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칼럼(jw) 2004-07-12   1281

<안국동窓> 대법원은 ‘파열(破裂)’이 필요하다.

변호사 1년차 시절, 헌법재판소를 상대로 한 첫 소송이 ‘예비판사 임용거부처분 위헌확인 헌법소원’이었다. 시국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판사임용이 거부된 동기생을 대리했었다. 당시 필자뿐만 아니라 현 사법개혁위원회 위원장인 조준희 변호사를 비롯한 공익법센터의 쟁쟁한 변호사들이 모두 소송대리인에 이름을 올렸지만, 결과는 ‘각하’였다.

‘각하’란 한마디로 소송거리도 되지 못한다는 결정이다. 예비판사임용을 거부한 결정이 대법원에 의해 내려졌기 때문에 애초에 헌법재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법원의 재판’까지도 헌법소원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독일 등과는 달리, 우리 헌법재판소법에 의하면 법원의 재판을 심판대상에서 제외하고 있기 때문이다(헌재법 제68조 1항). 물론, 판사임용에 대한 대법원의 결정이 ‘법원의 재판’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철옹성같은 법원조직

올 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2004년 2월, 대법원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집행유예형을 선고받은후 사면된 전력이 있는 이모씨에 대해서 또다시 예비판사 임용을 거부했다. 대법원은 “전과사실이 부적격 판정의 주된 이유였기는 하지만, 전과의 배경, 이적표현물 제작 등 가담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정법 위반으로 형을 선고받았다고 하나 이미 사면되었을 뿐 아니라 그 원인이 되었던 민주화운동에 대한 시대적 평가가 변화하여 관련자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대법원의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실제로 1996년부터 2000년 사이에 임용이 거부된 17명 중에 시국사건 전과가 있는 신청자가 9명이었다는 사실을 보면(2000년 국정감사 자료), 법원이 얼마나 폐쇄적이고 경직된 조직인가를 금방 알 수 있다. 과연 매년 임용되는 120여명의 예비판사중에 과거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소위 ‘운동권 출신’이 끼어들어갈 자리가 단 1자리도 없단 말인가.

법원조직의 정점인 대법원

이처럼 철옹성같은 법원조직의 정점에 대법원이 있다. 대법원은 서열과 기수 위주로 운영되어왔던 법원조직의 경직성을 대변하고 있다. 지난해 8월 대법관 제청과정에서도 그 관행은 깨어지지 않았다. 일부 자문위원의 사퇴와 소장판사들의 서명사태를 통해 홍역을 치루긴 했지만 철옹성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 후 만 1년이 지나 대법원은 또다시 여론의 심판대에 올랐다. 새로운 대법관제청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며칠전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한국여성단체연합, 참여연대 등 4개 시민사회단체는 ‘바람직한 대법관 후보 4인’을 공개추천했다. 4개 단체는 시민참여의 중요성과 함께 사법부가 시대변화에 맞게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책임을 강조하는 한편, 사법부 가운데 최종적 판단권을 갖고 있는 대법원이야말로 현재 국민들의 생활 뿐 아니라 미래 한국사회의 모습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함을 설파했다. 또한 단순한 흑백논리로 진보와 보수를 이야기할 수 없는 이 시대에 맞는 사회적 가치기준을 세워나가는데 대법관 임명이 지닌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바람직한 대법관상

위 4개 단체가 후보자를 선정한 기준은 법원개혁에 대한 소신, 여성·노동·환경 등 사회경제적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인권을 옹호하고자 하는 의지, 행정입법기관에 대한 적극적 견제의지, 법관 이외의 다양한 사회경험 등이다. 비공개로 후보를 추천한 대한변호사협회도 비슷한 기준을 적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민단체와 변호사단체의 대법관후보 추천이 수용될지 아직은 미지수이다.

그러나, 변화의 조짐은 있다. 대법원은 지난 6월 29일 대법관 추천과 관련하여, ‘대법관을 누구든지 제청할 수 있고, 후보들을 심의할 대법관제청자문회의에 시민대표 3명을 추가할 수 있도록 관련 내규를 개정한 바 있다. 또한 대법원장이 따로 후보추천을 하지 않고 시민단체 등에서 추천된 후보들에 대한 제청자문위원회의 평가를 그대로 수용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대법원이 이번에야말로 서열과 기수 위주의 대법관 임용방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가치관의 반영‘이라는 기준에 적합한 인물을 내놓을지 주목되는 이유이다.

‘파열’을 통해 국민의 신뢰를 얻어라

최근 [사법개혁위원회]에서 변호사 등 다른 직역에서 일부 법관을 충원하는 ‘법조일원화’가 합의되고, 구체적인 로드맵이 제시되었다. 또한 법조인력의 수급방식을 기존의 사법시험이 아닌 로스쿨제도로 전환하는 것이 검토되고 있다. 국민참여사법을 이루기 위해 배심제나 참심제와 같은 새로운 재판제도의 도입도 적극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국민들로부터 신뢰받는 사법’을 만들기 위한 법원의 노력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법관 제청의 과정과 결과는 그 노력을 실질적으로 평가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파열(破裂)’의 사전적 의미는 ’내부의 압력에 의해 갈라져 터짐‘이다. 대법원의 ’파열‘은 그동안의 경직된 틀을 깨고 국민에게 한걸음 다가서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될 것이다. 대법원이 ’파열‘을 통해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길 진심으로 기대한다.

장유식 (참여연대 협동처장,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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