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사법감시紙 2002-05-07   2539

[16호] 노동 변호사의 하루

오늘도 아침부터 머리가 무거워 온다. 전에 L호텔 노동자들의 파업과 관련하여 맡게 되었던 소송 기일이 내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명확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법정에서 증거를 통하여 입증해야 하는 어려움도 문제거니와 소속된 사무실의 재정운영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사건만 자꾸 맡아서 다른 변호사들 보기가 미안하기 때문이다. 증인을 서 주기로 한 사람도 만나기가 어려워 곤란을 겪고 있다. 같은 사무실에 있는 선배 변호사에게 입증문제에 대해 몇 가지 자문을 구했지만, 별 뾰족한 수를 찾지 못했다. 원고인 조합원들이 소송에서 반드시 이기리라 확신하는 점도 부담스럽다. 당사자들에게 우리가 주장하는 의심할 수 없는 정당성과 그것을 법정에서 입증하여 승소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라는 점을 이해시키기는 어려운 것이니까 여하튼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11시에는 서초동 서울지방법원에 A기업 노조 형사재판이 있어 갔다. 10시 30분에 도착해 기다렸으나 늘 그렇듯 11시 30분이 되어서야 순서가 돌아왔다. 기다리느라 허비하는 시간으로 치자면 변호사를 따라갈 직업이 없을 것이다. 매번 개선 요구가 있지만 제대로 되지 않는 건 현실적인 불가피함도 있는 듯하다. 하기야 안 나오는 사람도 있고 하다보면 길어지기도 하니 정확하게 시간을 정하여 통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사건은 노조위원장이 구속중이라 빨리 선고기일을 잡아야 할 것 같다. 가족들이나 조합원들은 유무죄의 중요성보다는 빨리 구속상태를 면하는 것을 원한다. 이 사건도 선고는 집행유예로 나올 것이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몇 가지 다투어 보고 싶은 사항이 있지만 그렇다고 형량에 영향을 줄 것 같지도 않아 검찰이 제출한 증거들에 동의하고 변론을 종결하였다.

가끔 무죄를 주장하면서 열심히 다투어 보고 싶은 사건이 있다. 그러나 그러려면 검찰이 제출한 증거 가운데 상당수를 동의하지 않고 증거상의 진술자나 작성자를 직접 법정에 불러내어 반박해야 한다. 또 우리도 증인을 신청해야 한다. 기일이 2주에 한 번 잡히니 그만큼 구속기간이 늘어난다. 다 동의해주고 빨리 집행유예로 나올 것인가, 아니면 구속기간이 1∼2개월 더 길어지더라도 무죄를 다툴 것인가 갈등이 생긴다. 무죄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지도 않지만 그래도 하지도 않은 것을 했다고 증거동의를 해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보석으로 나온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지만…. 가족들은 무능한 변호사라고 탓하기도 한다. 빨리 나오게 해야지 뭐하냐고…. 그럼 빨리 선고기일을 잡는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법정에 나온 검사가 구형을 하면서 장황하게 엄한 처벌을 주장하는 의견을 제출하여 기분이 상한다. 저 검사는 왜 저럴까. 하기야 법정의 모든 검사가 그런 건 아니다. 가끔 자신이 국가를 수호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검사들이 있다. 아마 5공과 6공 시절에도 저 사람들은 그랬을 것이다. 서면으로 이루어지는 재판이어서 굳이 변호인이 법정에서 자세한 변론을 할 필요는 없지만 방청온 조합원들과 피고인 자리에 앉아 있는 위원장을 대신하여 파업의 정당성과 회사측의 부당노동행위, 사법당국의 불공정한 법집행에 대하여 변론을 하고 자리를 내려왔다.

