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사법개혁 2008-08-04   3038

[08/07/22 국민참여재판 방청기] 판사의 말을 막고 싶었던 순간


박근용(참여연대 사법감시팀장)



‘다큐3일’이 촬영한 국민참여재판


7월 22일 국민참여재판이 열린 서울남부지법 제406호에서 판결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방청객들
지난 7월 22일 국민참여재판이 열린 서울남부지법 법정은 조금 어수선했다. 불미스러운 어떤 사건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내가 아는 범위내에서는 국내 최초로, 모의재판이 아닌 실제 재판의 전 과정을 방송카메라로 녹화했기 때문이다. 서 너대의 방송사 카메라, 큰 ENG 카메라와 작은 6미리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방청석의 오른쪽과 왼쪽을 오가며 법정의 구석구석, 한 장면 한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알고보니, KBS의 ‘다큐3일’이라는 프로그램 제작진이었다. 법원의 일상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던 차에 3일중 하루는 구체적인 재판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마침 프로그램 제작일정중에 국민참여재판이 열려 이 재판을 촬영하게 되었다고 했다. 국민참여재판은 일반 재판에 비해 훨씬 법정에서 생생히 살아움직이는 법정공방을 보여줘 재판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법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는 소재로는 적합했다고 생각한다.



살인죄 vs. 상해치사죄


7월 22일 서울남부지법 차원에서는 첫 번째였던 국민참여재판은 살인 사건이었다. 피고인 박 모 씨는 작은 맥주집에서 한 남자와 사소한 시비를 벌였다. 그리 큰 소란이 오간 시비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피고인 박 모씨가 먼저 술집을 나간 그 남자를 쫒아가 지하철역 앞에서 때려 넘어지게 한 뒤, 넘어진 남자의 머리를 두 서너 차례 발로 강하게 내리찧어 머리에 큰 상처를 입혀 죽음에 이른 사건이다.


재판은 검사측이 기소한 살인혐의에 대해 피고인과 변호인이 살인의 고의가 있지 않았던 행위로 처벌을 받더라도 상해치사죄 혐의로만 처벌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불붙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피고인의 변호인은 피고인이 피해자를 죽이겠다고 생각(확정적 고의에 의한 살인)했거나 이 정도로 때리면 죽을 수도 있고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하면서 피해자를 폭행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한 것이다(살인죄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상해치사의 경우는 3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한다).


사실 사건 당시, 피고인의 심리상태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본인 또는 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재판을 하는 판사나 배심원은 당시의 여러 상황, 예를 들면 폭행하게 된 이유, 폭행방식과 수단, 폭행한 뒤의 행동 등을 통해 최대한 당시의 피고인의 상태를 추정할 수 밖에 없다.



사건현장이 생생히 찍힌 CCTV화면과 어머니의 탄식


국민참여재판에서 슬라이드를 이용하며 증인에게 질문하고 있는 검사(서있는 사람)와 이를 듣고 있는 피고인(맨 오른쪽)
이번 재판은 피고인의 입장, 아니 피고인을 변호해야 하는 변호사의 입장에서는 참 어려운 사건이었다. 당시 사건현장이 지하철역 앞 길에 설치된 CCTV화면에 찍혔기 때문이다.
일정 시간단위로 CCTV의 촬영방향이 90도씩 바뀌기 때문에 전 과정이 다 녹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피해자가 술 취한 채 사건현장에 서 있던 모습, 피고인이 황급히 피해자가 있던 곳으로 뛰어가는 모습, 쓰러져 있는 피해자의 머리를 오른발로 심하게 내리치는 장면, 그리고 바닥에 완전히 쓰러진 피해자를 두고 피고인이 사건현장을 벗어나던 모습이 선명히 찍혔다. 이 모든 화면을 11명의 배심원(2명은 예비배심원)들이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오 세상에! 이런 자료가 나왔는데, 변호인이 어떻게 방어할 수 있을까!! 게다가 피해자의 어머니가 방청석에 앉아 있다가 피해자의 엉망진창이 된 얼굴사진이 증거로 나왔을 때, 법정안의 모든 사람이 들을만큼 큰 소리로 탄식했으니, 배심원들의 마음이 어찌 피고인에게 기울겠는가.


