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검찰개혁 2012-03-06   4583

주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검사, 로버트 모겐소

분해도 참거나 ‘아는’ 검사를 만들어야 하나요?

모겐소 같은 검사가 우리에게도 있었으면

 

이진영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간사

법정은 재미있는 곳이다. 단, 미국 드라마에서는. 최근 한국에도 많은 법정 드라마나 영화가 나왔고 히트도 쳤다. 하지만 그것들을 보면 재밌다기보단 좀 무섭다. 권위적인 판사, 무서운 검사, 내 편 아닌 변호사들을 보면서, 이 일이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현실은 어떨까? 영화 ‘부러진 화살’을 두고 실제냐, 허구냐가 논란이 됐다. 법원은 이를 ‘사법 테러를 미화한 예술적 허구’라고 결론지은 모양이다. 좋다. 허구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봤을까? 재밌어서? 참여연대 시민 토론회를 보러 온 방청객이 말했다. “영화를 보고 찝찝했다. 분해도 꾹 참으리라 결심했다.” 좋은 예술은 현실을 반영한다. 그 속에 우리 사회의 본질을 담아낸다. 그것을 예술의 전형성(典型性)이라 부른다.

 

그런데 왜 우리는 미국 드라마 같은 법정을 우리 현실에서 볼 수 없을까. 심지어 상상조차 잘 안 된다. 물론 미국 법정이 이상적인 것만은 아니다. 미국의 변호사들은 배심원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온갖 말로 현혹하고, 그것을 잘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의 재판을 ‘스포츠 게임’ 같다고 조롱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법원과 검찰에 느끼는 불신과는 다른 차원이다.

 

미국 드라마 같은 법정을 우리 현실에서 볼 수 없을까

 

law7.jpg 우리나라 사람들이 수사나 재판을 떠올릴 때 드는 생각은 무엇인가. ‘유전무죄’라거나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모든 일이 결정된다’, ‘검사가 제일 세다’는 식의 간담이 서늘해지거나 뭔가 찜찜한 기분에 결국 ‘분해도 참겠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법원과 검찰에 대한 시각이다. 그 근원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공정한 곳이 아니라는 불신의 공감대’가 있다. 그 불신에는 ‘나의 삶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결정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공포가 숨어있다.

로버트 모겐소(Robert M. Morgenthau)는 뉴욕 맨해튼의 검사(district attorney)로 35년간(1976~2009년) 재직했다. 4년마다 해당 지역 주민들이 직접 자신이 사는 지역의 검사를 선거로 뽑는데, 그는 여기서 9번이나 당선됐다. ‘검사’라고 지칭했지만 500명에 가까운 검사보(assistant district attorney)를 거느리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의 ‘지검장’ 또는 ‘검사장’이란 용어가 더 어울릴 수 있겠다. 한국에서 가장 큰 지검인 서울중앙지검이 검사가 200명 정도임을 감안해보면 단순 비교라 할지라도 그 규모와 권한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미국에서는 주민이 직접 선거로 뽑은 그 지역 검사가 자신의 관할 지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나머지 검사보들은 그를 보조하는 스탭으로서 일한다. 주민이 검사에게 직접 부여한 권한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모겐소가 35년간 ‘관할’했던 맨해튼은 미국에서 가장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자 가장 부유한 동네 중 하나다. 세계 금융 시장의 중심지인 월스트리트가 이곳에 있다. 그러다보니 모겐소는 지역검사이면서도 미국 전역에 걸쳐 관심을 받고 유명세를 탔다. 그는 마피아 조직을 수사하기도 했고, 돈세탁을 하고 범죄 조직에 자금을 공급한 대형 은행을 수사하여 그 자산을 모두 국고로 환수하기도 했다. ‘로 앤 오더(Law & Order)’라는 TV 드라마에는 그가 모델이 된 검사 캐릭터가 나오기도 한다.

 

35년간 맨해튼 검사였던 모겐소, 주민의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되다

 

28legacy_span John Marshall Mantel for The New York Times.jpg

 로버트 모겐소는 뉴욕 맨해튼의 검사로 35년간 재직하면서 여덟 번이나 재선되었다.

‘로앤오더’라는 미국드라마에는 그를 모델로 한 아담 시프라는 검사가 나온다.

 

왜 우리에겐 이런 검사가 없을까. 사건은 있다. 검사도 늘 있다. 하지만 ‘그 사건, 그 검사’는 없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검사의 이름이 몇이나 될까. 현직 검찰총장 정도? 현재 서울중앙지검장이 최교일 검사라는 것까지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과거로 가면 우리의 기억은 더욱 흐릿해진다. 기억해야 할 검사, 그때 그 사건을 맡았던 검사에 대한 기억이 우리에겐 없다. 전국적으로 통일된 검사동일체원칙에 의해 움직이는 ‘검찰’만이 있다. 사람들에게 검찰은 ‘조직’이다. 그 속의 검사는 보이지 않는다. 검찰총장은 모든 검사를 지휘하고, 법무부장관은 검찰총장을 지휘한다. 그리고 법무부장관은? 상상에 맡긴다.

 

우리는 왜 이 무서운 ‘검사님’들의 막강한 힘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이름조차 알지 못할까. 최근 개봉한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라는 영화에는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나쁜 놈이라고 구분해야 할지 모를, 하나같이 나쁜 놈들이 나온다. 그 속의 사람들은 말한다. “알고 보니 가장 힘이 센 건 검사더라.” 그리고 주인공은 하나뿐인 아들을 ‘검사’로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아는’ 검사가 필요하다. 검찰이나 법원과는 거리를 둔 삶을 살 수 있다면 다행이고, 그게 아니라면 조그만 연줄이라도 있어야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 사회에, 우리는 산다.

 

조그만 연줄이라도 있어야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는 사회에 산다

 

‘아는’ 검사가 있어서 나와 내가 관련된 일이 부당하게 처리되지 않길 바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모두가 ‘아는’ 검사를 뽑고, 그가 처리한 사건을 통해 ‘우리가 공정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안심을 주는 사회가 되면 어떨까. 검찰권 역시 국민이 국가에 위임한 권한이다. 선거를 통해 검사장을 뽑는다면, 그 위임자에 대한 책임의 무게를 더할 수 있다. 이 때 비로소 진정한 ‘국민의 검찰’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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