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위원회 칼럼(lb) 2013-01-21   3374

[연속기고-왜 다시 산별노조인가? 31] 한국 노동운동과 협동조합운동

 

 

<매일노동뉴스>는 지난 4월30일 창립 20주년 특별기획으로 마련한 ‘2012년 총·대선 국면 산별노조운동 점검 좌담회’에 이어 ‘왜 다시 산별노조인가’를 주제로 연중 캠페인을 진행한다. 캠페인에는 산별노조연석회의와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가 함께한다. 연석회의에는 금속노조·공공운수노조·금융노조·보건의료노조 등이 참여하고 있다.

 

<매일노동뉴스>는 연중 캠페인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이번 연속기고에서 한국 노사관계 개혁을 위한 산별노조운동 전면화와 초기업 노사관계로의 재편을 제안한다.

 

연속기고는 매주 월요일 게재되며, 산별운동에 관심 있는 현장 노사 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한다. 연속기고가 마무리되면 책자로 발간한다. 정기국회를 앞두고 산별운동 진단과 제도화 방안 모색을 위한 국회 토론회도 준비하고 있다. 산별노조운동 진전을 위한 실질적인 공론의 장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관련기고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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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왜 다시 산별노조인가? 33] 경제민주화와 산별노조운동

 

 

한국 현실에 뿌리내린 산별운동은 무엇인가

 

산별운동에 대한 노동운동 현장 활동가들과 전문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새삼 실감하게 된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자유인의 삶을 살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아쉬운 점 또한 절감하게 된다. 왜 우리는 우리나라의 경제·사회·정치 현실에 토대를 둔 창조적인 한국의 산별운동에 대한 모색이 부족할까. 

 

오늘날 한국 노동자들이 서로 함께 일하고 접촉하고 소통하고 교류하고 생활하는 공간과 시간은 물론 당연히 집과 직장이다. 그리고 지역이다. 취미 모임도 있고 동창과 각종 친목모임도 있다. 그러나 산업별로 노동자들이 함께 모이고 교류하는 기회는 극히 적다. 산업별로 공통의 이해가 있는 과제를 조직해 투쟁에 나서는 경우가 많아야 하는데도 현실에서는 그리 흔치 않다. 요컨대 노동자들이 개별 기업의 이해를 뛰어넘어 단결할 수 있는 범주는 초기업단위 산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역도 있으며, 나아가 가장 중요하게는 생활세계 그 자체도 있다. 

 

산별노조운동을 부정하거나 산별노조 전략의 중요성을 폄하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서구의 산별운동이 모범답안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서구의 잣대를 들이밀어 누런 한국인들의 피부를 표백제로 탈색하거나 흰 페인트로 덧칠해 흰 피부를 만들어 내는 산별운동이라면 그것은 무의미함을 넘어 한국 노동자들의 해방을 향한 길을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다. 80년대 옛 소련식 국가사회주의를 지향했던 일부 노동운동의 경향이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그런 경향이 있다면 종북주의보다도 더 위험한 것이 종서구주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개별 기업을 뛰어넘는 단위를 왜 산별로만 생각하는가. 지역도 있고 생활세계도 있다. 노동자들의 운동은 노동조합운동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협동조합운동을 비롯한 생활세계의 다양한 사회문화운동과 정당정치운동도 있다. 한국의 산별노조운동은 이런 지역 공동체운동과 풀뿌리 지역공동체 정치운동과 함께하지 않으면 힘을 얻기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노동운동은 자유인들의 연대·연합을 지향하는 공동체운동

 

노동해방이란 노예와도 같은 임금노동자 신세를 벗어나 자유인으로서 창의적인 노동을 통해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상태를 말한다고 치자. 당연히 산별운동 또한 궁극의 목표는 노동자들의 해방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산별노조의 조직과 투쟁이 그저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에만 머문다면 그것을 통해 궁극의 노동해방을 달성할 수 있을까.

 

모든 노동자들의 운동은 공동체운동이다. 노동조합운동도 협동조합운동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가 철저하게 해체시킨 공동체를 다시 복원하는 운동이야말로 노동해방의 첫걸음이다. 70년 전태일의 산화 이래 새롭게 시작된 한국의 노동운동 또한 새로운 공동체운동이었다. 노동조합은 새로운 인간관계의 마당이자 새로운 공동체였다. 70년대 산업선교와 가톨릭노동청년회의 소모임, 노동조합의 각종 소모임은 그 자체가 강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한 소공동체 운동이었다. 청계피복·동일방직·원풍모방·반도상사·콘트롤데이타 등 대부분의 70년대 민주노조 조합원들이 가장 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같은 공동체 정서다. 87년 이후 새롭게 전개된 한국의 노동운동 또한 초기에는 노동조합의 각종 소모임을 비롯해 노동조합 자체가 강한 유대감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운동의 성격이 짙었다. 1987년 이후 울산의 현대 노동자들이 경험한 것도 이같은 노동공동체였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은 공동체운동의 성격을 급속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노동운동이 공동체운동이라고 말하면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이 부지기수다. 단언컨대 한국의 산별운동은 이런 새로운 인간관계의 형성과 함께 공동체운동을 지향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 일상생활 자본의 지배·종속에서 탈환하는 운동: 협동조합운동

