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위원회 칼럼(lb) 2011-03-17   2104

‘괜찮은 일자리’ 국가의 의무

“박스 주워야지요”

34년간 일용직으로 일한 50대의 유모씨는 아내마저 일자리를 잃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머뭇거림 없이 대답한다. 저축이나 연금으로 버텨보겠다고 하지 않을까, 잠시 기대했던 필자는 할 말을 잃는다. 40대의 장모씨는 1998년 공기업을 희망퇴직한 이후 2009년 12월 현재 기초생활보장 대상자이다. 노모에 두 아이. 아내는 5년간 암으로 투병 중 눈을 감았다. 가장인 그는 사회적 일자리에서 76만원 남짓한 급여를 받지만 생계 유지가 어려워 매일 새벽 우유배달을 한다. 불법이지만 150만원은 있어야 4인가족의 최저 생계를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도 못 받는 근로자들

“제 탓이지요”

낡았지만 깔끔한 입성으로 필자를 만난 그가 헤어지면서 했던 말이다. 온전히 그만의 책임일까.

군대 제대 후 숙박업소를 전전하며 월 140만원을 받는 30대 류모씨는 급여를 통장으로 받았으면 한다. 현찰로 주는 탓에 근로기록이 남지 않아 급한 돈이 필요해도 은행대출이 어렵기 때문이다. 사채에 눈이 가는데 병원비 때문에 200만원을 빌렸다가 2년간 원금의 2배 이상을 갚아야 했다는 40대 이모씨의 일이 남의 문제가 아니다. “결혼요? 생각도 못하지요. 24시간 격일제로 근무하고 나면 쉬고만 싶어요.” 추락할 곳이 있다면 그나마 행복일까. 9년째 백화점에서 일하는 20대 김모씨 역시 근로기록이 없다. 수수료 형태로 급여를 받기 때문이란다. 학원강사 5년째인 차모씨도 마찬가지이다. 유학까지 갔다 왔다면서 씁쓸하게 웃던 그가 묻는다. “제가 노동자인가요?”

평생 일을 하지만 항상 실직과 빈곤의 경계에 서는 이들. 10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전체 임금근로자의 42%(약 700만)이고 50인 미만 사업장으로 넓히면 전체의 66%(약 1100만명)이다. 이 중 210만명은 법적으로 보장된 최저임금을 받지 못하고 440만명은 100만원 미만의 저임금 근로자이다. 일을 하는데 노동자인지 알 수 없고 실업급여는 꿈도 못꾼다. 실업급여나 직업훈련을 받는 것이 부러워 사회보험에 가입한 사업장을 찾아보기도 하지만 마음뿐이다. 당장 돈이 필요해서 이것 저것 따질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들어 이들의 대열에서 청년층을 자주 발견한다. 대학진학 때까지 한껏 눈을 높이라더니 졸업하자마자 눈을 낮추란다. 그렇지 않아도 졸업 후 6개월이면 눈이 한껏 낮아지지만 부모님께 차마 시간제 일자리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못한다. “취업준비 한다고 말씀드려요.” 눈길을 떨구던 20대 차모씨를 만나고 돌아오는 필자의 발걸음이 무겁다. 첫 일자리가 비정규직이면 영원히 비정규직일 수 있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젊어서 고생하면 늙어서 박스를 주워야 할지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고용안전망은 ‘당연한’ 복지다

대한민국 헌법에 따르면 괜찮은 일자리와 보편적 복지는 국가의 의무이다. 그러나 저임금 근로 비중이 OECD 1위이고, 나쁜 일자리일수록 실직 위험이 크며 실직이나 직장이동이 잦을수록 급여가 줄어드는 현실에서 보편적 복지에 기초한 고용안전망을 이야기하면 퍼주기 복지라고 한다. 퍼 담아 본 사람이 없는데 퍼 준 사람이 있다니 그것이 놀라울 뿐이다. 전 지구적 경쟁 때문에 어쩔 수 없다지만 사실 여부가 의심스럽다. 10년 이상 장기근속자 비중이 16.5%로 OECD 최하위이고 우리보다 1인당 GDP가 낮은 나라도 복지지출 비중이 우리보다 높기 때문이다.

물론 쉽지 않다. 하지만 세계가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선택하는 것이며, 그런 선택 없이 선진국이 된 나라는 없다. 운명이 있다면 그 이름은 도전이다. 괜찮은 일자리에 기초한 보편적 복지는 더 나은 경제와 더 많은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지름길이고 우리의 다음번 도전이다. 어렵다고 미래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글은 한국노동연구원 은수미 연구위원이
2011년 3월 8일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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