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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2004.10.22
  • 890
어쩌면 오늘 서점에선 헌법 교과서가 날개 돋친듯 팔릴 지 모르겠다. 관습헌법이 무엇인지 궁금하니까. 아니면 서가에 꽂혀 있던 상당수의 헌법 책들이 쓰레기통에 처박혀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헌법 이론이 별 필요없으니까.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듣고 처음에는 허탈하도록 심각했다. 위헌 선언이란 결과보다 그 논리 때문에 더했다. 그러다 조금 지나니 웃음이 나왔다. 불현듯 이문열의 단편 「정산 선생」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이 백성이 어찌 이리 경조부박하단 말이냐? 양왜의 침노로 왕홀(王笏)을 빼앗긴 나라가 어찌 우리 조선뿐이란 말이냐. 안남도, 캄보디아도, 라오스도 그랬지만 광복이 되자 일단 그들은 왕정을 복고시켰다. 그 다음 왕가가 자진해서 왕권을 백성에게 되돌렸건, 혁명에 의해 쫓겨났건 우선은 계승자를 왕위에 올렸다. 그런데 – 이 백성에 이르면 누가 빈말이라도 한번 왕정복고를 입 끝에나 올린 자가 있더냐?>

소설가는 일제로부터 벗어나자 구한말 왕가를 깨끗이 잊은 채 난데없이 들어선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이 심히 의심스러웠던 모양이다. 그 침통한 심경을 영원한 정신적 스승으로 섬기는 정산 선생의 입을 통해 피력했다. 지금 와서 보니, 그 소설가는 어제 벌어진 초유의 헌법적 사태를 신통하게도 예견하고 그랬는가 싶기도 하다. 일제로부터 되찾은 나라를 이조 왕가에 되돌려준 뒤 헌법이라도 만들었더라면, 경국대전까지 들먹인 헌법재판소의 논리가 조금은 더 매끄러웠지 않았겠는가. 아니면 헌법재판소가 알게 모르게 정산 선생의 회한과 그 유지를 따르는 수구 애국주의자들의 집념을 눈치채고, 그 애틋한 논리를 마구잡이로 확대하여 관습헌법으로 만들어낸 것일까.

어쨌든 이번 사태는 법리적으로 따질 일이 아닌 것 같다. 관습헌법이든 헌법관습법이든 그것이 헌법전 위로 왜 나타나는가. 수도의 위치가 어찌 관습헌법이며, 서울이란 행정구역이 어떻게 살아 있는 헌법 규범이란 말인가. 그 문제는 헌법 판례 평석의 과제로 넘겨 두자. 우선 우리는 헌법재판소의 기발한 작문만 심사해도 충분할 것 같다.

금년 들어 헌법재판소는 연거푸 문제작을 내놓았다. 잘 아시다시피 첫 번째 작품은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문이다. 요행히 정답은 맞추었는지 몰라도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은 합격점에 미달이었다. 앞뒤 논리는 도무지 꿰맞추어도 이해하기 어려웠고, 정치인인 대통령의 정치 행위 범위를 함부로 해석하여 제한한 것은 납득할 수 없었다. 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터라, 영역된 결정문을 찾는 외국 학자들이 있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 결정문이 제대로 번역되었다면 창피가 해외로까지 번지는 것이 되는 게 아닌가 두렵다.

그런데 이번 결정은 거기서 한술 더 떴다. 말하자면 풀이 과정도 엉망인데다 답까지 틀린 셈이다. 내 심사 기준으로는 깨끗하게 낙제점이다. 수도는 중앙 행정이 이루어지는 지리적 위치에 불과하다. 중앙 행정이 헌법 내용의 일부라면 수도의 위치는 그 헌법적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는 하나의 수단을 목적화하여 관습헌법까지 내세우며 헌법과 법률을 마음대로 유린하고 말았다. 그래서 내심 행정 수도 이전에 반대하거나 의견 표명을 유보하고 있던 사람들까지 이번 결정에 고개를 내젓는 경우가 많다.

헌법재판소의 경악할 논리 비약의 파문은 이번 사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심각하다. 도대체 앞으로 닥칠 문제에 또 어떤 논리로 대처할지 우려스럽다. 벌써 장자 상속의 전통적 상속제도를 평등 분배로 뜯어고쳐 놓은 개정 민법은 합헌이냐고 묻는다. 폐지 입법을 추진중인 호주제나 동성동본 금혼도 헌법을 개정해야 하느냐고 아우성이다. 이번처럼 헌법재판소가 관습헌법을 자의적으로 인정하고 해석을 독점한다면, 앞으로 모든 입법과 개정 작업은 헌법재판소를 거쳐야 할 판이다. 불만 있는 사람들은 헌법재판소 창구에 줄을 설 것이다. 보이지 않는 관습헌법을 아는 사람은 헌법재판관들뿐이니까. 상상력을 조금 심하게 발동하면, 모든 법률을 헌법에 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번 사태로 인해 헌법을 지켜야 할 헌법재판소는 스스로 헌법을 법률의 수준으로 격하시켜 버린 꼴이다.

아무래도 이번 결정에는 석연찮은 데가 있다. 건전한 이성을 가진 최고 재판소의 판관들이라면 이런 무리한 논리로 신청인들조차 생각하지도 못한 기상천외의 작문을 할 리가 없다. 거기에는 무언가 뒤틀린 심사가 똬리를 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굳이 짐작하여 표현하자면, 원로라는 이름을 함부로 달고 국가보안법 폐지 결사 반대를 외치며 거리를 메우는 회광반조의 정열 같은 것이다. 헌법재판관들까지 이러니, 드디어 이 땅에 공사를 불문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시대가 오고야 말았다.

이미 끝난 결정은 어쩔 수 없다. 헌법재판소에 실망한 내 의견이 옳다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헌법재판소는 어차피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고 있는 기관이다. 하지만 관습헌법을 마음대로 해석할 권한은 헌법에도 헌법재판소법에도 없다. 그런 자의적 해석의 습관이 관습이 되어, 그것마저 관습헌법이라고 우길까 두렵다. 따라서 한번 실수로 빚어진 사태가 굳어지기 전에 헌법재판소법을 고쳐 재판관 구성을 바꿔야 한다. 판사와 검사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헌법재판관 자리를 비우게 하고 헌법전문가와 식견 있는 지식인 또는 정치인으로 채워야 한다. 헌법학자 한 명 없는 헌법재판소를 민주적이고 다양하게 바꿔 놓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덧붙여야 할 말이 있다. 이 글에서 제안한 헌법재판소 작문의 심사 대상에서 한 사람의 소수 의견은 당연히 제외한다.

차병직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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