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검찰개혁 2005-06-29   1784

정계치던 칼 ‘경제권력’엔 뭉툭, ‘대선자금’총수 조사조차 안해

[참여연대-한겨레 공동기획 재벌 앞 작아지는 검찰] ①이제 경제권력이 문제다

‘대선자금’총수 조사조차 안해 분식회계 등 줄줄이 면죄부만

“정치권력에 대한 수사의 성역은 없어진 것 같다. 오히려 힘이 셀수록 더욱 강도 높은 수사를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최근 검찰의 철도공사 ‘유전사업 의혹’ 사건 수사를 지켜본 한 여당 의원의 평가다. 실제 검찰은 검사 8명을 포함한 64명의 수사 인력을 동원해 50여일 동안 전례 없는 고강도 수사를 펼쳤다. 좀처럼 압수수색을 하지 않는 국회 의원회관을 전격적으로 압수수색했고, 내로라 하는 실세인 이광재 의원이나 이기명씨를 불러 조사했다. 이 밖에 이희범 산업자원부 장관,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정태익 전 러시아 대사와 다수의 청와대 관계자 등 조금이라도 의혹의 대상에 오른 정·관계 고위 인사들이 줄줄이 검찰청사로 불려갔다. 권력층조차 검찰의 이잡기식 수사에 대해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볼멘소리를 해댈 정도였다. ‘살아있는 권력’의 비리는 못본 척 눈을 감고, 권력형 비리를 수사할 때는 축소·은폐 의혹을 달고 다녔던 옛 검찰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러면 이제 ‘권력의 주구’ 비판을 듣던 검찰이 다시 태어난 것일까? 불행하게도 아직 “아니오”를 외치는 사람들이 많다. “‘정치권력’으로부터는 독립한 것 같지만, 또다른 권력인 ‘경제권력’에 대해서는 오히려 사정의 칼끝이 무뎌졌다”는 비판의 소리가 높다.

“경영상 불가피”당사자 변명이 불기소 이유

검찰은 유전수사 착수 직전인 4월 초 “재벌총수들이 2002년 대선 때 정치권에 많게는 수백억원대의 검은돈을 건네는 데 직접 관여했다”며 참여연대가 이건희 삼성, 구본무 엘지, 정몽구 현대차 회장 등을 고발한 사건을 무혐의 처분했다. “심증은 있지만, 직접적인 증거가 없고 당사자들이 부인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대선 당시 380억원이라는 거금을 제공한 것으로 드러난 삼성의 경우 “내가 다 알아서 했다”는 이학수 부회장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주의 돈이나 다름없는 수백억원대의 돈을 임원들이 마음대로 처분했다는 주장에 수긍할 사람은 거의 없다. 재벌기업의 생리상 당연히 총수의 지시가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검찰은 이런 상식을 뛰어넘었다. 임직원 선에서 수사를 멈췄고, 그룹 총수들은 소환조차 하지 않았다. 검찰은 유전의혹 수사에서 재경부 직원들이 “윗선에는 보고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도 이헌재 전 부총리를 소환해 철도공사의 대출 로비의혹에 대해 조사했다. 상대에 따라 검찰 수사태도가 달라지는 모습이다.

대선자금 수사는 그 자체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에 대한 검찰의 이중 태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검찰은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 정치권의 실력자들을 줄줄이 감옥으로 보냈다. 정대철 전 민주당 대표나 이상수 사무총장 등 여당 실세들은 물론, 대통령의 최측근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검찰이 집권 초기의 ‘펄펄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대상으로 삼은 것은 초유의 일이었다.

검찰은 이를 통해 정-경 유착의 검은고리를 일정 부분 끊어내는 성과를 냈다. 하지만 유착의 다른 한쪽 당사자인 재벌기업에 대해서는 면죄부를 주기에 급급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수사 성공을 위해서는 기업들의 협조가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검찰이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밝혔듯이, 재벌기업이 때마다 수백억원대의 검은돈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총수 1인 중심의 잘못된 지배구조와 불투명한 경영 방식 때문이다. 이는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비자금 사건 수사 이후에도 대선 때마다 이런 일이 반복돼온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부패 고리를 온전히 끊으려면, 재벌기업에 대한 엄정한 사법처리를 통해 근본적 원인을 제거해야 했다. 더욱이 재벌기업이 정치권에 제공하는 돈은 스스로 인정하듯이 일종의 ‘보험금’이고, 어떤 식으로든 그에 따른 보상을 챙겨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검찰은 최고 책임자인 총수들을 조사조차 하지 않음으로써 대선자금 수사를 반쪽짜리로 만들었다.

