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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근태 선생을 추모하며

이국운 한동대 교수

최근 민주통합당의 전당대회에서 여러 후보들이 주장한 이래 "지방검찰청 검사장 직선제"가 검찰개혁의 새로운 방안으로 주목되고 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폐지나 고위공직자 비리조사처 설치 등 검찰개혁을 위해 그동안 논의되었던 방안들은 검찰인사제도에 관한 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화 및 다른 국가기관을 통한 제도적 견제에는 공을 들였지만, 정작 검찰인사에 대한 시민들의 직접적 개입을 제도화하는 데는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소위 지검장 직선제는 기본 발상 자체가 다르다. 지검장 직선제는 한 마디로 현재 대부분의 형사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각 지방검찰청의 검사장을 관할구역 내의 주민들이 선출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의 관점에서 예컨대 미국의 각 주에서 오랫동안 시행해 온 지역검사(district attorney)제도를 벤치마킹하여 한국 사회의 실정에 맞게 재구성하자는 주장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발상에서

 

구체적인 제도설계에 관해서는 더 많은 토론이 필요하겠지만, 검찰권력 자체의 민주적 구성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지검장 직선제는 검찰개혁논의의 지평을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격상시킬 것이 예상된다. 따라서 앞으로의 논의에서 이에 찬성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은 모두 배전의 노력으로 각자의 논리와 대안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은 본격적인 제도개혁논의를 염두에 두면서, 나는 이 글에서 지검장 직선제라는 발상에 관한 일종의 집단적 브레인 스토밍(collective brain storming)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찬성 측과 반대 측 모두에게 유익한 논점들이 도출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선 한국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두 가지 사건을 상기해 보도록 하자. 하나는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이근안 경감 등에 의하여 갖은 고문을 당했던 故 김근태 선생의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그로부터 약 2년 뒤인 1987년 1월 같은 곳에서 물고문 등으로 사망했던 故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이다.

 

김근태 고문사건의 담당검사 000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이 두 사건에는 검사들의 이름이 어른거리고 있다. 첫 번째 사건의 담당 검사가 누구였는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형사사건의 수사권, 수사개시권, 수사종결권을 검사가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형사사법체제에서 담당 검사가 없을 수는 없으므로 검찰의 공소장과 사건기록에는 반드시 000검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을 것이다. 1985년 12월 19일 첫 번째 공판에서 김근태 선생 자신의 진술을 통해 잔인한 고문사실이 폭로되던 순간, 법대 왼쪽에는 000검사가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검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두 번째 사건의 경우는 상황이 정반대이다. 박종철의 시신을 화장하겠다고 몰려든 경찰들과 외부의 압력을 단호히 뿌리치고 부검을 통해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을 밝힌 검사의 이름을 두고 두 개의 이름이 옥신각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까지 써서 그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는 쪽에서는 그 이름이 '안상수'라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외압을 막고 진짜 공의로운 결정을 한 검사의 이름이 '최환'이라고 한다. 고인의 25주기 추도행사에서도 이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을 보면 그 검사의 이름값이 아직도 대단하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울 듯 하다.

 

'안상수' 그리고 '최환'이라는 검사의 이름

 

그렇다면 한 쪽에서는 담당 검사의 이름이 스르르 사라져 버리고, 다른 한 쪽에서는 담당 검사의 이름을 두고 옥신각신이 벌어지는 이 코미디 같은 상황은 왜 벌어지게 된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가장 근본적인 것은 검사의 임명과 보직이 청와대-법무부-대검찰청을 잇는 인사라인을 통하여 시민들의 의사와 아무 관련 없이 오로지 "통치적 관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통치권자의 자의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이러한 검찰인사제도는 임명되는 검사의 관점에서나 수사를 당하는 형사피의자의 입장에서나 일종의 우연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달리 말해, 이 시스템에서는 김근태 사건의 담당 검사도 우연히 그 사건을 맡게 되었을 뿐이고, 박종철 사건의 담당 검사도 우연히 그 사건을 맡게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김근태나 박종철의 입장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보면 故 김근태 선생을 깊이 추모하면서도 그 사건의 담당 검사 이름에 관심을 두지 않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검사 이름을 둘러싼 논란에도 짐짓 시큰둥할 뿐인 우리 시민들의 태도가 한국 사회의 콘텍스트에서는 더욱 지혜로운 처세술인지도 모를 일이다. 담당 검사의 이름은 어디선가 정해져 내려올 뿐인데, 그것 가지고 이리저리 옥신각신을 해 봐야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쁜 검사의 이름이든 좋은 검사의 이름이든, 그걸 따지는 것은 다 부질 없는 일이 아닌가?

