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칼럼(jw) 2005-07-25   1920

<안국동窓> 이건희, 홍석현 그리고 노무현

진작에 공개되었어야 했던 ‘이상호 X파일’이 결국 공개되었다. 인권보호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대한민국 법원의 판결 때문에 목소리는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지만, ‘이상호 X파일’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제 우리 국민은 물론이고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알고 보니 ‘이상호 X파일’은 대단히 중요한 자료였다. 그것은 이 나라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정경유착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이 자료의 공개를 막기 위해 당사자인 홍석현 주미대사와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은 법원에 방송금지소송을 냈다. 한마디로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소송이었다.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조금이라도 반성했다면, 이런 소송은 차마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소송은 자신들이 저지른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실정법의 보호를 받고자 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이 소송 때문에 ‘이상호 X파일’의 주인공이 누구인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법원의 판결에 따라 모든 방송과 신문은 ‘이상호 X파일’을 보도할 때에는 모 신문의 간부와 모 재벌의 간부라고 보도했지만, 그 보도에 바로 이어서 홍석현과 이학수가 ‘이상호 X파일’에 대한 방송금지소송을 냈다고 모두 보도했기 때문이다.

나는 홍석현과 이학수의 행태를 보며 궁지에 몰리면 자기 머리를 풀 속에 처박고는 잘 숨었다고 생각한다는 까투리의 행태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0세기 초에 현대 정치극의 새 장을 열었던 독일의 에르윈 피스카토르가 1927년에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함께 제작한 <라스푸틴>이라는 연극에 관한 일화를 떠올렸다. 이 연극은 1918년까지 독일 황제로서 1차대전의 전범이었던 빌헬름2세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에 대해 빌헬름2세는 법원에 소송을 냈고, 법원은 황제를 묘사한 부분을 삭제하라고 피스카토르에게 명령했다. 이에 대해 피스카토르는 다음과 같이 대응했다.

매일 저녁 공연마다 그 장면 대신 법정으로부터의 공문(公文)이 큰 소리로 낭독되었다. “본 장면은 전 황제를 ‘완벽한 바보’ 그리고 ‘고집스러운 멍청이’로 묘사하였으므로”라는 공문의 내용이 읽혀질 때마다 관객은 폭소를 터뜨렸다. 법정의 공문은 이 연극이 연일 매진되도록 하는 데 큰 몫을 담당했다(조엘 쉐흐터(1985), 김광림(1988), <어릿광대의 정치학 – 두로프의 돼지> 실천문학사, 14쪽)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이야, 정태수 삼보그룹 회장의 말을 빌리자면, ‘마름’이라서 그렇다치고, ‘이상호 X파일’에서 드러난 홍석현의 행태는 정말 놀라운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중앙일보>라는 이 나라의 3대 중앙 일간지의 하나를 소유한 자이고, 지금은 주미대사로 가장 중요한 대사직을 수행하고 있는 자이며, 올 가을에는 유엔 사무총장에 나설 야망을 품고 있는 자이다. 이런 대단한 자가 이건희 삼성재벌 회장을 대신해서 ‘돈 심부름’이나 했던 것이다. 물론 그 액수가 엄청나고 그 대상이 더욱 대단한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고 그가 이건희 삼성재벌 회장을 대신해서 ‘돈 심부름’이나 했다는 사실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그도 사실은 이건희의 ‘마름’이었던 모양이다.

‘이상호 X파일’에서 우리는 네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첫째, 삼성재벌의 정경유착 방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 동안 술자리에서나 떠돌던 ‘설’들이 명백한 사실로 드러났다. 검찰은 이 사실을 낱낱이 밝혀서 관련자들이 모두 응분의 법적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미 드러난 ‘기아’ 매수공작만으로도 홍석현과 이학수는 물론이고 이건희도 구속해야 마땅할 것이다. 삼성재벌이 엄청난 자금력을 이용해서 최강의 정경유착을 이루고 이 나라의 경제를 주무르고 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났다. 이 나라가 정말 ‘삼성공화국’이 아니라면, 검찰은 삼성재벌의 잘못을 철저히 징죄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도 삼성재벌의 잘못에 대해 제대로 징죄하지 않는다면, 검찰은 ‘삼성 검찰’이라는 오명을 결코 벗지 못하게 될 것이다.

둘째, 독재세력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했는가에 대해 다시금 잘 알게 되었다. 독재세력은 ‘자기 편’까지도 철저히 감시하고 통제했던 것이다. 민주화가 성숙되지 않은 상황에서 독재세력의 충견이었던 안기부는 늘 하던 대로 감시와 통제의 눈길을 번득이고 다녔다. 그 결과 우리가 정경유착의 실상과 삼성재벌의 실태를 있는 그대로 알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역설이며 나름대로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사 청산이 과거에 매달리는 일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바로잡는 일이며 미래를 향한 디딤돌을 놓는 일이라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세째, 한나라당이 어떤 식으로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는가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1997년의 대통령 선거는 이른바 ‘세풍’으로 얼룩진 ‘더러운 선거’였다. 한나라당은 국세청을 동원해서 23개 기업으로부터 166억 3000만원을 받아내서 선거자금으로 썼다. 당시에 삼성재벌은 돈을 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번에 삼성재벌이 따로 100억원이 넘는 돈을 이회창 쪽에 전했으며, 그 ‘돈 심부름’을 홍석현이 직접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보수언론과 재벌과 한나라당이 똘똘 뭉쳐서 김대중 후보를 제압하고 이회창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그야말로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한나라당이 공개적으로 밝혔듯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 참으로 반성하고 있다면,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했는가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네째, 노무현 정권은 자신의 책임에 대해 깊이 반성해야 한다. 만일 홍석현과 이학수와 이건희의 ‘과거’에 대해 몰랐다면, 이 정권은 참으로 무능한 정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거꾸로 만일 홍석현과 이학수와 이건희의 과거에 대해서 알면서도 홍석현을 주미대사로 임명한 것이라면, 이 정권은 참으로 문제적 정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 정권은 시민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미 ‘파렴치범’으로 감옥에 갇혔던 전력이 있는 홍석현을 주미대사로 임명한 것에 대해 국민 앞에 겸허히 사과해야 한다. 어설픈 현실 논리로 하늘의 해를 가릴 수는 없었다. 현실의 장애를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식의 현실 논리는 결국 현실의 장애에 투항하는 현실 논리가 될 뿐이다.

<중앙일보>는 통신비밀보호법을 강조하고 나서고, 삼성재벌은 언론의 위법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참으로 가소로운 행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희와 홍석현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가에 대해 반성할 생각 따위는 아예 하지도 못하는 모양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후안무치’요, ‘적반하장’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노무현 정권도 이제 정말로 깊이 반성해야 한다. 삼성재벌과 동맹을 맺는 것으로 정권 재창출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는 생각 따위는 소낙비에 깨끗이 씻어 버려야 한다. 정녕 국민의 뜻을 저버리고 ‘절치부심’하며, ‘와신상담’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싶은지 묻고 싶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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