검찰도 이런 비판여론을 의식한 듯 “대선자금 수사는 정치권의 병폐를 엄단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지만, 다음에는 기업의 지배구조 문제가 수사 대상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말뿐이었다. 검찰은 오히려 그 뒤 재벌기업의 각종 비리의혹 사건을 수사하면서 줄줄이 면죄부를 줬다.

참여연대가 최근 3년여 검찰이 처리한 주요 기업 관련 사건 15건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검찰은 현대중공업 임원들의 배임혐의와 에버랜드의 전환사채 저가발행 등 단 두 건만 불구속 기소했다. 특히 올 들어서만 △삼성생명 주식 헐값매각 △재벌총수 대선자금 의혹 △한화 분식회계 △삼성에스디아이 부당 노동행위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 배임 혐의 등 7건의 고소·고발 사건을 모두 불기소했다.

그러면서 검찰이 내세운 이유는 ‘경영상 불가피했다’거나, ‘고의성이 없다’는 등 당사자들의 변명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많다. ‘증거가 없다’거나, ‘범인을 찾기 힘든다’는 식으로 스스로 수사력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들도 있다. 노조 결성에 관련된 삼성에스디아이의 전·현직 노동자 12명의 위치를 1년여 추적한 사건에서는, “아무리 수사를 해도 위치 추적을 한 ‘누군가’를 찾아낼 수 없다”며 삼성 관계자들에 대해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 한화그룹 분식회계 사건은 “검찰이 고발 초기 늑장을 부려 계열사들간 조직적 공모의 증거를 확보할 기회를 놓쳤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대상그룹 비자금 사건은 검찰이 ‘참고인 중지’결정을 내렸다가 법원의 판결과 언론의 보도를 보고 뒤늦게 재수사에 나서 망신을 샀다.

박근용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간사는 “최근의 사례들을 분석해보면, 검찰이 한마디로 거침없는 ‘재벌 봐주기’로 치닫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며 “이를 통제하고 견제할 제도적 장치 마련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형소법 상습위반’ 검찰을 고발한다

재벌사건 ‘3개월 이내 처리규정’ 밥먹듯 어겨

5∼6년 묵히다 잠잠해지면 기습 무혐의 처리

검찰은 유독 재벌기업과 관련한 고소·고발 사건만 만나면 미적거린다. 형사소송법이 정한 ‘3개월 이내 처리’ 규정을 어기는 것은 다반사고, 심하게는 5~6년 이상 사건 처리를 미루기도 한다. 3개월 이내 처리가 안되면 고소·고발인에게 조사경과를 통보하도록 돼 있는 내부 지침을 어기는 일도 흔하다.

참여연대가 분석한 최근 검찰의 재벌기업 관련 주요사건 처리내역을 보면, 시민단체나 관련자들의 고소·고발로 시작한 사건들은 보통 1~2년, 길게는 6년 이상 걸려 결정이 났다. 삼성생명의 이재용씨 관련 배임의혹 사건이 1년여 만인 4월 무혐의결정됐고, △에스케이글로벌 부당지원 의혹 사건 1년7개월 △한화그룹 분식회계 사건 2년5개월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발행 의혹 사건 3년6개월 △5대그룹 부당내부거래 사건은 6년1개월을 끌었다.

이와 관련해 최재천 열린우리당 의원은 지난해 11월 서울중앙지검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해 “20대 재벌기업을 상대로 제기된 고소·고발 사건 중 3개월 이상 처리가 지연된 사건이 10건이나 된다”며 “검찰이 재벌들의 눈치를 보며 형사소송법 규정을 일상적으로 위반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검찰 관계자들은 ‘늑장 수사’ 비판에 대해 “대체로 사건내용이 복잡하고 관련 재판이 진행 중인 경우가 많아 그만큼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1~2년도 아니고, 그 이상 수사를 지연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는 게 시민단체들의 지적이다. 그래서 “재벌 사건 처리에 부담을 느껴 후임에게 자꾸 미루는 것 아니냐”거나, “공소시효에 쫓겨 항고를 어렵게 하려는 것”이라는 의심까지 나온다. 참여연대는 자신들이 1998년 8월 고발한 것을 6년여 만인 지난해 9월, 그것도 추석연휴 직전 기습적으로 불기소 처분한 5대재벌 부당내부거래 사건을 ‘늑장 수사를 통한 봐주기’의 전형으로 꼽고 있다.

사건을 기한 안에 처리하지 못할 경우 고소·고발인에게 그 사유를 통보하도록 돼 있는 대검찰청 예규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대선자금과 관련해 재벌총수들을 고발한 사건은 7개월여 만에 ‘중간수사통지’를 받았고, 삼성전자의 주식 헐값 매각 사건은 아무런 통보도 없다가 9개월 만에 무혐의로 종결됐다”며, “스스로 정한 지침조차 어기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겨레 정광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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