 

"그때 지검장 직선제가 있었다면"이라고 상상해 본다면

 

한국 사회에서 이와 같은 체념(諦念)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일지에 관해서는 다른 기회에 논의를 이어가기로 하자. 여기서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그저 한 가지 흥미로운 상상이다. 만약 그때 각 지방검찰청 관할구역의 주민들이 지검장을 직접 선출하는 제도가 한국 사회에 존재했더라면, 위 두 사건에 관련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었겠는가?

 

일단 김근태 사건의 담당 검사의 이름이 슬며시 잊혀지는 일은 발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직선 지검장 자신이 그 검사를 가만 두었을 리가 없으려니와, 만에 하나 그렇게 했더라도 그 다음 지검장 선거에서 상대 후보나 유권자들이 이 문제를 묻어 두고 갔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정말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지만, 현직 지검장과 상대 후보, 유권자 모두가 담합하여 사건을 덮으려고 했더라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근태 선생 자신이나 그 가족, 변호인, 심지어 그를 보호하려는 의로운 시민들에 의하여 곧장 대검찰청에 고소가 제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종철 사건의 경우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진짜 의로운 검사가 누구인지를 두고 옥신각신이 벌어지기는 했겠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일찍 그 문제가 해소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 문제가 검찰권 행사의 공정성과 독립성을 판가름하는 척도인 한, 차기 지검장 선거에서 핵심 쟁점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선거과정이 거듭되면서 진정한 명예와 허황한 거품이 구분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과정이 매끄럽게 완결되지 못한 경우라도, 최소한 지금처럼 25주기를 맞은 고인의 영전에서 여전히 누가 잘했는지를 강변하는 우스꽝스럽고도 가슴 아픈 풍경은 연출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선거를 통해 호명할 권리, 그냥 '검찰'이 아니라 검사 000으로서

 

내친 김에 내 나름의 즐거운 상상을 마저 펼쳐 보자면 이렇다. 만약 그때 지검장 직선제가 있었더라면, 김근태 선생을 고문했던 경찰을 더 일찍 처벌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아예 그러한 잔인한 고문 자체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만약 그랬다면 박종철은 죽지 않고 지금 우리 곁에 환히 웃는 마흔 아홉 살 중년으로 살아 있을 것이고, 김근태 선생도 죽지 않고 도봉구의 청년들과 조기축구 한판을 마친 뒤 그 어눌한 말투로 청년 일자리 문제에 관한 고민을 토로하고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독자들 가운데 지검장 직선제에 비판적인 분들은 이러한 상상을 지검장 직선제에 호의적인 편견의 산물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분들에게 나는 정중하게 제안하고 싶다. "만약 그때 지검장 직선제가 있었더라면..."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김근태 사건과 박종철 사건을 다시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 그 결과로 앞에서 내가 제시했던 것과 다른 상상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시기를 권한다. 다른 사건들을 가지고 다른 상상을 펼치는 것도 얼마든지 환영이다. 여러 사람의 상상력이 발휘되면 될수록 지검장 직선제의 장단점이 다양한 각도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 때문이다. 그리하여 앞으로 전개될 본격적인 제도개혁논의에서 서로에게 유익한 논점들을 도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독자들 가운데는 "만약 그때 지검장 직선제가 있었더라면..."으로 시작하는 이러한 상상 자체를 싫어하거나 거부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한 반응이 앞에서 말한 체념, 즉 한국 사회에서 더욱 지혜로운 처세술에서 온 것일지, 아니면 일종의 우연에 모든 것을 맡기는 현재의 검찰인사제도에 대한 지지에서 온 것일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단지 그래도 전자이기를 바라면서, 그에 관하여는 다른 기회에 논의할 것을 기약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글은 프레시안에 기고(2012.2.2)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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