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위원회 노사관계 2012-08-02   1581

[언론기획] 쌍용차, ‘죽음의 행진’을 멈춰라 <6> 쌍용차의 ‘전쟁’이 말하는 것

 

 

참여연대와 프레시안은 6월 마지막 주부터 8월 말까지 “쌍용차, ‘죽음의 행진’을 멈춰라”라는 주제로 릴레이 칼럼을 연재합니다. 이번 칼럼기획은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에 대해 각계각층의 사회 인사들이 다각적인 시선에서 사태의 원인을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칼럼은 매주 목요일마다 연재됩니다. 앞으로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여섯번째 칼럼은 오늘(8/2) 연재되었습니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참여연대 정책자문위원)께서 게재하신 칼럼입니다.

본문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쌍용차, ‘죽음의 행진’을 멈춰라] 쌍용차의 ‘전쟁’이 말하는 것 “강요당한 희생은 희생이 아니다”

 

 

< 칼럼 전문 >

 

쌍용차의 ‘전쟁’이 말하는 것

[쌍용차, ‘죽음의 행진’을 멈춰라] “강요당한 희생은 희생이 아니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국가나 기업도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라고 말할 수 없다. 희생은 결코 강요될 수 없는 것이고, 자발적일 때 그 뜻이 사는 법이다. 만약 국가, 민족, 기업이 전체의 이름으로 구성원인 개인에게 희생을 요구한다면, 이들 조직이나 단위는 이미 전체, 즉 공동의 운명의 단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양도하면서까지 지켜야할 ‘전체’의 목표나 가치는 존재할 수 없고, 그 어느 누구도 강요에 의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전체’가 공동체가 아닌 이유는 그것이 개인에게 강압과 폭력을 행사해야만 유지될 수 있는 단위라는 말이며, 강압은 공동체의 가치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살기 위한 것이라는 말로 포장된 전체의 이익이나 목표는 이번에는 희생자 명단에서 빠진 남은 사람들에게 또다시 강요될 수 있는 것이고, 그 경우 전체에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요된 전체는 언제나 사실은 텅 비어 있는 것, 죽은 사람들의 무덤 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노예화가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강요된 전체는 그 조직 내 특정인들의 사적인 이익일 가능성이 높다.

 

쌍용차가 부도위기에 몰렸을 때, 일정한 인원을 구조조정하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러니 누군가는 정리해고의 대상이 되었어야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기업을 살리기 위해 구조조정은 불가피했던 것이 아닌가라고 말할 수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 쌍용차에 기대고 있는 평택의 인근 자영업자나 주민들, 그리고 쌍용이 부도나면 연쇄 부도를 맞이할 하청 기업들과 노동자들, 그리고 우리 사회 전반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기업을 살리기 위해 소수의 희생이 불가피했다고 말하고, 해고나 무급휴직 당한 사람들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저항을 경찰특공대가 헬기까지 동원하여 토벌하듯이 진압하는 것도 불가피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과연 남은 사람들은 구조조정당하지 않고 살아남아서 행복한가? 사측이 동원한 관제대모에 참여해야하고, 심지어는 해고자들의 저항을 진압하는 일에 구사대로 동원되더라도 살아남은 일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그래서 그런지 모르나 자신도 내일 해고당할지 모르는 유사한 처지의 한국의 대다수 노동자들도 쌍용차 해고자나 무급휴직자들에 대해 동정과 공감을 표시하지 않고 무심한 출근길에 나선다. 그래서 쌍용차 노동자들은 이 사회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었고, 그 가족을 포함하여 무려 22명이 죽었고, 해고자나 무급휴직자들이 지금도 매일 매일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

 

그래서 1998년 현대자동차에 구조조정의 바람이 불었을 때도, 2001년 대우차에서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불어서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떠나야했을 때도, 오직 해고 무급휴직처리된 당사자들만이 외로운 저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면의 적은 경찰과 용역, 구사대였지만 실제 적은 온 사회였다. 온 사회는 우리가 살자면, 즉 기업이 살자면 당신들이 희생당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고, 이들 다수의 침묵에 힘입어 경찰은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이 때 ‘기업’, ‘우리’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상당수는 그 이후 자기가 속한 기업에서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위기에 몰려 한 사람, 한 사람씩 일자리를 잃었다. 이렇게 남의 문제를 그렇게 보던 다수자들이 해고가 자기 문제가 되었을 때도 여전히 기업을 위해, 국가경제를 위해 내가 희생당할 수 밖에 없다라고 생각을 할수 있을까?

 

자본주의 시장경제 하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기업이 부도위기에 몰리는 것은 당연하고, 그 경우 노동자들의 전부 아니면 일부는 일자리를 상실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쌍용차 해고자나 무급휴직자들도 너무 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런데 이 상식이 자신의 문제가 될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왜 나인가? “, “내가 이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데 내가 무슨 책임을 갖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 한 이 상식은 더 이상 상식이 아니라, 말도 안되는 부당한 처사가 된다. 최근 쌍용자동차가 법정관리를 신청할 당시 그것의 근거가 된 2008년 감사보고서가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회계장부를 조작해서 손실을 과다하게 책정했고 그것을 근거로 정리해고를 단행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라는 명분도 정당화될 수 없는 셈이다. 정리해고는 노동자를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일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최소화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다했다고 볼 수 없다면, 구조조정의 대상이 된 노동자들은 정말 억울하게 칼을 맞은 셈이다.

