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위원회 칼럼(is) 2014-03-28   2455

[아시아생각] 태국, 총선 무효화 판결 그 이후

* 한국은 아시아에 속합니다. 따라서 한국의 이슈는 곧 아시아의 이슈이고 아시아의 이슈는 곧 한국의 이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에게 아시아는 아직도 멀게 느껴집니다. 매년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아시아를 여행하지만 아시아의 정치·경제·문화적 상황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낯설기만 합니다.

 

아시아를 적극적으로 알고 재인식하는 과정은 우리들의 사고방식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또한 아시아를 넘어서 국제 사회에서 아시아에 속한 한 국가로서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나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고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2007년부터 <프레시안>과 함께 ‘아시아 생각’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필자들이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 문화, 경제, 사회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인권, 민주주의, 개발과 관련된 대안적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태국, 총선 무효화 판결 그 이후

 민주화 공고화 실패
 

김홍구 부산외국어대학교 태국어과 교수


며칠 전 태국 헌법재판소는 “현행 헌법에 따라 선거는 전국에서 같은 날 치러져야 하지만 지난 2월 총선은 그러지 못했다”면서 선거무효 결정을 내렸다. 2월 총선은 후보자 부재 때문에 남부 28개 선거구에서 시행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시위대의 총선 반대시위로 수 십 개의 선거구에서도 선거가 치러지지 못한 바 있다. 이를 두고 탐마쌋 대학교 법학 강사가 옴부즈맨을 통해 헌법재판소에 총선 무효화를 제소했던 것이다.  

총선 무효 판결에 대해서 친정부와 반정부세력간에 대화국면이 조성될 수 있다는 일부 낙관론도 나오고 있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총선을 보이콧했던 제1야당 민주당을 비롯한 반정부세력 국민민주개혁위원회(PDRC)는 새로운 총선은 반드시 개혁이 이루어진 후 실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런 주장에는 선거 전에 현 과도내각의 잉락 친나왓 총리가 물러나고 새로운 중립적인 인사가 임명직 총리로 임명되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된다. 선거 이전 기존의 주장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셈이다.

선거 무효 판결에 이어 조만간 잉락 정부는 더 큰 시련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 반부패위원회는 쌀 수매정책과 관련해 잉락 총리를 직무유기 혐의로 기소 준비 중이다. 잉락 총리 취임 후 농민들의 소득증대를 위해 시장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쌀을 수매해 커다란 재정손실이 발생했으며 지난해 말부터는 수매 재원이 고갈돼 농민들에게 그 대금을 지급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쌀 수매 정책은 잉락 정부의 지지 세력인 농민들을 지원하는 대표적인 포퓰리즘 정책이었다. 이 정책의 실패는 지금까지 탁신계 정당들이 전가의 보도와도 같이 여긴 포퓰리즘 정책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 줌으로써 정치적 지지기반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 반부패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한 잉락 총리의 인정여부 진술 일자를 3월말까지 15일 더 연장하기로 결정했는데 혐의를 조사한 뒤 상원과 검찰에 해임 및 기소를 권고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잉락이 기소되어 총리직을 물러나게 되면 국민민주개혁위원회가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임명직 총리에 관한 논의가 불거질 것이 뻔하다. 이렇게 되면 친, 반 정부세력 사이에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는 현상유지가 깨지게 될 것이다. 이런 사태를 잉락 정부와 친 정부 레드셔츠는 가장 우려하고 있다. 현재로는 임명 총리는 불법이며 잉락이 물러나면 다음 과도정부의 총리 역시 집권 여당 프어타이당 출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말같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레드셔츠는 얼마 전부터 반부패위원회 사무실 입구를 봉쇄해 압력을 가하고 있다.  

잉락 정부를 옥죄고 있는 사건은 이 뿐 만이 아니다. 지난 3월 12일 헌법재판소는 이미 국회를 통과한 고속철도 건설 등 인프라 구축 사업비 2조 바트 차입법안을 위헌이라고 판결한 가운데 민주당은 동 법안을 추진한 잉락 총리의 탄핵 절차를 밟겠다고 선언했다.

잉락 정부는 지난해 4월 상원법 개정안(현재의 일부 선출 일부 임명에서 전원 선출로의 개정)을 추진한 바 있는데 헌법재판소가 상원의원 선출 규정 개정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함에 따라서 반부패위원회는 개정법안을 통과시킨 상원의장을 기소하기로 결정했다. 조만간 반부패위원회는 상원에 탄핵을 요청할 예정이다.

친 정부 성향의 현 상원의장은 하원이 해산된 상황에서 잉락 총리가 물러나면 차기 총리 후보자를 지명할 권한이 있다고 여겨지는 인물이다. 이와 관련해서, 반부패위원회는  국회에서 이 법안을 통과시킨 308명의 상·하원 의원들을 조사해 고발하기로 결정한 바도 있다. 앞으로 이들이 유죄로 판정되면 관련 프어타이당 의원 200명은 다음 총선에서 출마가 금지된다.

