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위원회 노동법제 2003-11-11   1436

손배·가압류 법안, 못 만드나, 안 만드나

줄지은 노동자 자살과 파업에도 관련기관 손놓고 있어

노동자들의 잇단 분신과 파업 투쟁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는 사용자의 손배·가압류 남용에 대해 정부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노사정위원회 등 대책 마련 책임이 있는 관련기관이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것으로 파악돼 노정간 대립이 한치의 양보 없는 극한 대결로 치달을 전망이다.

지난 10월 29일 노동·법무·행자 등 3부장관의 노동자 분신 관련 담화문 발표 이후 제시된 정부대책은 실효성이 없어 연이은 분신으로 성난 노동계를 더 자극한 결과가 됐다는 지적이다. 그나마 이런 안조차도 노동부나 노사정위에서 진지하게 다루고 있지 않은 것으로 파악돼 정부가 손배·가압류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케 하고 있다.

노동현안 손놓고 있는 국회 환노위

두산중공업 노동자 고 배달호씨의 분신을 계기로 민노당과 민주노총, 민변 3개 단체는 올초 사용자의 무분별한 손배·가압류 남용을 방지하는 근본적인 법률개정안을 만들었다. 이 개정안의 핵심은 “사용자의 손배·가압류 청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불법파업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현재의 노사관계법을 고치고, 불법파업이라고 할지라도 사용자의 손배·가압류의 인정 범위를 극히 예외적인 경우로만 제한”하자는 것이다.

이 개정안은 신계륜 의원을 통해 입법청원은 됐으나, 환노위 청원심사소위에 방치된 상태다. 박창규 민주노총 정책부장은 “1명의 입법청원 의원도 간신히 구한 상태에서 국회의원 10인 이상의 서명이 필요한 발의는 불가능했다”고 당시 상황을 밝혔다. 신계륜 의원실의 관계자는 “노동계의 개정안을 소개한 이후 진행상황은 잘 모르겠다”고 밝혔다.

이후 환노위 소속 박인상 의원이 지난 3월 사용자와 노동계가 모두 참여하는 간담회를 열어 개정안을 제시했으나 사용자측으로 참여한 경총과 노동계 모두 반발하면서 추진력을 잃었다. 박인상 의원실의 정현민 비서관은 “당시 대통령이 노동계의 기대감을 높인 상황에서 우리 스스로도 법안 내놓고 나서 노동계의 욕을 먹을 것 같아 추진을 안했지만 최근 잇단 노동자 분신을 보고 그 때 어떤 식으로든 법안을 발의했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란 후회가 든다”고 밝혔다.

▲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노동자들은 정부가 사용자의 무차별적인 손배·가압류에 제동을 거는 대책 마련을 강력히 촉구했다.

환노위 소속 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계속 안을 내놓겠다고 하는 상황에서, 특히 노사정위의 논의사항을 통해 정부안이 나오면 국회에서 법률안을 처리하는 관행이 자리잡은 상황에서 환노위가 노동관련 법안을 주도하기 어렵다”는 속내를 털어놨다.

그러나 노동관련 현안에 대한 환노위의 주도권 상실을 환노위 소속 의원들의 자질과 사용자 편향성에서 찾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박강우 민주노총 정책국장은 “역대 환노위 소속 의원들 중에서 지금 구성이 최악이며, 손배·가압류 문제를 대하는 소속 의원들의 태도는 노동을 다루는 의원들이 아니라 사용자를 대변하는 재경위 소속 의원들인 것 같다”고 일침을 가했다. 실제 환노위 소속 의원들 사이에서도 16명의 의원 중 노동문제에 대해 최소한의 전문성을 갖춘 의원들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실정이다.

노동법안에 대한 환노위의 주도력 상실은 올해 국회에서 통과됐거나 현재 발의된 노동관련 법안들의 양적, 질적인 분석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2003년 1월 1일부터 7월 31일까지 국회를 통과한 법률 제·개정안은 110여개로 이중 노동관련 법안은 ‘외국인근로자의고용등에관한법률’ 단 한 건이다.

