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위원회 칼럼(is) 2007-10-01   1137

<아시아 생각> ‘야만의 시대’에 갇힌 버마, 가스 개발에 눈먼 한국

참담한 인권 유린…”독재의 역사를 기억하라”

버마(미얀마)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아니 이미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다. 상황은 우리의 1980년 5월 광주를 연상케한다.

88년 유혈 진압, 그래도 투쟁은 계속됐다

버마 군사정권의 야만성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1962년 이후 정치, 경제적으로 실정을 범한 버마 군부는 학생들이 주동이 되었던 1988년 8월 8일 민주항쟁을 유혈 진압한 바 있다. 그로 인해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유혈 진압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이 고조되자 군부는 민주화세력과의 타협책의 일환으로 1990년 5월 총선을 치루었다.

선거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과 민주화세력의 압승으로 끝났다. 반면 군부는 2%의 의석만을 얻는 대참패를 당했다. 그러나 군부는 파렴치하게 권력 이양을 거부하고 공안정국을 다시 재개하였다. 정당한 절차에 따라 국회의원에 당선된 선량들이 투옥되거나 망명 길에 올라야 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학생들 역시 투옥되거나 무장투쟁에 가담하거나 제3국을 찾았다.

이미 이른바 8888 민주항쟁을 이끌었던 민꼬나잉은 1989년에 투옥된 상태였다. 26세에 군부에 의해 사회로부터 차단된 그는 16년간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이렇듯 ‘시간이 정지된 땅’ 버마에는 민꼬나잉과 비슷한 고난의 시절을 겪었고 또 겪고 있는 30대, 40대의 학생들이 많다.

특히 군부가 대학의 문을 폐쇄하고 수많은 민주인사들을 투옥하거나 망명 길에 오르도록 하는 등 저항정치의 보루를 아예 봉쇄하면서 해외에 기지를 둔 민주투사들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특히 태국은 1990년 총선에서 국민의 종복으로 선출되었던 정치인들의 중요한 투쟁 기지가 되었다. 이들의 해외 활동은 미국과 유럽연합(EU)을 비롯한 서방진영이 버마군사정권에 대해 지속적으로 제재를 가하도록 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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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제사회의 제재, 그 중에서도 특히 경제제재의 효과는 이렇다 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은 아세안 창설 30주년을 맞은 1997년에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동남아시아’라는 기치하에 버마에 아세안 정회원 자격을 부여했다.

이때 아세안은 ‘건설적 관여’라는 이름하에 ‘경제교류’와 ‘개발’을 지렛대로 버마의 정치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의지'(?)를 시사했다. 물론 아세안의 ‘건설적 관여’는 ‘내정불간섭주의’를 표방해온 ‘아세안 방식’의 틀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버마 군사정부의 태도변화가 난망 상태에 빠지면서 서방과 국제인권단체, 그리고 해외에서 활동하는 버마 민주투사들의 압박은 아세안의 불간섭주의를 조금씩 변화시켰다. 대표적인 예로 아세안의 보이지 않는 압력에 따른 버마 군사정부의 2006년 아세안 의장국 지위 포기를 들 수 있다. 이는 직접적으로는 버마의 아세안의장국 지위 반대를 주도한 지역내 인권단체들과 ‘버마문제를 생각하는 아세안 의원 모임’의 성과로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버마군사정부와의 관계를 돈독히 해나갔다. 심지어 인도까지도 실용적 차원에서 그동안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버마군사정부와의 관계 개선을 꾀했다. 이는 이들에게 개발주의를 천명한 군사정부하의 버마가 실리를 챙길 수 있는 ‘시장’으로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정부 역시 대우인터네셔날이 버마에서 가스전 개발권을 따냈을 때 민간외교의 쾌거인양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가스개발 사업에 한국가스공사까지 참여하였다.