미국 영화를 보면 변호사가 배심원을 향하여 감동적인 변론을 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러나 서면주의 중심이고 배심원제를 채택하고 있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사실 법정에서 길게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서면으로 주장하고 싶은 사항을 모두 제출하기 때문이다. 시간만 길어져 판사에게 인상만 좋지 않게 할 수도 있어 변호사들은 꺼리는 편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법정을 이해하는 당사자들은 변호사가 법정에서 별로 말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를 하여 일부러 장황하게 변론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난 오해를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노동자들이 법정에서 못한 말을 대신해서 말해주고 싶을 때가 있다.

전에 지방에 있는 법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재판장이 피고인인 노조위원장이 말하는 것을 제지하고 방청을 온 조합원들의 행동과 복장을 제지하여 그 위원장이 최후진술에서 그동안 참고 참았던 많은 이야기를 한참동안 하였다. 감동적인 연설이 된 최후진술이 끝나자 듣고 있던 방청 온 조합원들도 박수를 치고, 나 또한 변호인석에서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친 적이 있다. 어떻게 절간같이 조용해야 할 법정에서 박수를…. 재판부의 한 판사가 날 이상한 변호사로 이야기하였다는 걸 다른 변호사를 통해 들었으나 뭐 어떠랴.

오늘은 수요일이어서 점심시간에는 민변 노동위원회 회의가 있었다. 민변 노동위원회는 전국의 노동변호사들로 구성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한 분과위원회이다. 식사를 하면서 어느 법원의 모 재판부가 화제로 올랐다. 우리 법원이 노동사건에 대하여 사용자 편향적인 경향을 띠는 것은 늘 있어 왔으나 특히 최근 새로 부임해온 모 재판부가 노동법의 기본지식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판결들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 책이라도 사주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오고 갔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는 듯하다. 또 한 사무실에서는 사용자 쪽의 대리를 맡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러나 전에 해고사건을 가지고 와 사용자가 거액을 제시하였으나 거절하였다고 했다. 사무실운영이 어려워 유혹이 있지만 아직 그 정도는 지켜야 되지 않겠냐고 서로들 의견을 모았다.

사용자 쪽 대리를 맡지 않는다는 이 원칙들은 언제까지 지켜질 수 있을까. 변호사 사무실의 규모가 변호사 5인 이상이 넘어가면 기업에서 의뢰하는 사건을 맡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일반 민사사건이야 별 문제가 없지만 가끔 노동사건도 오기 마련이다. 기업에서 의뢰하는 노동사건은 맡지 않는다고 하면 그 기업에서 다른 사건을 맡기려고 하겠는가 여기에 노동변호사들이 모인 사무실의 고민이 있는 것 같다.

식사와 함께 한 회의를 마치고 기록을 챙겨 서둘러 행정법원으로 향했다. 부당해고로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이겼으나 회사측이 행정소송을 제기한 사건이다. 오늘은 우리측에서 신청한 증인신문이 있는 날이다. 노동사건에서 노동자의 입장에서 진실을 말해 줄 증인을 찾기는 너무 힘이 든다. 대부분 그 회사에 근무하고 있으므로 증인으로 나서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심지어 어제의 동료가 회사측 증인으로 나와 거짓진술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난 해고사건을 의뢰해 오는 노동자에게 꼭 이러한 일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 있음을 주지시킨다. 아마 노동조합이 있다면 그렇지는 않을 지도 모르겠다. 근로기준법이 있지만 노동조합도 없는 회사에서 노동자 개인이 회사에 다니면서 그 회사를 상대로 노동사무소에 진정을 할 수 있겠는가.

증인신문을 하는데 처음 이야기와는 달리 증인이 상대방의 반대신문에 엉뚱한 이야기를 하여 낭패다. 변호사와 만났을 때 누구도 이야기해주지 않은 불리한 내용이 갑자기 튀어나오면 대책이 안 선다. 증인신문을 마쳤지만 이런 해고사건에서는 관련서류들을 모두 회사측이 가지고 있어 재판장에게 상대측이 제출하도록 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상대방 변호사는 그런 서류가 없다고 했다. 문서제출명령신청을 할 수 있으나 상대방이 없다고 할 때는 참 막막하게 된다.

