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사법감시紙 1996-09-01   2036

[06호] 사법감시단의 법원 방청 보고서

아직도 고쳐야할 것이 많다

모니터 리포트

아직도 고쳐야할 것이 많다

형사소송규칙 잘 안지켜진다

1996년 7월 9일 수원지방법원 110법정에서 오전 9시 30분 부터 형사 항소제2부(재판장 서희석 부장판사, 이동철, 김종호 판사)의 재판을 방청하였다. 10시 30분 까지 약 30여건의 사건이 판결되었다. 항소심의 심리는 공소장에 의한 기소요지의 진술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심리에서 모두절차를 거치지 않는 사건이 대부분이었다. 검사의 모두진술은 물론 형사 소송법(이하 형소법) 289조에 명시되어 있는 진술 거부권을 피고인에게 고지해 주지도 않았다. 또한 공판장에서의 신체구속 금지 조항(형소법 280조) 역시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 같았다. 거의 모든 피고인들의 한 손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오후 3시경 좌배석 판사가 조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날씨도 덥고 단조로운 형식이 반복되어 지리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재판의 결과가 피고인들에게는 일생을 좌우할 큰 문제인 것을 생각하면 판사가 재판 도중 존다는 것은 불성실하고 무성의한 태도가 아니라 할 수 없다.

또한 피고가 외국인인 사건이 있었는데 판사가 판결을 3번이나 반복케 하는 등 통역상의 미능숙의 정도가 심하였다. 국제화 시대에 걸맞는 능숙한 통역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사법감시단 김삼원, 원우희)

의자소리 요란, 법원시설 개선 시급

96년 7월 16일 수원지방법원 형사2단독(판사 정병문)의 재판을 방청했다. 좁은 법정 안의 수많은 방청객이 들락날락하고 변호사가 오가며 삐그덕 거리는 의자소리는 그야말로 나를 당황케 했다. 또한 마이크 시설이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판사나 검사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또 조명이 어두워 분위기가 무거웠고, 방청객들도 잡담을 하여 전체적으로 산만하게 느껴졌다. 공판에서 판,검사들의 태도와 공정한 재판도 중요하지만 모든 국민들이 법원을 이용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시설을 개선하는 것 역시 중요할 것이다. (사법감시단 서효진)

정말 대통령이었던가?

7월 25일과 8월 1일 양일간 전직대통령 재판을 방청했다. 오전 6시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비표를 얻어 정식표를 받은 사람이 빠져야만 입장이 가능했었다. 25일은 76번을, 1일은 74번을 배부받아 방청을 했는데 경비는 철저해서 몸수색을 두 번 받고서야 법정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피고인들은 법정에 들어와 재판장에게 목례, 방청객에게 목례를 하였으며 계속해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반성의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매우 당당한 태도였다. 노태우 피고인의 얼굴은 매우 초췌해 보여서 과거의 잘못을 떠올리지만 않는다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호용 피고인은 정웅 증인에게 자신이 공수부대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을 직접 보았느냐고 물었다. 정호용 피고인은 휴정되어서 법정 퇴정시마다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고 재판이 다 끝났을 때는 방청석에 있는 측근들의 인사를 받으며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정웅 증인에 대한 신문은 5시간 가량 진행되었다. 대여섯명의 변호인단은 증인에게 똑같은 질문을 몇 번씩 물어 증인을 짜증나게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검찰측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판사가 변호인단에게 주의를 주었다. 역시 방청객들의 신뢰를 가장 많이 받은 쪽은 판사였다. 김영일 부장판사는 변호인이 증인에게 반복하여 질문할 경우 답할 필요 없다고 하며 그냥 통과시키기도 하였고, 증인이 질문의 핵심을 잡지 못할 때는 질문을 쉽게 다시 해 주기도 했다. 대법정이라고는 하지만 법정의 좌석 수는 80석뿐이었다. 방청객의 구성은 광주유가족들과 피고인의 측근들이 대부분이었으며 피고인측을 위해 기도하는 보살들과 법학도들 몇 명이 껴 있었다. 25일 오전재판 직후에는 방청객들 안에서 ‘정호용이가 제일 나쁜 새끼야’라는 말이 터져 나왔으며 오후 재판과 저녁 재판 사이에는 5.18 당시 아들을 잃은 여인과 보살이 육두문자를 쓰며 싸우기도 했다. (사법감시단 양승광)

나오지도 않은 증인이 어떻게 증언을?

7월 25일 전직 대통령의 재판을 지켜본 나는 다음 일자 신문들을 살펴보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몇 일간지의 오보였다. 그에 따르면 25일 공판에서 정웅, 김재명, 최세창, 최화균 등 모두 4명의 증인에 대한 증인신문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으나 실제로는 시간관계상 정웅증인과 김재명 증인 2명만이 증언했을 뿐이었다. 또한 문장의 전후관계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내용에 대해서 ‘중요한’ 내용만을 쓴 나머지 독자들의 오판을 이끌어낼 가능성이 있는 기사도 많았다. 한정된 지면이므로 모든 사실을 전부 신문에 실을 수는 없겠지만 사실과 달리 표현되어서는 안되며, 어디까지나 객관성을 잃지 않게 압축되어야만 할 것이다. (사법감시단 최태욱)

정문에서부터 학생증 제시요구, 권위적인 경찰태도

1996년 7월 18일 법원 정문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경찰 2명이 지키고 있다가 다소 위압적이고 불친절한 태도로 학생증 제시를 요구하면서 404호 법정에 가느냐고 수차례에 걸쳐 물었다. 어떤 사건을 보겠다고 결정을 하고 온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니다’라고 말을 했지만 자꾸 404호 법정으로 가는 것으로 유도하는 것에서 불쾌감을 느꼈다. 특히 학생증을 보고 종이에 신상을 적는 이유도 설명해 주지 않는 태도는 너무 권위적이었다. 결국 경찰이 강조한 404호로 가 보았다. 95년 방북한 대학생에 대한 재판이었다. 사건의 중요성 때문인지 방청객이 매우 많았지만 법정의 의자가 너무 적어서 대부분이 서서 재판을 지켜보아야 했고, 재판정 내에 무전기를 든 경찰이 이곳저곳에 있어서 분위기는 더욱 어지러웠다. (사법감시단 국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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