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사법감시紙 1995-12-11   1949

[02호] 단체협약상의 인사(해고)조항의 형해화

노동조합과 사용자 또는 사용자단체간에 체결되는 단체협약에는 임금, 근로시간 등 근로조건에 관한 사항뿐만 아니라 이른바 인사합의조항 또는 인사협의조항을 두는 경우가 많다. 인사조항은 인사에 대한 경영의 전제적 지배를 방지하기 위하여 노동조합이 어떠한 형태에 의하든 이에 관여할 수 있도록 노사간의 일정한 rule을 설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사용자가 조합원인 종업원을 해고함에 있어서 조합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던가(해고동의조항) 또는 조합과 협의를 거쳐야 한다는(해고협의조항) 식으로 규

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경영의 전제적 지배

해고동의조항은 노동조합의 동의에 의해 당사자간의 의견의 합치가 이루어져야 해고가 가능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이에 대하여 해고협의조항은 반드시 합의점에 도달하여야 하지는 않지만 회사측에서 해고의 필요성 및 타당성을 노동조합에 납득시키고 노동조합 측으로부터 의견을 제시받아 이를 참작하여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최근의 몇몇 판례를 보면 이러한 인사조항의 절차적 의미를 무시하거나 이를 형해화시킬 우려가 있는 경우가 발견된다.

우선 판례는 다음과 같이 노사간의 해고동의의 약정과 해고협의의 약정에 관해 그 법적 취급을 달리하고 있다(대법원 1992. 6.9 선고 91다 41477판결 등 ): "사전협의는…..회사의 징계권을 포함한 인사권을 전반적으로 제한하려는 취지에서 회사로 하여금 노동조합의 승인 또는 동의를 얻거나 노동조합과 협의하여 결정하도록 규정하여 회사의 인사권 행사를 회사와 노동조합의 합치된 의사에 따르게 하는 경우와는 달라, 노동조합의 임원 등에 대한 회사의 자의적인 인사권 행사로 인하여 노동조합의 정상적인 활동이 저해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취지에서 회사로 하여금 노동조합의 임원 등에 대한 인사의 내용을 노동조합에 미리 통지하도록 하여 노동조합에게 징계를 포함한 인사의 공정을 기하기 위하여 필요한 노동조합 측의 의견을 제시할 기회를 주고 노동조합으로부터 제시된 의견을 참고자료로 고려하게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봄이 상당하므로, 노동조합 임원 등에 대한 징계해고가 위와 같은 사전협의를 거치지 아니한 채 행하여졌다고 하여 반드시 그 효력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해고협의조항은 있으나마나

요컨대 법원은 해고동의조항과 해고협의조항을 구분하여, 해고동의조항을 위반한 해고는 무효,해고협의조항을 위반한 해고는 유효로 판단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해고의 효력에 관한 한 해고협의조항은 있으나 마나 한 단순한 예문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 점은 대부분의 학설이 해고동의조항인지 또는 해고협의조항인지를 불문하고 이러한 인사약정을 무시한 사용자의 해고처분은 적법절차 내지 신의칙위반을 이유로 효력이 없는 것으로 보는 입장과 대비된다.

법원의 입장은 단체협약상의 인사조항이 갖는 절차적 의미에 대한 이해부족을 드러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사용자의 인사권에 대한 제한의 정도 또는 노동조합의 관여의 정도에 있어서는 해고동의조항과 해고협의조항이 차이가 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차이로 인해 협의조항에 내포되어 있는 절차적 정의, 또는 적법절차(due process)의 요청이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협의조항이 존재함으로써 근로자 측에서 갖게 되는 적정한 인사조치에 대한 기대는 법적으로 존중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절차적 정의가 중시되고 이러한 절차적 요건을 흠결한 경우에 실체법적 효과를 부정하는 예는 다른 법현상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더구나 단체교섭 또는 그 결과물로서의 단체협약은 단순히 권리의 존부의 문제를 판가름하는 기능 외에도 새로운 노사관계의 질서를 형성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고, 노사가 설정하려고 하는 질서의 존중을 통하여 단체교섭이나 단체협약이 산업평화의 유지를 담보하는 안전판적 역할을 담당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면, 다른 법영역에서 보다도 노사 상호간의 신뢰와 이에 기초한 절차적.제도적 약정은 보다 존중되어야 한다. 이러한 약정을 깨는 자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법적책임을 추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판례는 단순히 '동의'와 '협의'의 사전적인 의미에 집착한 나머지 단체교섭제도 전체와의 맥락 속에서 그 절차적 의미를 무시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사조항의 절차적 의의 몰각 우려

또한 취업규칙상의 인사절차규정(그것이 협의조항이든 합의조항이든 불문하고)에 대하여 이를 '정의가 요구하는 유효요건'이라고 판시한(대법원 1979. 1.30, 78다304판결) 종전의 입장과도 상치된다. 단체협약을 취업규칙에 우선하도록 한 근로기준법 제 97조의 규정을 들지 않더라도, 노사 양당사자의 의사가 매개된 단체협약조항이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작성한 취업규칙조항보다 존중되어야 함은(규범적 서열) 다언을 요치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사권 행사에 대한 제한의 정도 또는 노동조합의 관여의 정도가 낮다는 이유만으로 단체협약상의 인사협의조항을 해고의 유효요건으로 평가하지 않은 것은 위의 취업규칙상의 인사협의조항과 비교해 볼 때, 전도된 결과를 초래케 하는 자체 모순을 발견할 수 가 있다.

마지막으로 최근의 한 대법원 판결에서(대법원 1994.3.22 93다28553판결), 단체협약상의 해고동의조항이 있다 하더라도 단체협약의 전체적인 체계와 내용 및 용례에 비추어 '동의'는 '협의'의 의미를 지닐 뿐이라는 해석을 한 후 결국 조합측의 동의를 얻지 않고 행한 해고조치를 정당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인사조항의 절차적 의미가 더욱 더 몰각될 우려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조합과 사용자간의 단체협약상의 약정을 의사해석문제로 환원시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해고합의조항을 규범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려는 색다른 해석론을 동원하고 있는 바, 의사해석의 타당성과 현실적합성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해고협의조항이 법규범적으로 무용하다는 점에 착안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발상법은 떠올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철수 l 이화여대 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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