 

또한 회사의 조치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노동자를 쓰다버리는 부속품처럼 보지 않고, 기업의 주요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조금이라도 있었는지가 확인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기업은 망할 수도 있고, 크게 실패할 수 있지만, 노동자들이 기업 경영에 일체 관여할 수 없는 한국 상황에서 기업의 부도는 거의 전적으로 경영자 책임이고, 기업의 자본 유치에 국가가 어느 정도 개입할 수밖에 없는 국가 기간산업일 경우, 책임은 정부에게도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기업 내 구조조정의 대상자는 가장 공정하고 합리적인 잣대를 통해서 결정되어야 한다. 노조활동이나 상사에게 대든 것 등 평소의 태도나 행동을 정리해고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누구도 그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품은 이러한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얻지 않은 상태로 해고되어야 한다면, 그 회사는 자신이 희생해야할 ‘전체’도 아니고 공동체도 물론 아니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에게 기업이나 국가경제를 살리기 위해 희생해달라는 말은 폭력 그 자체다.

 

내가 죽은 다음 국가나 기업이 살아남은 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러므로 기업으로부터 불쏘시개취급당한 노동자들은 끝까지 저항하지 않을 수 없고, 말로서 이들을 설득할 수 없는 기업과 정부는 이들의 점거나 저항을 회사의 영업을 방해한 ‘불법’이라 규정한 다음 폭력적 진압의 대상으로 여긴다. 이들에게 용역 폭력을 동원하는 기업의 임원이나 간부들도 지금은 기업이 자신을 살려주지만, 내일은 자신도 기업에서 나와야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기업이 좋아서가 아니라 불안 때문에, 자신도 죽을지도 모르는 바로 그 불안 때문에 이 전쟁의 한 쪽 편에 서게 되었다.

 

평택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과거에 그런 전쟁을 치렀던 금속연맹 산하 다른 노동자, 앞으로 그런 전쟁을 치를지도 모르는 민주노총 산하의 모든 노동자들 중 소수를 제외하고는 쌍용차 노동자의 최후 저항을 강 건거 불구경하듯이 지켜보았다. 쌍용차의 일은 모두 다른 회사의 일, 운이 없어서 쌍용차에 입사했던 친구의 일일 따름이었다. 평소에 모기업인 쌍용차의 횡포에 분노를 품었을지도 모르는 하청기업의 노동자들, 지역의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파업이 빨리 종식되는 것만이 자신이 다시 수입을 얻을 수 있는 길이었다. 이 모든 주변의 노동자들은 자신이 살아남은 것에 대한 다행함,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닥칠지도 모르는 불안감, 그리고 노동자들이 저렇게 당하는 것에 대한 약간의 안타까움 속에서 이 일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래서 쌍용차 해고자들은 철저히 고립된 상태에서 극한의 저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이 살자”고 외쳐도, 메아리만이 돌아왔다.

 

쌍용차의 부도사태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2008년 월 스트리트 발 금융위기와 자동차 판매 부진이 구조적인 원인이다. 그리고 기술개발이나 신차 출시를 하지 않은 자본 즉 상하이 자동차를 우선 지목할 수 있다. 지구화 시대에 외국 자본이 들어왔다 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기술만 빼내갈 요량으로 들어왔다가 투자 약속을 전혀 지키지도 않고 도망친 이 부도덕한 자본에 대해 국가역시 큰 책임을 갖고 있다? 외국 자본이 들어오는 것이 국가경쟁력 향상의 지표라도 떠들던 시장주의자들은 모두 어디에 갔을까? 진정한 책임주체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책임의 10%만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100% 책임을 지라고 할 때, 누가 그것에 대해 승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사태에 누가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있는지에 대한 합리적 토론도 없이 가장 손쉬운 길, 구조조정의 칼을 꺼낸 상태에서 사형수 명단에 포함된 사람들이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결국 쌍용차 노동자들의 철저한 고립은 기업의 주인은 기업주며, 우리사회에서 국가와 기업으로부터 극히 부당한 처우를 당하도고 전체를 위해 개인의 희생은 불가피하기 때문에 억울해도 그냥 감내할 수 밖에 없다고 가르쳐 온 박정희 이래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교육받아온 우리 국민들, 그리고 과거 동료 노동자들이 당할 때도 그러한 입장을 취했을 쌍용차 노동자들 자신도 가해자의 편에 서 있다. 여기에는 대다수의 노동자 특히 조직 노동도 포함된다. 공공성이 실종되고 모든 것을 약자인 개인들이 책임져야 하는 이 구조가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다. 이렇게 소수의 희생자를 완전히 고립시켜, 그들을 극한 저항으로 내모는 우리사회의 취약한 공공성, 시민사회와 노동운동의 취약성, 갈등처리 기제의 부재, 정당의 역할 상실 상태가 쌍용차 사태의 원인으로 엄연히 남아있기 때문에 이와 유사한 일은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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