그 순가 판사는 피해자의 어머니에게 감정을 자제하기 어려우면 법정 밖으로 나갈 것을 권했다. 하지만 피해자의 어머니는 조심하겠다면서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피해자의 어머니와 그 친척들은 피고인의 변호인이 살인의 고의가 없었다며 주장을 펴는 중간중간 변호인을 향해 작지만 강렬한 욕설을 하기도 했다.


방청석에서 이들의 뒤에 있던 나는 이를 자세히 들었는데, 배심원들이 이를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워낙 조용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방청석에 가까운 배심원이 들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재판장의 말을 막고 싶었다


피고인과 변호인에게 마냥 불리해보기만 한 재판은 저녁 8시가 넘어서 재판장이 이제 배심원들의 평의시간임을 알림으로써 한 매듭지었다. 그런데 여기서 잘못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을 재판장이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이 늦어졌는데, 배심원들께서는 1시간 이내에 평의를 마치고, 유죄가 인정된다면 15~20분 정도 양형에 대해 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재판장(한창훈 부장판사)이 말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난 재판장의 말을 막고 싶었다. 배심원들에게 충분한 토론시간을 보장해주지는 못해도, 배심원 평의를 1시간 정도, 양형 토의는 20분정도 안에 마쳐달라고 부탁하다니. 재판부를 구성한 3명의 판사들끼리는 이미 유무죄에 대해 웬만큼 합의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지만, 단 한 가지의 의심이라도 있다면 그 의심이 합리적으로 풀릴 때까지 충분히 토론하고 상호비판을 하여야 할 배심원들에게 시간제약을 주다니.


물론 재판장의 말은 그 시간까지 끝내라는 강제성 있는 표현은 아니었다. 이미 밤 늦은 시간이 되었으니 배심원들이 너무 힘들고 지쳐할까 봐 또는 심야시간이 되면 생길 다른 부담을 걱정해서 한 말로, 가급적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한다는 권고적 말이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재판시간을 잘못 예상하여, 배심원 평의가 밤 8시를 넘어 시작하게 한 책임은 분명 공판준비를 잘 못하고 공판과정을 효율적으로 진행못한 재판부의 책임이다. 그런데 유무죄를 배심원들이 최대한 신중하게 토론해줄 시간을 피고인이 보장받지 못하고, 또 배심원들이 진실을 찾아가기 위해 충분히 토론하는 권한을 충분히 발휘할 시간을 보장받지 못 하다니. 이럴 수가. 판사의 부담과 판사의 잘못을 배심원과 피고인이 분담해야 하나?


만약 판사들에게 국민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앞으로 하루 안에 재판을 결론내고 판결문을 만들어라 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판사가 심사숙고할 시간을 빼앗았다”, “판사의 재판권에 대한 정면도전이다”, “신속한 재판도 좋지만 법리와 사실관계에 대한 충분한 검토를 통해 진실을 규명하는게 더 중요하다”는 말이 막 쏟아진다.


비록 아직은 최종 결정권을 부여받지 못한 배심원들이지만, 판사와 동급으로 대접받아야 할 배심원들에게 유무죄를 결정할 시간을 ‘1시간’으로 제한하는 식의 말은 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이다.



30분 더 토론했다면 결론이 다르지 않았을까?


7월 22일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들의 모습. 사진 맨 앞의 여성은 검사이고 그 뒤로 두줄로 앉은 이들이 11명의 배심원이다.
배심원들의 평의결과를 보면 재판장의 배심원 안내가 진짜 문제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8시에 휴정이 선언되었으니 대략 8시 10분부터 배심원 평의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9시 10분쯤 법원 경위가 방청객들에게 이제 양형토의에 들어갔다고 알려줬다. 그 뒤 9시 20분에 배심원들이 법정의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이를 근거로 추정해보면 배심원들은 정말 재판장의 설명처럼 50분정도 유무죄에 대해 토론하여 유죄라는 결정을 낸 뒤, 판사와 함께 15분 정도 적절한 형량을 토론했다.