투자와 민주화는 별개? 버마인들의 피폐한 삶을 보라

1990년 총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은 버마 군부는 정치적 정당성의 결함을 아시아 역내 국가들과의 적극적인 경제교류를 통한 경제회생으로 보완하려는 전략을 취하였다. 그간 군사평의회의 명칭을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ROC)에서 국가평화개발위원회(SPDC)로 바꾼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동안 싱가포르, 영국, 태국 등이 최대 투자국이었고 한국, 인도, 중국 등이 부상하는 신생 투자국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번 민주항쟁의 배경이 되었던 석유값과 천연가스값의 앙등은 민생경제의 파탄과 군사정권이 내걸었던 개발주의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사실상 국민들의 삶의 질은 더욱 피폐해진 것이다. 이러한 빈곤의 악화는 개발의 과실이 국민이 아닌 군부의 호주머니로 들어간 결과라고 얘기할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미국에 의한 공격 가능성을 이유로 추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양곤 북쪽 산악지대로의 무리한 수도이전은 국민경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일련의 현상은 아웅산 수지를 비롯한 버마 민주화세력이 어째서 국제사회를 향해 민주화될 때까지만이라도 투자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던, 그리고 아세안의 ‘건설적 관여’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던 그 이유를 되돌아보게 한다.

국제사회의 노력 없이 ‘야만의 시대’ 끝날 수 있을까

이번 대규모 민주항쟁에 대한 유혈진압을 계기로 버마군부는 1990년 이후 지성의 산실인 대학을 폐쇄했듯이 버마족의 정신적 스승인 승려들을 향해 총구멍을 겨누고 사찰까지 폐쇄해야할 상황을 맞았다.

승려들의 비폭력 평화적 시위는 1988년 이후 20년 가까이 공포정치 하에서 숨죽여 있던 버마 시민사회를 일거에 회생시켰다. 승려들이 주도한 시위대의 구호는 승려들에 대한 공권력의 파렴치한 폭력 행위에 대한 사과, 연료값 인하, 시위도중 구속된 승려들에 대한 석방 등과 같은 비정치적 이슈에서 모든 물가 인하, 모든 정치범 석방 등과 같은 정치적 이슈로 급격히 발전하였다.

그러나 팍코쿠에서 시작된 승려들의 시위가 수도 양곤과 제2의 도시인 만달레이로 확대되고 여기에 일반 시민들까지 동참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승려들이 아웅산 수지를 거론하기 시작하면서 버마 군사정부의 인내력은 현저히 저하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우려한 바대로 얼마 안 있어 군사정부에 의한 유혈진압이 1988년처럼 다시 자행되었다.

현재로서 버마 국내에서의 비폭력 평화적 시위에 의한 군정 종식의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보인다. 버마 국민들과 승려들, 민주투사들은 자신들의 에너지를 동원할 수 있는만큼 다 동원하였다. 국제사회가 야만적인 군사정부에 자행되고 있는 참담하기 그지없는 인권유린을 종식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버마는 영원히 야만의 시대에 갇힐지도 모른다.

‘5월 광주’의 정신을 잇는 ‘참여정부’ 아니었나

우리 한국사회가 이만큼 민주화될 수 있었던 데에는 우리가 군사독재 시기에 있었을 때 외부에서 우리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열렬히 지원해주었던 국제사회의 노력도 큰 몫을 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 우리 사회도 그 빚을 하나씩 갚아 나가야 한다. 왜 우리가 군부에 의해 인간의 최소한의 기본권인 생명권조차 유린되고 있는 버마로 시야를 넓혀야 하는지 이제는 너무나 명확해졌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위급한 시점에서 보다 힘있게 압박할 수 있는 방법은 정부 수준에서 가능하다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얘기이다. 아직도 현정부가 ‘5월 광주’의 정신을 잇는 ‘참여정부’임을 자임한다면, 유엔인권이사국 진출에 성공하고 유엔사무총장을 낸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면, 무엇보다도 버마 군사정부에 압박을 가할 수 있는 강력한 인권외교의 지렛대를 사용해야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슬픔과 분노로 고통받고 있는 버마 국민과 민주투사들에게 ‘5월 광주’와 ‘6월 항쟁’으로 거듭 태어난 우리 사회야말로 진정한 친구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버마 45년 군사독재체제를 종식시키기 위해 우리사회가 버마 민주투사들, 국제사회와 적극 연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박은홍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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