2003년 6월 이후 최근까지 발의된 380여 법률 중에서 노동관련 법안은 11개. 그나마 이 11개의 법률 발의안의 상당수도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개정안, 직업안정법중법률개정안 등처럼 노동계가 사용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으로 비판하는 법률안이거나, 국가기술자격법개정법률안, 공인노무사법개정안 등 시급한 노동현안과는 거리가 있는 안들이 차지하고 있다. 연이은 분신과 자살로 대변되는 비정규직 차별이나 손배·가압류 등 시급한 노동현안을 다루는 제·개정 발의는 전무한 실정인 셈이다.

손배·가압류 남용에 대한 근본대책이 최저생계비 보장?

현재 손배·가압류 관련 법률 개정안 중 정식 발의된 안으로는 환노위 소속 오세훈 의원이 주도해서 발의돼 지난 5월말 법사위에 계류된 민법개정안이 유일하다. 이 안은 급여 가압류의 범위를 급여채권의 2분의 1로 제한한 현행 민사집행법 규정을 최저임금을 보장하는 수준으로 바꾸고, 신원보증법을 개정해 노동자의 연대보증인까지 미치는 사용자의 손배·가압류의 인적 범위를 제한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정부가 최근 제시한 ‘최저임금 보장 수준에서 가압류 제한’과 비슷한 수준의 대책을 담고 있는 이 안에 대해 노동계는 아예 외면하는 실정이다. 박강우 정책국장은 “지금 최저임금이 약 56만원 수준인데, 이 수준의 2배 이상의 월급을 받는 노동자에게는 아무런 실효성을 갖지 못할뿐더러, 임금이 최저임금의 2배 이상인 노동자는 오히려 가압류 인정범위를 더 확대시키는 기막힌 안이 정부안”이라고 꼬집었다.

박 정책국장은 “일본의 경우 사용자가 가압류할 수 있는 급여의 수준을 25%로 제한하고 있고, 여기에 더해 임금이 낮은 노동자에게 생존부담을 주지 않을 정도로 급여에 대해서는 특정금액 이상으로는 가압류를 못하게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 정책의 실효성에 대해 박인상 의원실의 정현민 비서관은 “정부가 내놓은 안은 손배·가압류 대상 노동자의 생계보장 대책이지, 사용자의 손배·가압류의 남용을 막는 대책은 전혀 아니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이런 개정안마저도 국회에서 정식으로 논의될 가능성이 낮다는 지적이다. 오세훈 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우리가 발의한 민법개정안은 실질적으로 법사위에서 주관하는 것으로 법무부가 보수적이라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노동부와 노사정위 등 다른 관련기관도 사실상 대통령만 쳐다보면서 손을 놓고 있는 실정으로 보인다. 노사정위에 참여하고 있는 한국노총의 한 관계자는 “노사정위에 여러 특위가 구성돼 있지만 손배·가압류 관련 특위를 구성해 논의한다는 얘기는 아직까지 없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노사정위에서 논의하는 것이 오히려 노동계가 정부를 상대로 손배·가압류에 대한 근본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것을 어렵게 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부 역시 마찬가지다. 손배·가압류 문제를 다루는 노동부 노동조합과의 한 관계자는 “손배·가압류 법률 개정안은 우리 부서에서 논의된 바 없으며, 법무부와 논의하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이처럼 노동부, 국회 환노위, 노사정위 등 관련기관의 대책은 화염병까지 등장할 정도로 절망과 분노에 이른 노동계의 절규에 비춰 너무나 안이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정부가 제시하는 안이 전혀 현실성이 없다는 전문가 지적이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손배·가압류 문제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민변과 노동계가 합의해서 마련한 개정안을 정부가 전향적으로 수용해 국회를 통해 입법화하는 것이라는 시민사회의 지적이 일고 있다. 이와 함께 공공부문의 손배·가압류 취하도 노동계가 정부의 의지를 신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라는 주장이 공감대를 얻고 있다.

장흥배 사이버참여연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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