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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2010.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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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0일 필리핀 대선에서 코라손 아키노 전대통령의 아들 아키노 3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번 선거는 여러 가지 면에서 1986년 대선 당시 마르코스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민주후보로 나섰던 코라손 아키노 여사의 모습과 그녀를 지지하던 필리핀 국민들의 열정을 생각나게 한다. 당시 아키노 여사는 화려한 정치적 경륜을 바탕으로 필리핀 민주주의를 꽃피울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독재정권에 맞서다 암살당한 니노이 아키노의 유업을 물려받은 아내로서 민주세력의 구심점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대통령으로서 그녀의 업적은 보잘 것 없다. 진보세력을 제도권으로 통합시키는데 실패함으로써 개혁의 추진력을 상실하였고, 전통적 지배계층의 복귀를 막지 못함으로써 과두체제를 부활시켰다. 토지개혁법과 같은 민주적 개혁법안들은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으며, 사회적 불만의 고조는 8차례나 되는 군부쿠데타 시도의 빌미를 제공했다.

그러나 아키노 여사에 대한 필리핀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 그리고 필리핀 민주주의에 대한 그녀의 상징성은 퇴임과 더불어 더욱 빛났다.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기고 떠나는 그녀의 의연한 모습에서 필리핀 국민들은 민주적 지도자의 진실한 모습을 발견했다. 비록 권력의 자리는 아닐지라도 국가지도자로서 그녀의 위상은 변함이 없었다. 2001년 부패하고 무능한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현직에서 끌어 내릴 때에도, 2004년 대선에서 부정을 저지른 아로요 대통령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어 퇴임을 요구할 때에도 그녀는 항상 그 중심에 있었다. 이처럼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던 그녀가 지난해 8월 1일 오랜 지병으로 사망했다. 국민적 애도의 물결은 그녀의 상징색인 노란색으로 전국을 물들였다. 필리핀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아키노 여사를 떠나보내는 필리핀 국민들의 아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키노 여사가 떠난 지난해 8월은 다가올 대선을 앞두고 잠재후보들 사이에 선거경쟁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때만 해도 아키노 3세는 후보로 거론조차 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키노 여사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그는 단숨에 유력한 대선후보로 부상했다. 아직 출마를 선언하기도 전에 각종 여론조사에서 80%에 달하는 지지율을 나타냈다. 대통령감으로서 아키노 3세의 자질과 능력은 선거 캠페인 내내 논란이 되었다. 그가 가진 지난 12년간의 정치경력은 그다지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 지주가문이자 전직대통령의 아들로서 자신의 고향에서 하원의원 3차례 당선된 것은 필리핀 정치현실에서 ‘땅 짚고 헤엄치기’보다 쉬운 일이다. 그리고 2007년 상원의원에 당선된 후 3년 동안 그는 이렇다 할 정치적 업적이나 지도력을 보여준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민후보’로서 필리핀 민주주의와 코라손 아키노 여사의 상징인 노란색의 물결 속에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아키노 3세는 어머니 아키노 여사에게 향했던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적 열정을 담은 그릇이었다. 부부에 이어 모자로 이어지는 아키노 가문의 민주적 상징성은 또 다른 반민주적 지도자로 낙인찍힌 아로요 대통령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아로요 대통령은 재임기간 내내 부정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이란 오명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가족들의 끊임없는 이권개입 사건으로 부패한 지도자라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 주었다. 또한 임기 중 발생한 수많은 정치적 암살사건들은 인권을 유린하는 대통령이라는 의혹을 국내외 인권단체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받아 왔다. 아로요 대통령의 재임 중 사건들에 대한 진상조사와 처벌은 차기정권의 숙제임을 많은 국민들이 요구하고 있다. 이를 대비하여 아로요 대통령은 이번 선거에서 자신의 고향 하원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됨으로써 정치적 방어막을 세워 놓았다. 그리고 새로 소집될 제15대 의회에서 하원의장에 출마할 것이라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아로요 대통령의 권력에 대한 끝없는 집착과 이기적인 모습은 아키노 여사의 그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그의 아들 아키노 3세를 ‘국민후보’로 만들었던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필리핀 국민들의 끝없는 열정을 의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열정을 제도적 틀 안에서 실현시키는 데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는 필리핀 정치의 제도적 틀 자체가 과두체제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키노 3세의 당선을 두고 『상상의 공동체』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베네딕 앤더슨은 그가 우연히 “과두정치가문의 아들이라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보여준 것이 없다”고 하면서, 이는 단지 “과두정치의 복귀”라고 평가했다. 앤더슨은 필리핀의 이러한 정치현실이 ‘공적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의 부재에 기인한다고 역설했다. 즉 필리핀 국민들로 하여금 지혜롭게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도록 선도할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지식인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필리핀 국민들은 능력과 비전으로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적 열정을 실현시킬 지도자를 선택했다기보다는 단순히 불만스러운 현 정권과 대비되는 이미지를 찾아 결집한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부모로부터 필리핀 민주주의의 상징성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아들 아키노가 많은 사람들의 염려를 불식시키고, 형식만이 아닌 실질적 민주주의에 목말라하는 필리핀 국민들의 열망을 진심으로 받들고 실천함으로써 어머니 아키노보다 더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는 대통령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동엽 HK연구교수 (부산외국어대학교, 동남아지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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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읽고 유시민씨가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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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엽 교수님, 좋은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대선 당시 필리핀에서 연구를 진행하던 중이라 선거 감시 활동도 하며 필리핀 대선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균형있는 시각으로 이렇게 명쾌한 정리를 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당부에 저도 깊이 공감합니다. 아키노 대통령의 자질과 정치 가문화에 대한 우려 등 여러 비판에 동의하지만, 필리핀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상징하는 후보라는 점에서 진정 그 열망에 답할 수 있는 대통령으로 거듭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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