그런데 배심원들은 어떤 결론을 냈을까? 만장일치로 살인죄 유죄였을까? 그게 아니었다.
9명의 배심원이 참여한 배심원 평의의 결론은 7명이 살인죄 인정, 2명은 상해치사죄 인정이었다. 50분동안 토론하였지만, 만장일치에 이르지 못하고 7 : 2의 다수결로 평의를 마무리한 것이다.


이런 세상에! 만약 평의를 30분정도 더 했더라면, 살인죄라고 생각했던 배심원이 상해치사죄라고 보는 배심원의 말에 설득당할 수 있지 않았을까? 배심제를 다룬 명작 ‘성난 12명의 사람들’이라는 영화를 보면, 단 1명의 배심원이 품은 유죄에 대한 의심이, 처음부터 확고하게 유죄라고 생각하던 나머지 11명의 배심원들을 되돌려 세운다. 그래서 결국 전원일치 무죄 판결을 내린다. 이 재판도 그럴 수 있지 않았을까?


거꾸로 생각해보아도 문제다. 만약 좀 더 토론을 했다면, 변호인의 말에 공감을 느낀 두 명의 배심원이 살인죄라고 믿는 7명의 배심원들의 설명을 듣고 설득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수결에 따른 결론이 아니라 만장일치에 따른 유죄판결이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7 : 2든 만장일치든 똑같이 유죄아니냐고 볼 문제가 아니다. 재판의 완결성, 최대한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재판의 의미를 보았을 때 다수결에 따른 판결과 만장일치에 따른 판결은 하늘과 땅의 차이다.



진실을 쫓다 멈추지 않는 재판이 되어야


지금껏 국민참여재판이 서른 건 조금 못되게 진행되었다. 그중 내가 알기로 재판시간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재판일정을 이틀 잡은 것은 한 두 건 뿐이다. 나머지 재판들은 모두 하루만에 끝냈다. 증인이 많고 쟁점이 좀 많아서 오전 일찍부터 배심원 선정절차를 시작해서, 점심 전에 검사와 변호인의 공방이 시작된 경우도 있었지만, 증인이 적거나 피고인이 사실 자체는 인정하는 사건은 점심 이후에서야 검사와 변호인의 공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도 대부분 저녁 늦게 끝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번 재판도 사람을 때린 사실은 인정한 사건이어서 오전에는 배심원 후보자중에서 11명의 배심원만 뽑고, 오후부터 검사와 변호인이 공방을 벌이는 공판(변론)절차가 시작되었다. 원래 재판부는 대략 오후 6시 또는 늦어도 7시 전까지는 최후 변론을 끝내고, 7시 쯤부터는 배심원 평의를 시작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검사와 변호인은 최대한 할 말을 하고, 재판시간이 한 시간이상 길어졌다. 그 순간 재판부는 배심원 평의를 좀 빨리 마무리 짓는 것으로 하여, 가급적 밤 10시가 되기 전에 모든 일정을 마무리 짓고자 하는 압박감을 느끼고, 결국 배심원 평의와 양형토의 시간을 짧게 해달라는 말을 해버렸을 것이다.


물론 배심원 평의는 배심원들만이 아는 시간이다. 따라서 그 50분 안에도 토론할 것을 다 했고, 시간을 더 준다고 해도 7 : 2가 변화할 가능성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배심원들이 50분이 아니라 좀 더 긴 시간동안 평의를 진행했다면, 재판부에서 1시간 이내라는 말을 하지 말고 또 좀 더 토론을 해보라고 권했다면 다른 결론이 나오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래야 배심원에 의한 재판이 진실을 찾다 시간에 쫓겨 멈추어버리는 재판이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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