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판사는 피라미드 상층부에 오를 수 없다”

법원개혁 앞장선 문흥수 서울지법 부장판사

▲법원개혁에 나선 문흥수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지난주 22일 부장판사 10명을 비롯한 30여 명의 현직판사들이 대법원에 법원개혁을 촉구하는 건의서를 올렸다. 피라미드식 법관인사제도의 탈피, 대법원에 개혁·진보 인사의 참여, 전관예우 근절 등 강도 높은 개혁안을 담은 이 건의서는 엄격한 서열과 관료적 질서로 상징되는 법원조직의 특성에 비춰 그 자체로서 국민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 성과가 어느날 갑자기 이뤄진 것은 아니다. 폐쇄적인 법원조직에 일선 판사들의 가감없는 의사전달의 통로를 뚫기 위한 판사들의 노력이 2001년 법관공동회의를 만들었고, 이번 건의서는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문흥수 서울지방법원 판사도 법원개혁을 주장해온 중심 인사다. 문 판사는 단독판사 시절, 국가보안법상 애매모호한 반국가단체 처벌조항 그리고 김영삼정부 말기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린, 우리 법원에서 몇 안되는 ‘용감한’ 판사로 통한다.

문 판사의 법원개혁 주장은 법조일원화의 범위, 전관예우 근절의 수단 등 일부 사안에 있어 시민단체의 주장과 약간의 차이점도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개혁의 무풍지대였던 법원조직 내부에서 강도 높은 개혁을 요구하는 집단적인 목소리가 표출됐다는 점에서 이번 서울지법 판사들의 건의서 제출이 대법원에 의해 어떻게 수용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다음은 문 판사와의 일문일답

-법관공동회의는 왜 만들어졌고, 다시 이번 건의서가 나온 배경은 무엇인가?

“2001년 법원 개혁의 청사진을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뜻이 맞는 33명의 판사들이 발기인이 돼 법관공동회의가 만들어졌다. 당시 모임을 주도했던 판사들은 법원의 관료주의로 인해 하위직 판사들의 의견이 상부에 잘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당시 대법원은 우리 주장을 수용해 각급 법원에 판사회의제도가 도입됐지만 제 기능을 못하는 실정이다.

지난 3월 만들어진 법관인사제도개선위원회(이하 위원회)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었지만 법관들의 자유로운 의견개진과 토론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다. 위원회는 내일(27일) 2차 회의를 개최하는데, 예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임명된 위원들의 면면이 개혁보다 수구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개혁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이번 건의서를 내게 된 것이다.”

-이번 건의서 내용에 판사들에 대한 근무평정의 공정성, 객관성을 강조했다. 지금의 인사고과는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

“고등법원 부장판사 임명을 살펴보면 법원 행정에 대해 고분고분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탈락한 것을 알 수 있다. 해외유학을 갈 수 있는 자격을 평가하는 것에 있어서도 공정한 평가가 이뤄지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이제 경력 5∼6년된 판사들이 인사의 공정성에 회의를 느끼고 법복을 벗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상급자의 주관적인 평가에 의해 법관의 신분이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인사평가방식의 구체적 방식을 제시한다면?

“사건처리율, 상소율, 파기율, 파기사유 등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지표를 가지고 평정이 이뤄져야 한다. 지금은 이런 구체적 기준이 아니라 상층부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인사고과가 이뤄짐으로써 법원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인사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의 법원 인사구조를 ‘피라미드식 다단계 승진구조’로 표현했는데, 검찰개혁의 경우처럼 서열과 기수를 파괴한 능력 위주 인사를 요구하는 것인가?

“그것도 포함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상층부로 올라가면서 승진을 못한 판사들이 어쩔 수 없이 옷을 벗는 관행과 구조를 바꾸자는 것이다. 판사들이 상층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법률과 양심에 따라 소신있는 판결을 하려면 현행 피라미드식 승진구조를 원통형으로 바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등부장 등의 상층부 승진 여부와는 무관하게 명예를 유지하면서 판사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현행 호봉제를 단일호봉제로 바꿔야 한다.”

-단일호봉제가 왜 법관의 신분보장에 중요한가?

“법원조직법상 1994년 판사의 직급을 폐지해 단일호봉제를 이미 도입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등부장에 대해 여전히 정무직 처우를 함으로써 같은 경력의 법관이라도 고등부장 발탁 인사만을 특별대우하고 있다. 따라서 고등부장에서 탈락한 인사들은 명예에 큰 타격을 입고 대부분 옷을 벗는 것이 현실이다. 신분보장이 안되는 것이다. 변호사로 나서는 인사들에 대한 전관예우가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바로 단일호봉제에 의한 신분보장이 이뤄지지 않은 것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시민단체는 이번 건의서의 내용대로 대법원에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인사들이 참여하기 위해서는 법학자나 덕망있는 사회인사들도 법관에 참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법조일원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판사님의 생각은?

“우리 헌법은 현재 법관의 자격을 사법시험을 통과한 자로 규정하고 있어, 시민단체의 주장이 가능하려면 우선 헌법개정이 이뤄져야 한다. 이번 건의서에서 요구하는 법조일원화는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소신껏 일한 사람은 거의 다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던 법원에 재야나 시민단체에서 공익적 활동을 했던 인사들도 판사로서 참여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지금은 대법관은커녕 고등부장의 직급도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인사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이 거의 불가능하다.”

-외견상 법원은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이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상관의 자의적 평가에 의한 승진제도는 그 자체로서 상급자가 정치적인 영향력을 미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구조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번 건의서를 낸 이후 현직 판사들의 여론은 어떻다고 보는가?

“말을 안 할 뿐이지 우리를 지지하고 있다고 본다. 특히 단일호봉제에 의한 신분보장은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믿는다.”

-법원의 관료적 폐쇄성 때문에 법원개혁에 앞장서는 것이 앞으로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걱정은 없는가?

“십자가를 질 각오로 시작했기 때문에 특별한 걱정은 없다.”

장흥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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