 

자본이 일상생활의 영역까지 철저히 지배·종속시키려 하면 당연히 노동자들은 이를 탈환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탈환 운동이 인적결사를 바탕으로 공동체 경제활동을 하는 협동조합운동이다. 협동조합운동은 노동자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항해 노동자 일상생활의 협동화와 민주화를 이뤄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협동조합운동의 효시인 1844년의 로치데일 공평개척자조합도 영국의 해고노동자들이 만든 것이었다.

 

대통령과 자치단체장 선거를 통해 행정권력의 일부를, 국회의원과 지방의회 선거를 통해 입법권력의 일부를 노동자 친화의 권력으로 탈환한다고 해서 국가권력은 바뀌지 않는다. 민주정부 10년이란 노동자들에게는 사실 재앙이었다. 노동정치는 입법·사법·행정 권력을 밑에서부터 바꿔 나가는, 지역으로부터의 풀뿌리 공동체 정치운동을 지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실 한국의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은 여전히 국가주의적인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의 한계에 갇혀 있다. 노동자를 비롯한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기득권층에게 빼앗긴 인민주권을 탈환하는 운동은 국가주의 노동운동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산별운동이 지역의 풀뿌리 공동체운동과 풀뿌리 정치공동체운동과 결합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 학교로서의 협동조합운동은 조합원 민주주의조차 실종된 상태에서 고사돼 가고 있는 노동조합운동의 거의 유일한 탈출구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산별운동은 공동체운동으로 새롭게 정립해야 하며, 그래야만 활로를 열 수 있다.

 

원산총파업은 한국 산별운동에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3·1 운동 직후인 1920년 4월11일 서울 광무대에서 600여명의 노동자와 사회운동가들이 모여 한국 최초의 전국 노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가 창립대회를 가졌다. 협동조합운동이 한국 노동운동의 출발이었던 셈이다. 조선노동공제회는 1922년 해산될 때까지 전국에 걸쳐 대구·평양·안악·개성·인천·예산·정읍·황주·북청·군산·신천·안주·광주·영흥·신창·안동·경주·해주·청진·진주·강계·삼진 등 20개 이상의 지회를 뒀고, 지회들은 인근 소도시나 면사무소 소재지에 분회를 두기도 했다. 회원수가 무려 1만5천명에 이르렀던 식민지시대 강력한 노동단체였다. 주요 활동가들도 초대 회장이었던 박중화를 비롯해 박이규·오상근·백광흠·김찬·최창익·차금봉·강달영·신백우·윤덕병 등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모두 포함해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주요 지도자들이 거의 망라해 있었다.

 

1929년 원산총파업은 식민지시대 최대의 파업으로서 오늘날까지도 한국 노동조합운동에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원산노동연합회에는 원산에 있는 거의 모든 직종의 노동자 2천200명의 조합원이 있었다. 일종의 지역·산별연합체였다. 원산노련의 조직력이 막강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렇게 장기간 파업을 지속했는데도 버틸 수 있었던 까닭은 다름 아닌 원산노련에는 오늘날 한국 노동조합에는 거의 없는 소비조합과 구제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투쟁과 파괴만으로는 새로운 사회는 불가능하다. 새로운 사회는 노동자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지금 한국 노동조합운동은 자본과 국가에 대항한 투쟁에서도 철저히 패배하고 말았다. 아니 패배를 지나 이미 자본과 국가에 노동조건과 복지를 구차하게 애걸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국의 산별운동은 이제 새로운 모색을 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종업원노조의 정체성으로는 죽었다 깨도 노동운동의 미래는 없다. ‘무늬만 산별노조’의 울타리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종업원노조의 정체성을 과감하게 탈각하기 위해 노동조합은 지역에 뿌리박은 지역 노동자들의 공동체로서 지역노동조합으로 지평을 확대해야 한다. 산별운동도 이런 공동체운동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노동조합운동은 생활세계를 자본의 지배·종속으로부터 탈환하는 협동조합운동에 앞장서면서 활로를 개척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생활세계를 협동경제와 상부상조의 사회경제로 탈환하지 않고서는, 노동자 생활세계를 민주화하지 못하고서는, 정치 민주화는 요원한 일이다. 노동정치는 작업장 안의 민주화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생활세계의 민주화로부터 시작된다. 이를 위해서는 공동체운동의 주요 주체로서 산별운동이 나서야 한다. 원산노련이 오늘의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같은 노동공동체 운동이다.

 

 


이 글은 박승옥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 대표 의 기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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