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사법개혁 2006-04-17   1381

‘우리들’의 재판은 가능한가

영화 <평결> 속 배심제의 힘

“판사나 변호사가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들이 법을 만듭니다.”

시드니 루멧 감독의 영화 <평결(Verdict)>의 후반부에서 폴 뉴먼이 맡은 의료과오소송의 원고측 변호사는 최종변론에서 배심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폴 뉴먼은 이 영화로 다시 한번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데-영화가 변호사를 이렇게 멋지게 그려낸 영화는 없다, 그래도 폴 뉴먼은 수상에는 실패했지만-바로 이 대사가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이는 영화가 관객들에게, 그리고 원고 변호사가 배심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법을 특정한 사건의 사실에 적용하여 그 사건에 합당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일을 ‘사법작용(adjudication)’이라고 한다. 사법작용은 그 사건에 또는 그 사건의 해결에 적용되어야 할 실체적, 절차적 법리가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법률심과 그 사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판단하는 사실심으로 나뉜다.

“판사나 변호사가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폴 뉴먼은 사법작용의 반(半)을 배심원들이 맡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면서, 한편으로는 판사나 피고측 변호사가 엉뚱한 법리를 적용하라고 요구하더라도 정당한 법리를 적용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 소송에서 판사와 피고측 변호사들이 부당하게 주도권을 장악한 사법시스템은 힘없고 외로운 원고가 투쟁해야 할 대상이었고, 이 싸움에서 원고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배심원뿐이었던 것이다.

폴 뉴먼이 변호하는 원고는 출산을 위해 피고측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분만을 위해 피고 마취의사로부터 마취를 받던 중 구토를 일으키며 산소부족으로 무의식상태가 되어 버린 한 여성. 그리고 이 여성을 대신해 실제 폴 뉴먼을 선임한 가난한 동생 내외이다.

폴 뉴먼 측에는 자신의 일을 도와주는 한 명의 사립탐정이 있을 뿐이고, 변호사 보수도 선금을 한 푼도 받지 않았음은 물론 모든 비용을 변호사가 우선 책임지는 성공보수계약을 하였을 뿐이다.

이에 비해 소송의 피고는 보스톤 지역의 실력있는 가톨릭재단이 운영하는 병원과 마취학 교과서를 저술했을 정도로 저명한 마취의사이다. 피고들은 그 재력과 명성에 걸맞게 지역 최고의 로펌을 선임하고 그 로펌은 10여명의 변호사들로 무장하여 맞선다.

여기에도 모자라 피고측 변호인단은 배심원들로 뽑힐 지역주민들에게 미리 영향을 주기 위하여 배심원 선정절차(미국에서는 Voir Dire라고 함)가 시작되기도 전에 지역신문 등에 피고 병원과 피고 의사의 명성을 다시 확인하는 기사들이 실리도록 함은 물론, 원고 변호사의 사생활을 들추는 기사를 실리게 한다.

원고 변호사 폴 뉴먼은 알코올중독 전력이 있는 ‘응급차 쫄쫄이'(안경환의 ‘ambulance chaser’에 대한 번역)이다. 영화 첫 장면에서 폴 뉴먼이 사건을 수임하기 위해 영업행위를 하는 장면은 냉혹하다. 폴 뉴먼은 바에서 양주 샷을 들이키며 신문의 부고 난을 하나하나 체크해나간다. 사고사를 당한 사람들의 장례식에 찾아가 조문객을 가장하여 명함을 돌리는 것이다. 그 중 한 유족에게 들켜 쫓겨나며 듣는 말, “다시는 오지 마시오. 여긴 유족들이 있어요(Don’t ever come back again. It’s bereaved people in here).”

이 영화의 미덕은 변호사를 하나의 직업으로만, 의뢰인들을 고객으로만 생각했던 바로 이런 형편없는 변호사가 자신의 의무를 깨닫고 의뢰인을 한 명의 인간으로 느끼며 작은 영웅으로 재탄생하는 장면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의뢰인 vs. 사람

이같은 변화의 한 지점은 폴 뉴먼이 재판 전 협상을 앞두고 피고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있는 원고의 사진을 찍는 장면이다. 1분 정도의 테이크가 침묵 속에 진행되지만, 폴 뉴먼이 아마도 생전 처음 자신의 클라이언트를 대하면서 겪게 되는 심리의 변화는 명징하다. 자신에게는 단지 하나의 클라이언트였던 “진짜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중환자실이므로 간호원들이 들어와 나가달라고 요구할 때 폴 뉴먼은 너무나도 명백했지만 이제야 느끼게 된 실체와 이에 따르는 의무를 말한다. “나는 이 여자의 변호사요(I’m her lawyer).” 이 빛나는 장면은 존 트라볼타 주연의 씨빌액션(Civil Action)에서도 오마쥬된다.

조금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피고측의 부당한 괴력은 재판 진행과정에서 나타나게 된다. 폴 뉴먼은 피고 마취의처럼 저명하지는 않지만 지역에서 나름대로 신망있는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마취의 그루버를 전문증인(expert witness)으로 선임하여 원고의 의료기록을 분석시키고 ‘기록상 나타나 있는 구토는 마취를 잘못한 것이 원인’이라는 확답을 사전에 얻어낸다.

폴 뉴먼은 피고 병원처럼 영향력 있는 병원에 적대적인 증언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잘 알고 있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스포츠카를 타고 떠나려는 그루버 박사의 차창에 기대어 묻는다. “이 일을 왜 하려고 하죠?” 의사는 답한다. “옳은 일을 하려는 거죠. 당신도 그러려는 것 아닌가요?(Trying to do what is right. Isn’t that what you are doing?)

