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사법개혁 2006-04-17   2130

‘배심제’, 그 피할 수 없는 선택

“국민이 사법의 주인된다”

사법개혁위원회와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를 거치면서 그 도입의 윤곽이 그려진 한국식 배심제도에 대해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공존하고 있다.

배심제란 일반시민 중에서 추첨으로 뽑힌 12명 정도의 배심원들이 사실관계를 확정짓는 유죄평결을 하면 직업법관인 판사가 법을 적용해 판결을 내리는 제도이다. 배심제에 대한 이해를 위해 배심재판으로 진행된 미국의 유명한 O.J.심슨(O.J. Simpson)사건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배심재판의 대명사 ‘O.J.심슨’ 사건

배심재판은 배심원 선정단계부터 출발한다. 배심원 후보자의 선정절차는 무작위 추첨으로 이뤄진다. 보통 선거인등록자 명부나 운전면허등록자 명부 등을 이용해 무작위로 선출된 법원 소재지 지역 주민들에게 ‘배심원 소환장(jury notice)’이 날라간다. 소환장을 받고 법원에 출두한 배심원 후보자를 양 당사자측의 심문에 의해 계속 줄여나간다. 이런 배심원 선정절차를 ‘예비심문절차(voir dire)’라고 부른다.

이미 그 사건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 사건 심리의 공정성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들이 이유 통고와 함께 배심원 후보에서 제외된다. 심지어 이유 설명 없이 양 당사자가 일정 수의 배심원 후보자를 후보에서 제외할 수 있는 제도(preemptory challenge)도 있다.

심슨사건의 경우에도 LA지역 일부 주민들이 무작위로 차출되어 와서 6주간의 예비심문절차를 거치면서 그 중 12명의 배심원단이 최종 확정되었다. 피고 심슨이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 출신의 흑인 영화배우였던 까닭에 흑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을 가졌다고 판단되는 일부 백인들이 배심원 선정에서 제외됐다.

다음에는 본격적인 심리 과정으로 들어간다. 선정된 배심원들이 배심석에서 오른팔을 들고 선서하는 배심원 선서를 하면서 심리절차가 개시된다. 보통 양측의 모두진술이 먼저 행해진다. 사건 개요와 각 쟁점별 입장에 대해 원고와 피고의 의견을 배심원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이후 각종 증거제출과 증인심문 과정이 이어지는데 원고측 증인에 대해서는 피고측 반대심문이, 피고측 증인에 대해서는 원고측 반대심문이 이어진다. 이때 증인은 반드시 배심석을 보고 증언해야 한다. 사실판단을 내리는 배심원들을 직접 보고 증언하게 함으로써 배심원단 앞에서 거짓말을 하기 어렵게 만들려는 의도이다.

심슨 사건에서도 여러 검찰측, 피고측 증인들이 소환돼 증언했고, 심슨의 전처와 그 정부가 처참하게 살해된 범행현장 등에서 심슨의 혈흔과 DNA가 검출되어 경찰측 증거로 제출됐다. 그러자 이러한 경찰증거에 대한 피고 변호인단의 여러 탄핵증거들이 줄을 이었다.

가령 사건 다음 날 찍힌 현장사진에는 없던 심슨의 혈흔이 20일 후에는 있던 것으로 둔갑되어 경찰증거로 제출되었다. 수사관이나 혹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심슨의 혈액이 사건현장에 뿌려졌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대목이다. 이런 식의 치열한 증거공방, 증인공방이 심리단계를 통해 이뤄진다.

유죄가 배심원 평의 뒤 무죄로 바뀌어

심리가 끝나면 당사자의 최종변론과 판사의 ‘배심원 지시(jury instruction)’가 행해진다. 판사는 ‘배심원 지시’를 통해 배심실에 들어가기 직전의 배심원들에게 이 사건의 주된 법적 쟁점이 어떤 것이며 배심원이 무엇을 결정해야 하고 그때 적용되는 법규는 무엇인지 등을 알려준다.

심슨 사건에서 이토 판사는 배심원들에게 “증인이 한 가지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거짓증언을 하였다면 배심원은 그 증인의 다른 모든 증언들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배심원 지시’를 내려, 배심원들이 많은 원고측 증인들의 증언을 배심평결에 이르는 과정에서 제외하게끔 만들었다.

‘배심원 지시’가 끝나면 배심원은 배심실에 들어가 배심평의에 들어가게 된다. 각 쟁점별로 논쟁과 설득의 과정이 배심원 사이에 계속된다. 보통 형사사건의 유죄평결은 배심원들의 만장일치가 있어야, 민사사건의 손해배상평결은 과반수 찬성이 있어야 성립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심 불성립’이 된다. 심슨 사건의 경우 배심원끼리 초기 투표에서는 2명의 배심원이 유죄에 표를 던졌으나 3시간의 평의 후에는 12인 만장일치의 무죄평결로 의견이 모아졌다.

배심평의가 끝나면 배심원단이 법정에 등장하고 배심장이 평결문을 읽는다. 판사는 보통 평결에 따라 판결을 내리게 되나 평결과정에 명백한 하자가 발견되는 등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배심원단을 해산하고 새로운 배심원단에 의한 새 평의 등의 결정(mistrial)을 내릴 수도 있다.

