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위원회 칼럼(is) 2008-07-03   1316

<아시아 생각> ‘비폭력’ 집회를 위한 그들의 지혜

평화시위 사수, 인도네시아에서는? 

이명박 정부와 촛불집회의 팽팽한 대결이 장기간 지속되는 가운데 폭력에 관한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그렇지만 내가 학습대상으로 삼는 인도네시아의 실상에 비추어보면 한국의 시위대는 놀라울 정도로 평화를 지켜내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사람들이 대규모로 결집한 곳에서 폭력행동이 발생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시위현장 뿐만 아니라 경기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친구들은 한국에서 대규모 집회나 축구 응원이 평화적으로 전개되는데 대하여 놀라움을 표하곤 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외환위기로 물가가 폭등하자 이에 항의하는 집단행동이 곳곳에서 발생했는데 그 규모가 커지자 약탈, 방화, 강간이나 살인이 수반하는 극단적 폭력사태로 번져나갔다. 민주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각지에서 종족간의 균열이 인명과 재산을 앗아가는 수평적인 집단폭력이 발화했다. 마을 사람들이 도둑을 잡아 집단적으로 뭇매를 때리거나 불태워 죽이는 일도 허다하게 발생하였다.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건물과 승용차를 파괴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에서는 군중과 폭력이 근친의 관계로 간주되고, 상류층은 물론이고 중산층까지도 대체로 군중동원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산다.
  
▲ 인도네시아의 실상에 비추어보면 한국의 시위대는 놀라울 정도로 평화를 지켜내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프레시안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하는 대중폭력은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우선 가장 오래된 설명은 말레이계의 종족적 특성이 원래 그렇다는 것이다. 현지어 “아묵”(amuk)이라는 말은 정신을 잃을 정도의 발작상태를 가리키는 말인데 유럽식민주의자들이 이 단어를 영어사전에 올리면서 국제어가 되었다. 현지인들이 아묵 상태에서 행하는 폭력행동을 유럽인들이 열대의 이국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현지인들의 아묵은 평소의 인내심과 아주 대조적이었기 때문에 더욱 인상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6백여 년 전에 인도네시아 자바의 스마랑(Semarang)에 원정을 왔던 명나라 쩡허(鄭和)의 사관도 현지인들의 높은 인내심과 강한 폭력성을 모순적 현상으로 특이하게 보아 각별히 기록해두었다고 한다. 높은 인내심과 강한 폭력성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평소에 너무 참기 때문에 폭발적으로 의사표현을 한다는 식으로 인내와 폭력을 연결시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다른 한편에 군중폭력을 체제 탓으로 돌리는 해석들도 있다. 돌발적인 폭력을 통해 요구를 표출하는 행동은 장기간 지속된 폭압적인 체제에서 온건한 의사표출의 자유도 주어지지 않았고, 폭력적인 해법을 일삼는 체제로부터 폭력적인 해법만 전수받았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근자에 유력한 가설은 아묵 현상을 유발하려는 음모와 책동이 있다는 설이다. 시위현장에서 시위대의 일원처럼 행세하면서 폭력을 남보다 앞서 행사하는 외부인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들은 주로 “선동가”를 뜻하는 외래어를 차용한 “쁘로보까또르”(provokator)라는 용어로 지칭된다. 이를테면 1998년 5월에 벌어진 일련의 폭력사태들은 머리카락이 짧고 건장한 체격의 낯선 사람들이 시위대 속에서 먼저 폭력을 행사하면서 집단폭력이 시작되었다는 증언들이 나오고 이들이 특전대 소속이었을 것이라는 구체적인 음모설이 제기된 바 있다. 지방에서 벌어진 종족분쟁들도 작은 시비와 다툼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역시 외부인의 소행이고 신생민주정부의 개혁을 방해하려는 구체제 지지자들이 배후에 있다는 음모론이 나돌았다. 노동자들의 가두시위에서도 마찬가지 음모설이 작동하는데, 지방정부나 지방의회에 찾아가서 최저임금을 올려달라고 대규모로 시위를 벌이면 작업복을 입은 낯선 이들이 나타나 폭력행동을 선동하면서 기물을 앞서서 파괴하곤 한다고 노동조합 간부들이 주장하였고, 지방관구사령부가 관할 지역의 주요 회사들의 작업복을 골고루 보관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주장도 들어본 바 있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시위가 심각한 폭력을 동반하면 경찰이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언론은 ‘폭동’이라고 보도하고 시위지도부를 구속하는 ‘3박자’ 대응이 이어지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규모가 큰 군중결집을 두려워하고 보통 사람들의 집단적 의사표현을 신뢰하지 않는 수평적인 공포와 불신을 일반인들이 갖게 되고 국민들이 직접행동을 통해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보다 강력한 국가와 군부가 질서를 잡아줄 것을 기대하는 공권력 의존성이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군중폭력은 인도네시아에서 사회운동을 전개하는 이들에게는 각별한 고민꺼리일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인도네시아의 사회단체들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규모 시위를 기획하지 않는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러나 대규모 시위가 불가피하다면 자율검색을 시행하거나 안전요원을 배치하는 해법을 취한다. 자율검색의 대표적인 예가 1998년 5월에 수하르토를 끌어내린 국회의사당 시위로서 대학생들이 의회정문에서 수상한 이들의 진입을 막은 경우였다. 그런데 노동자와 빈민들의 진입을 막은 경우를 들어 자율검색이 대학생들의 우월감과 군중공포를 드러낸 비연대적 행동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반면에 시위대 중에 일부가 안전을 관리하는 임무를 띠는 자율적 안전관리는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져 일반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또 하나의 지혜는 즐겁게 시위하는 것이다. 특이한 분장, 보디페인팅, 퍼포먼스가 시위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고 사진기자들의 집중조명을 받곤 한다. 국제노동절시위도 지방 단위에서 공연, 경연, 집단놀이 등을 통해 카니발 형식으로 전개되곤 한다. 자율적인 안전관리나 집단놀이형 시위는 우리보다 인도네시아가 ‘선배’일 듯하다.
  