그러나 피고측은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루버 박사가 재판 시작 전날 카리브해 휴양지로 전격 휴가를 떠나도록 만든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집중심리제도가 엄격히 적용되어 양측이 한번 재판기간에 합의한 이후에는 그때까지 모든 증인, 증거들이 준비돼 재판이 끝날 때까지 연속해서 변론기일이 잡히게 된다.

한국처럼 증인이 없으면 몇 주 뒤 다시 열리는 재판일(변론기일)에 데려올 수가 없다. 집중심리제도는 배심제 때문이기도 하다. 우선 재판이 개시되면 끝날 때가지 사회의 재원이 집중적으로 소요되기 때문에 이 기간에 모든 변론이 이루어져야 한다.

재판 최종일 터진 ‘폭탄’

결국 원고측의 유일한 증인이었던 그루버 박사도 없이 폴 뉴먼은 재판을 시작해야 한다. 폴 뉴먼은 어렵사리 외지의 마취의를 전문증인(expert witness)으로 불러오지만 급히 구한 사람이라서 준비도 덜 되어 있고 의술보다는 증언을 직업으로 사는 사람이라서 파괴력도 떨어진다.

게다가 애초 피고 편이었던 판사는 원고측 전문증인을 자신이 스스로 신문하면서 피고측에 과실이 없었다는 점을 배심원들에게 강조한다. 피고측 증인에 대한 신문도 예상대로 아무런 소득이 없다. 이대로 간다면 원고는 당연히 질 수 밖에 없다.

재판 최종일 전날 전문증인이 남기고 간 하나의 단서. “기록상 나타난 구토는 식사 후에 마취를 받게 되면 일어나게 되는데 기록에는 환자가 식사한 지 9시간이 지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 환자가 잘못 말했을 수도 있다. 의사는 환자의 실수도 미리 확인했어야 했다.”

폴 뉴먼은 실제로 원고에게 환자병력 등을 물어보는 역할을 하였던 입실수속 간호사(admitting nurse)를 백방으로 찾는다. 병원 입실과정에서 물어보는 것 중 하나가 언제 식사를 했는가이기 때문이다.

간신히 찾아낸 간호원이 재판 최종일에 나와 증언한다. “환자는 1시간 전에 식사를 하였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러나 본인이 작성한 기록에는 환자가 9시간 전에 식사를 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폭탄 1호가 터진다. “사고가 터진 후 마취의가 나에게 1자를 9자로 바꾸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울음 섞인 하소연. “9자로 바꾸지 않으면 해고시키겠다고 했어요. 다시는 병원에서 일하지 못하게 한다고 했어요.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죠? 저는 단지 간호사가 되고 싶었어요!” 바로 “가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피고 변호인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반대신문을 하러 나온다. 당신 병원기록에 스스로 9시간이라고 써넣고 서명까지 하였는데 지금 하는 말을 왜 믿어야 하죠? 다시 한번 폭탄이 터진다. “혹시 나중에 쓸 일이 있을 지 몰라서 9자로 고치기 전에 복사를 해놓았어요. 여기 가지고 있어요.”

‘우리들의 재판’은 가능한가

보통의 법률영화들은 여기서 끝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제목이 <평결>인 이유는 바로 배심원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싶어서였으리라(참고로 판사의 결정은 판결이라 하고 배심원의 결정은 평결이라고 한다).

판사는 최선증거원칙(best evidence rule:공판정에서의 사기를 방지하기 위한 원칙으로서 특정 서류증거의 원본과 복사본이 있을 경우, 반드시 원본을 증거로 제출해야 한다는 원칙)이라는 절차법을 들어 간호사가 갖고 있는 복사본이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물론, 또다른 증거법(새로운 사실을 밝히려는 증인의 경우, 미리 상대방에게 고지하여 상대방이 준비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규칙)을 이유로 간호사의 증언 자체를 증거에서 배제할 것을 배심원지시(jury instruction)을 통해 배심원들에게 명령한다.

그러므로 간호사는 증언대에 서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간호사의 증언을 끝으로 재판은 끝나고 배심원의 평결을 기다려야 한다. 이대로라면 원고는 져야 한다.

원고가 1심에서 패했다고 하더라도 판사의 증거배제 결정들은 항소대상이 될 수 있었다. 최선증거법칙도 원본이 위조되었다는 증거가 있다면 복사본의 제시가 가능하다는 예외가 있다.

새로운 사실에 대한 증인은 사전에 상대방측에게 알려야 한다는 규칙도 상대방 증인의 증언을 탄핵하기 위해서는 필요 없다는 예외가 있다. 영화를 잘 보면 피고측 마취의가 ‘내 환자는 한참 전에 식사를 했다’고 증언하는 장면이 있을 것이다. 즉, 이 사실을 탄핵하기 위한 증인으로서 간호사의 증언이 제공된 것으로 보면 되는 것이다.

피고측도 그렇게 믿고 있고 재판을 관람했던 피고병원의 임원은 피고병원의 수장인 추기경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간호사의 증언이 있었지만 배심원은 그 증언을 무시하도록 지시를 받았습니다.” 추기경은 묻는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간호사 말은 믿었나요?”

그렇다. 여기에 배심제는 판사와의 견제와 균형 속에서 “우리들의 재판”을 가능하게 하는 간극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박경신(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실행위원, 고려대 법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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