 직업이나 쓰레기 수거 등의 일을 할 수 있다. 이들을 도시에서 떼어내는 것은 단순히 거주지역을 이동하는 의미뿐 아니라 그들의 삶을 위협하는 것을 의미한다. 태국의 슬럼지역 주민조직의 연합인 ‘4개 지역 슬럼 네트워크'(Four Region’s Slum Network)는 태국 철도청과의 오랜 투쟁과 협상 이후 여러 지역에서 장기임대에 대한 승인을 얻어 내었다. 태국 철도청이 이 지역들은 개인 사업가나 상법 용도로 임대해주던 것과는 달리 2000년 이후에는 집합적인 빈민들의 요구에 응해주기 시작했다.
 
총전체 32000 헥타아르의 철도청 소유의 부지 중 8000 헥타아르에는 도시빈민들이 주거하고 있으며, 이들 인구는 1만7000가구에 이른다. 이들은 효율적이고 성공적인 협상을 위하여, 철도주변 빈민지역을 단계적으로 구분하여 협상하기 시작하였다. 즉 2000년 9월, 약 2년간 언론을 통해 압력을 행사하고 정부기관이나 거리에서의 시위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지속적으로 알려온 이후, 빈민조직들은 철도청과의 협상 자리에서, 철로에서 20m 이내 지역, 40m 이상 떨어진 지역으로 구분하여 각기 다른 대책을 주장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만들어 냈다. 40m 이상 떨어진 지역은 30년간의 장기계약, 20m에서 40m 지역은 3년간의 임대 및 개발 계획 진행 이전에 원래 거주지역에서 5㎞ 이내에 이주지역을 제공받을 약속을 받는 것, 그리고 20㎞ 이내 지역은 역시 원래 거주지역에서 5㎞ 이내에 있는 이주지역을 보장받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정부기구가 원칙에 합의했다고 해서 그 약속이 곧바로 실행되거나 정부가 적극적으로 집행하는 것과는 다르다. 여전히 주민조직의 집합적인 요구가 있었을 때 이러한 노력들이 실행에 옮겨지며, 범죄자 취급하던 노숙자에 대해서 처음으로 문을 연 노숙자 쉼터도 빈민조직들의 지속적인 요구와 협상에 의해서 이루어진 성과였다.
 
  적극적인 의사 관철, 자금 마련 나선 태국의 빈민운동
 
짧은 기간이었지만 태국의 빈민 지역 내의 주민조직활동은 필리핀에서의 빈민운동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필리핀에서의 주민조직운동이 의사결정이나 자금 마련에 있어서 다소 NGO에 의존적인 측면을 보인 방면, 태국 주민조직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켰으며,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자금 마련도 훨씬 적극적이었다.
 
특히 본인들 마을에 대한 계획을 직접 세우고, 당면 과제가 해결한 이후로도 조직이 지속적으로 타빈민지역 문제나 국가적 사안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물론 한 나라의 경제적 발전 수준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 중요한 이유가 되겠지만, 경제적 수준이 높은 나라에서도 자발적, 지속적인 주민운동이 실현되지 못하는 사례를 보면, 태국의 빈민운동에서 여러 가지 시사점들을 얻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이 된다.


정법모 (필리핀대학 인류학 박사과정)


<참고> 스윗 와트누의 생애 (COPA 활동가 Ake가 작성한 글 요약)
 
  
▲ ⓒ정법모



촌부리 주의 시골 지역에서 태어났던 스윗 와트누는 군사 독재 시기였던 1971년과 1972년을 대학에서 보내면서 사회 정의나 사회 변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973년 대학 3학년이던 체게바라, 마오쩌뚱, 호치민 등의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면서 학생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하여1973년 10월 14일 있었던 독재자 축출을 위한 시위에 학생회장으로 참가하였다. 하지만 민중시위를 통해 얻어낸 민주화시기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1976년 다시 군부에 의한 비민주적 통치가 시작되었다. 교육학을 전공하고 1975년부터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그는 여전히 학생운동이나 농민운동에 관련하다 1976년 복귀한 군사독재에 반대하던 학생들을 유혈진압했던 이후, 학교를 그만두고 정글에 들어가 무장투쟁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중간에 많은 학생들이 산에서 내려와 도시로 돌아갔으나 그는 1980년까지는 총창산에서 1985년까지는 춤포주에서 부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산에서 내려온 후, 1987년에는 두앙 프라테엡 재단에서 일을 하면서 NGO 단체인HSF(Human Settlement Foundation)과 함께 슬럼지역에서의 주민조직 USDA(United Slum Development Association)의 결성을 도왔다. 그 이후 복지 서비스나 지역개발사업을 하던 두앙 프라테엡 재단보다 주민들의 정치적 역량 강화를 추구하던 HSF 일을 1987년부터 맡게 되었다. 매일같이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사람들과 친화 관계를 맺고 일을 하면서 주민들을 조직하고 그들로 하여금 사회문제를 분석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성실하고 근면한 그의 조직화 방법외에 탁월한 정부부서와의 협상력으로 말미암아 여러 빈민 조직운동들이 성공적인 성과를 내기 시작하였다. 겸손하면서 예의바른 태도 외에 논리적이고 예리하게 상대를 설득하는 힘이 대외 협상에서 좋은 효과를 낳게 하였다. 1998년 USDA뿐 아니라 여러 지역의 주민조직들이 합세하여 4개지역 슬럼네트워크가 결성되었고 스윗은 창시 때부터 이 조직의 자문위원으로 일을 했었다. 슬럼지역 주민 운동에 노숙자들을 포함시켰으며, 도시빈민 뿐만 아니라 농민 그리고 태국 전역에 있는 빈민들을 연계시키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전국 빈민들의 연합 결성체였던 ‘빈민위원회'(Assembly of the poor)의 자문위원이었으며, 빈민운동들을 아시아 국가나 국제적으로 활동을 교류하게 하는 역할을 맡았다.
 
 빈민들의 정치의식을 고양하는데 힘을 기울였던 그는, 태국에 1992년 군사정권이 다시 들어섰을 때 이 체제에 반대하는 운동에도 관여했다. 이 당시 그는 빈민들에 대해서, 슬럼지역 주미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배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서거나 당면문제만을 푸는 것을 위해서만 투쟁하지 않는다는 점에 뿌듯해 했다고 한다. 일례로 태국 내 민주화 운동을 위해 결성된 ‘민주화를 위한 슬럼조직(Slum Organization for Democracy)’에는 500 여 명의 슬럼 지역 주민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빈민조직을 태국내 민주화운동조직인 CPD(Campaign for Popular Democracy) 활동과 연계하는 것도 스윗의 활동이었다. 스윗은 CPD에서 활동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으나 2005년부터는 대안적 진보 정당을 결성하는데 노력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민중들의 대중 정당을 만드는 데에는 여러 영역에서 흩어져서 움직이는 대중운동을 집결할 필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보정당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은 탁신정부의 비민주적 통치로 인한 퇴진운동을 위한 참여 때문에 연기되었다. 스윗은 민주화를 위한 인민연합(People’s Alliance for Democracy)에 빈민섹터를 대표하여 참여하게 되었고 탁신이 하야한 이후 스윗은 다시 빈민 섹터로 돌아와 진보정당을 결성하기 위한 노력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2007년 3월 11일 농민 지도자 세미나에 참여했다 돌아오던 중 갑작스럽게 심장질환으로 인하여 5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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