형사사건의 경우 유죄평결이 내려지면 판사는 법을 적용해 양형을 한다. 이것이 판사에 의한 ‘판결’로써 사실관계 확정만 내용으로 하는 배심원단의 ‘평결’과 구분된다.

배심제도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배심의 공정성이 곧잘 도마 위에 오르고, 배심재판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으며 배심원들의 전문성 결여 등이 자주 지적된다. 미국에서는 배심제가 인종대립과 결부되면서, 배심제의 공정성에 대한 회의가 크게 인 바 있다.

심슨 사건에서 12명의 배심원 중 2명이 백인이고 나머지 10명이 흑인이었기에 심슨이 무죄평결을 받을 수 있었다는 주장이 거셌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은 배심제를 포기할 정도로 크다고 보진 않는다. 충분히 제도적 보완을 통해 고쳐갈 수 있다.

모든 사건을 배심재판으로 할 수는 없지만…

대신 한국의 배심제 도입은 ‘사법의 민주화’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선물을 안겨줄 것이다. 그동안 한국 법정에서는 법복을 입은 근엄한 얼굴의 판사와 검사, 변호사들이 주인이었다. 이러한 관료법관의 손에 오롯이 사법권이 독점돼 왔고 일반 국민의 사법참여는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었다.

사법권도 주권자인 국민이 부여한 권한일진대, 이 사법권이 제대로 행사되고 있는지 주권자인 국민이 전혀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배심재판에서는 배심이 법정의 주인이다. 판사는 그 진행자, 사회자에 불과하다. 건강한 상식을 가진 평범한 국민들이 다른 국민에게 유무죄의 평결을 내리는 것이다.

물론 사건에 따라서는 배심원보다 전문적 법 지식을 가진 판사에게 판단을 맡기는 게 더 합리적인 경우도 많이 있다. 배심제의 모국인 영국에서도 현재 형사사건 중 일부 중죄사건에만 배심제가 적용되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약 10만건의 형사사건과 20만건의 민사사건이 당사자 선택에 의해 배심으로 행해지지만, 형사사건의 경우 10% 정도가 배심재판으로 이뤄진다. 90%의 형사사건은 한국처럼 ‘판사에 의한 재판(bench trial)’에 의해 해결되고 있다. 복잡한 대규모 경제사건과 같이 증거관계가 복잡하고 전문적이어서 일반인이 다루기 힘든 사건은 판사에 의한 재판이 더 유용하다.

그러나 사건에 따라서는 배심재판으로 진행하는 게 더 적합한 유형도 있다. 복잡한 전문적 법 지식보다는 일반인의 건전한 상식에 기반한 판단이 더 설득력이 클 수 있는 사건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음란물인가의 여부는 복잡한 법 지식을 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필부필부(匹夫匹婦)의 건강한 상식이 더 올바른 판단을 이끌 수 있다. 이런 사건들부터 배심제를 적용해나갈 필요가 있다.

현재 한국 배심제 법안은 일정 형사 중죄사건, 일정 민사 고액사건만 배심제 선택이 가능한 사건으로 한정함으로써 형량과 액수라는 너무 형식적이고 획일적인 기준을 사용해 문제다. 꼭 중죄사건만, 고액사건만 배심이 더 유용할 수 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좀 더, 유연하고 탄력적인 배심대상사건 확대의 노력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이미 사법개혁위원회나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에서 한국식 배심제 모델이 심도 있게 연구되고 모의재판을 통해 실험된 바 있다. 모의재판 리허설에 참여한 배심원들의 진지한 모습에서 이 땅에서도 주권자인 국민이 사법의 주인이 되는 배심제가 성공할 수 있음을 보았다.

이제 배심재판에서는 검사, 변호사가 판사가 아닌 배심원을 상대로 열변을 토하고 이들을 설득해야 한다. 좁은 법조사회에서 온갖 선후배 관계로 얽혀있는 판사 한 사람을 설득하는 것보다 일면식도 없는 배심원들을 설득하고 이들에게 유죄의 심증을 갖게 하는 게 더 어려우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점에서 배심제 도입은 법조인들의 수준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배심참여를 통해 국민에 대한 법률교육, 사법교육의 효과도 거둘 수 있다. 배심법정이 살아있는 학습의 현장이 되는 것이다. 배심을 통해 국민들이 사법과정에 직접 참여해봄으로써, 사법 자체에 대한 이해와 애정도 싹터날 수 있다. 지금껏 괴리의 길만 줄기차게 달려왔던 사법부와 국민이 이제 그 거리를 줄이고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배심제 도입을 통해 국민이 사법절차의 공정한 진행을 감시하고 재판의 관료화를 막아낼 것이다.

혹자들은 국민들이 재판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아 아직 배심제를 실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거나,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거나, 배심원들에 대한 협박이나 뇌물공여로 불공정한 평결이 내려질 수 있다면서 배심제 도입 시기상조론을 편다.

이것이야말로 국민을 무시하는 오만이다. 배심제의 여러 문제점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와 검토를 통해 한국식 배심제를 다듬어가는 노력은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예상되는 몇 가지 지엽적인 문제점과 그에 대한 우려가 배심제 자체의 도입을 막아서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필자는 누구보다 국민들의 높은 수준을 믿는다. 사법 민주화의 중요성을 믿는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임지봉(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실행위원, 서강대 법학교수)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