당사자와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이 서울지방법원에서 일반민사사건 재판이 있어 서둘러 갔다. 미리 와서 순서를 기다려 주겠다고 약속한 상대방 변호사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순서를 보니 족히 1시간은 기다려야 될 것 같다. 사무실에 전화해서 상담약속시간을 조금 늦추어 줄 것을 알렸다. 오늘 안에 준비서면 하나와 증인신문사항 두 개를 써야 되는데 아무래도 밤 12시까지는 사무실에 남아 있어야 할 것 같다.

별 하는 일도 없는 것 같은(준비서면 진술하시고…., 갑제3,4증 제출하시고….등 등) 재판을 마치고 상담시간을 맞추기 위하여 종종걸음을 쳤다. 상담을 할 때 당사자들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자세한 상담을 원하지만 시간에 쫓길 때가 많다. 그래서 소송에 필요한 사실에 대해서만 물어보는 방식으로 상담을 하는데 이에 대하여 불만을 느끼는 것 같다. 하기야 자신의 정당성에 대하여 변호사에게 얼마나 말하고 싶은 게 많겠는가. 가끔은 한이 맺힌 분들도 있고….

한참 소송을 하고 있는데 변호사와 상의도 없이 소송을 취하하는 당사자도 있다. 알려주지도 않아 재판에 나가 판사에게 듣고 알게 되어 망신을 당하기도 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노동사건은 회사와 합의를 하고 취하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편이다. 가끔 잘 싸워서 좋은 판례를 만들고 싶은 사건인 경우에 난 당사자에게 별도각서(손해배상을 협박하는 내용)를 받아 몰래 취하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쓴다. 다음에 동일한 내용으로 어려움을 겪는 노동조합이나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판례를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물론 충분한 검토 없는 소송남발은 나쁜 판례를 만들어 나중에 다른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경우도 있다.

변호사로 일을 시작하면서 겪은 끔찍한 기억이 있다. 최선을 다했으나 재판에 지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인데 당사자가 아쉽지만 최선을 다했음을 인정해 줄 때는 괜히 미안한 마음이다. 그러나 마치 내가 잘못해서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때는 슬퍼지기도 한다. 노동사건은 아니었지만 어떤 변호사는 멱살을 잡힌 적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변호사가 실수를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난 최소한 노동변호사들은 하나 하나의 사건에서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에게 나 자신도 그런 부류의 변호사로 비치는 것일까?

질 것이 뻔한 사건을 이긴다고 장담을 하면서 맡는 부도덕한 변호사도 많지만, 난 처음 사건을 맡을 때 소송결과에 대하여 이길 수 있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가. 나중에 날 찾아왔던 사람이 다른 변호사에게 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고 후회하지는 않는다. 변호사는 당사자에게 나쁜 결과도 있을 수 있음을 솔직히 말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그러나 아직까지는 근거도 없이 결과를 자신하는 변호사를 선호하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인가 보다.

얼마 전 수십명의 노동자들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그 날 오후는 재판이 있었고 저녁에는 호주제 폐지관련 헌법소송 준비발제를 맡아 회의에 갔다가 밤 늦게야 잠시 접견을 다녀왔다. 곧 있을 영장실질심사를 부탁하였으나 이미 재판이 있어 다른 변호사에게 의뢰하라고 했다. 당시 거절은 하였으나 내심 마음이 편치 않았다. 처음 변호사를 시작할 때 칠 팔십년대의 인권변호사 선배들의 모습을 꿈꾸며 노동자들의 투쟁현장에 그들의 인권을 지켜주는 변호사가 되리라고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지금 그런가. 그렇게 평가받을 수 있을까. 스스로도 자신이 서지 않는다. 앞으로는 어떻게 변해갈까. 아직 열심히 활동하시는 선배들을 보면서 나도 저 나이까지 저렇게 정열적으로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게 해야지 마음먹어 본다.

권두섭 | 민주노총 법규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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