헌법재판소나 반부패위원회 같은 이른바 독립기구(옹껀 잇싸라)들의 결정은 하나 같이 잉락정부의 입지에 치명상을 입힐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다. 독립기구들의 무소불위의 역할을 견제하기 위해서 친 탁신 레드셔츠의 독재 저항 민주주의 연합전선(UDD)은 이들과 군부에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총선 무효화는 반정부세력, 독립기구, 군부 등이 암맛 세력(기득권 귀족계급)과 결탁해서 만들어낸 정교한 시나리오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레드셔츠 측에서는 독립기구는 텔레비전의 모니터이며 암맛 세력은 리모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총선 무효화 직전부터 이를 감지한 레드셔츠는 지방을 순회하며 조직을 강화했고, 행동전위대격인 이른바 “민주주의 보호 자원봉사대”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지도부를 개편하여 강경파인 짜뚜펀 프롬판을 지도자로 내세우기도 했다. 그는 헌법재판소의 총선 무효화 판결에 맞서 조만간 대규모 시위를 벌일 것임을 예고했다.

짜뚜펀은 국민민주개혁위원회의 쑤텝 트억쑤반이나 육군사령관인 쁘라윳 짠오차 대장과 앙숙이다. 2010년 5월 레드셔츠 시위에 대해서 군부가 강경진압함으로써 1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당시 레드셔츠를 지휘한 인물이 짜뚜펀이며, 민주당 정권하에서 부총리를 지낸 쑤텝과 그 휘하의 쁘라윳은 시위대 강경진압을 감행한 인물들이다. 상황에 따라서 다시 한번 이들간의 진검승부가 예상되기도 한다.

최근 들어 레드셔츠와 군부와의 갈등이 심각해지고 있다. 레드셔츠의 일부 지도자들은 현 정권의 정치적 기반인 북부 지방에 ‘란나공화국’을 건설하자고 제의했다. 이른바 국가분리론(얙 팬딘)이 그것이다. 그러자 군은 치앙마이에 소재한 레드 셔츠 지부를 국가 분리 선동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이 사건 이후 그 동안 중립적인 위치에 있음을 강조했던 군의 자제력도 한계에 달하기 시작한 것 같다. 

총선무효화 이후 헌법에 따르면 60일내에 새로운 선거를 치러야 할 것이지만 민주당과 반정부세력은 개혁 없는 선거에는 불참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번 사태전개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하는 2006년의 예는 앞으로 정국전망에 큰 시사점을 던져 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상황은 이러했다.

언론인 쏜티 림텅쿤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 국민연맹(PAD)의 퇴진압력에 직면해서 탁신 총리는 2006년 2월 24일 의회를 해산시키고 4월 2일 조기총선을 치를 것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서 PAD와 야당들은 총선을 보이코트하기로 결정했으나 선거는 감행되었다. 하지만 PAD의 선거 보이코트 결정은 태국 정치사상 유래가 없었던 900만표 이상의 기권표를 만들어내 선거의 정당성을 치명적으로 훼손시켰다. 이번 선거에서도 민주당과  국민민주개혁위원회는 선거를 보이코트해 선거의 정당성을 크게 약화시켰다.

이후 국왕의 조언을 받은 헌법재판소는 5월 8일 총선 무효화 판결을 내리고 새 총선 실시를 결정하게 되었으며 총선 날짜는 10월 15일로 정해졌다. 하지만 이후에도 친, 반탁신파간의 시위로 정치사회적 불안은 가중되었다.  이번에도 아직까지 새로운 총선일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총선이 무효화 되고 정치불안이 예견된다는 점에서는 닮은 꼴인 셈이다. 

2006년 총선 무효판결은 일파만파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PAD는 총선이 무효화 되자 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관리 공정성을 문제 삼고 선거관리 위원들이 물러날 것을 주장해, 결국 선거관리위원들은 형사처벌을 받았다. 상원에서는 새로운 선거관리위원들을 선출키로 했는데 공정한 선출을 위한 대외적 압력 등으로 선출이 늦어짐에 따라 계획된 새로운 선거가 제대로 실시될지 극히 불투명한 상황이 되었다. 현재 역시 총선 무효 후 어떤 일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생각할 여지를 던져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06년 총선 관련 부정사건으로 헌법재판소는 타이락타이당을 포함한 5개 정당의 해체여부를 심판하기로 결정해 커다란 정치적 파문이 일게 되었다. 극도의 불안한 정국 속에서 선거가 있기 전인 9월 19일 군사쿠데타가 발생했다. 

위 2006년의 예에서 보듯이 이번 상황도 과거와 유사하게 전개되는 측면이 있다. 총선 무효화 이후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돌발변수들이 널려있는 가운데 확실한 사실 한 가지는 정국의 향배는 여전히 헌법재판소 등 독립기구들의 결정과 군부의 태도에 달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화의 공고화에 실패한 현재 태국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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