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칼럼(jw) 2005-09-01   1040

<안국동窓> 불법도청사건의 교훈과 과제

‘정보는 권력’이라고 한다. 권력은 정보를 먹고 산다. 권력은 더 많은 정보를 먹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더 많은 정보를 손에 넣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권력의 본질이다. 독재권력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권력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기도 하다. 독재권력이 더 많은 정보를 손에 넣기 위해 법을 완전히 무시한다면, 민주권력은 손에 넣을 정보의 내용과 정보를 손에 넣는 방법을 법으로 규정하고 지키고자 한다.

독재권력이 더 많은 정보를 손에 넣기 위해 사실상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일상적인 도청을 저질렀다는 것은 상식이다. 정치적 정당성을 원천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 독재권력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국민을 감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실체는 이른바 ‘블랙박스사건’을 통해 일부 드러났다. 1988년 5월에 안기부는 도청장치를 개발해서 서울의 모든 전화국에 설치했다. 1989년에 이 사실이 드러나서 철거되기는 했으나 그 전모는 밝혀지지 않고 말았다. 이 사건은 국가기관의 도청방식이 개인 전화선을 수공업적으로 도청하던 것에서 벗어나 자동화된 대규모 도청으로 옮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6공화국에 들어와서 기술발달에 따라 도청의 원격화·자동화·대규모화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삼성 X파일사건’을 계기로 드러난 국가기관에 의한 불법도청의 실상은 한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박정희의 중앙정보부에서 전두환의 국가안전기획부로 이어진 국가정보기관은 그 자체로 독재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 핵심에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한 감시활동이 자리잡고 있었다. 민주화는 이런 활동이 더 이상 자행되지 않는 것, 나아가 국가정보기관이 발본적으로 개혁되는 것을 뜻한다. 안기부가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이런 민주화의 요구를 표현하는 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삼성 X파일사건’은 이름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 행태가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문제의 근원을 밝히고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 한, 민주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권의 민주화는 정치의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출발점일 뿐이다. 독재권력의 주구로 타락한 국가정보기관은 타락한 정보기관원들을 배출할 수밖에 없다. 그 덕에 일종의 ‘내부고발’이 이루어져서 국가기관에 의한 불법도청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이 나라를 지배하는 자들의 연계와 음모가 드러난 것은 역사의 역설적 행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 행운을 결코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의 불법도청사건에서 드러난 새로운 점은 무엇인가? 음식점에 도청기를 설치했다거나, 전화국 직원에게 뇌물을 줬다거나, 휴대전화를 도청했다거나 하는 것은 결코 새로운 점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해 준 것에 불과하다. 정말로 새로운 점은 이 나라의 지배세력이 어떤 식으로 세력을 이루고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있는가를 있는 그대로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 바로 이 점에서 불법도청 테이프는 이 나라에 드리운 음험한 지배세력을 그늘을 걷어내고 이 나라를 민주주의의 초석 위에 바로 세울 수 있는 중대한 ‘공공자산’이다. 이 자산을 올바로 쓰지 않는다면, 이 나라의 민주화는 결코 심화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두가지 사항에 모두 주의해야 한다. 첫째, 국가기관의 도청에 관한 모든 정보가 소상히 공개되어야 한다. 잘 알다시피 국정원만이 아니라 기무사와 경찰도 오랫동안 불법도청을 저질렀다. 독재권력은 다양한 억압적 국가기구를 설립하고 그들로 하여금 모든 국민을 감시하도록 했다. 이런 독재권력의 문제가 민주화와 함께 얼마나 개혁되었는가에 대한 총체적 평가가 절실하다. 둘째, 이번의 불법도청 자료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공개가 필요하다. ‘삼성 X파일’에서 잘 드러났듯이, 지배세력에게 법은 그저 법일 뿐이다. 이제 그들은 법에 따라 불법도청 자료는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번의 불법도청 자료는 단순히 불법도청 자료가 아니라 도둑과 역적의 온갖 모의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증거물이다.

법을 우습게 여기고 나라를 사유화한 자들의 행태에 대해 우리는 당연히 알 권리를 가지고 있다. 분석을 통해 증거물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판정된 자료는 모두 그대로 공개되어야 한다. 이미 그 내용이 모두 밝혀진 ‘삼성 X파일’의 공개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홍석현과 이학수의 육성을 들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사유화한 자들이 법이며 국가기관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고 있는가를 생생하게 확인해야 한다. 그 과정 자체가 민주화의 심화와 확산의 과정이 될 것이다. 독도 잘 쓰면 약이 된다. 독이 있는 나무에서는 독이 있는 열매가 열린다며 귀중한 증거물의 공개를 가로막는 것은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고 민주화를 저해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더욱 넓히고 다질 수 있는 역사적 길이 열렸다. 이제 특검으로 이 길을 넓히고, 특별법으로 이 길을 굳게 다지자.

홍성태 (상지대 교수, 정책위원장)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