▲ “또 하나의 지혜는 즐겁게 시위하는 것이다. 특이한 분장, 보디페인팅, 퍼포먼스가 시위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고 사진기자들의 집중조명을 받곤 한다.” ⓒ프레시안 




인도네시아에서 집단의사의 평화적 표현을 위한 노력은 운동권만의 일은 아니었다. 1999년 6월에 44년만의 자유총선거를 앞두고 인도네시아의 한 일간지는 동부 자바의 수라바야(Surabaya)시가 폭동이 가장 강력하게 발생할 만한 화약고로 지목하였다. 그런데 의외로 사소한 시비만 있었을 뿐 폭동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과 자긍심이 가득한 시민들 덕분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당시 인도네시아의 민주화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민주사회에 대한 기대로 집단폭력이 자제되었을 것이라는 해석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자긍심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이 필요할 것이다. 수라바야는 2차대전 종전이후 승전국으로 복귀하는 서양식민주의 세력을 목숨을 걸고 격퇴한 역사적인 도시라서 ‘영웅의 도시’로 불리어왔으며 시민들도 직선적이지만 자존심이 강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자긍심 강한 시민들이 집단폭력으로 도시가 상처받는 일을 막아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1998년 5월로 다시 돌아간다면, 평화적인 대중시위의 선명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전국이 폭동으로 얼룩질 때, 족자카르타(Yogyakarta)시에서도 역사상 최대의 시민이 참여하는 시위가 벌어졌지만 군중폭력은 발생하지 않았다. 수하르토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민들 앞에 족자카르타의 술탄이 나타나서 시민의 뜻을 대통령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하고 시위대와 함께 행진을 하였다. 전통적 종교적 권위를 지닌 술탄이 책임을 지고 사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였기 때문에 시민들은 평화적으로 시위를 전개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수하르토가 물러났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촛불시위를 보면서 연상된 인도네시아의 집단시위 풍경이었다. 이런 이야기가 팽팽한 대결 국면 속에서 지친 우리 시민들에게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기회가 되었기를 바란다. 한국에 대한 함의 따위는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고 독자들의 몫으로 남긴다. 다만 인도네시아의 대중시위 현장에서는 전투성을 증대시키는 능력보다 평화를 지켜내는 능력이 더 결정적인 관건이고 평화시위를 사수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를 성사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소견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전제성(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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