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위원회 칼럼(lb) 2005-07-08   1124

<안국동窓> 김대환과 김태환

김대환 노동부장관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가 ‘돌변’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경우에 사람은 그처럼 ‘돌변’하게 되는가? 노동부장관 자리가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인가? 원래 그런 사람이어서 노동부장관이 되었는가? 그는 ‘돌변’한 것이 아니라 ‘정체’를 감춰왔던 것인가? 그렇게 완벽하게 ‘정체’를 감출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아, 도대체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

김대환 노동부장관은 1949년에 대구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공부를 잘했다.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과 대구 계성고 동기다. 1968년에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이정우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이 그의 동기다. 그리고 1977년에 같은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인 1978년 3월에 불과 29살의 젊디젊은 나이로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가 되었다. 요즘은 박사학위가 있어도 교수가 되기 어렵지만, 당시는 석사학위만 있어도 쉽게 교수가 될 수 있었다. 그는 한참 뒤인 1985년에 영국의 옥스포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런 이력만으로 보면 김대환 노동부장관은 탄탄대로를 걸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독재에 맞서 한국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애쓴 사람으로서 김근태, 최열 등과 함께 ‘71동지회’의 회원이기도 하다. 그리고 노동부장관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진보적 학자로 손꼽혔던 사람이다. 특히 1950년대 한국 경제에 관한 그의 연구는 유명하다. 이런 연구를 통해 그는 강력한 재벌 개혁론자가 되었다. 그의 주장은 ‘재벌 개혁의 핵심은 재벌체제의 해체’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한국의 재벌이 가장 싫어하는 소리를 가장 강력하게 외치고 다닌 사람이 바로 김대환 노동부장관이었다.

김대환 노동부장관의 사회활동 경력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가 2002년 12월에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2분과위원회 간사에 임명되었을 때, 관가에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몰라 우왕좌왕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진영에서 그는 아주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1992년에 학술단체협의회 공동의장으로 활동했고, 1994년에서 1996년에 걸쳐서 참여연대의 정책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가 노동부장관이 되었을 때, 진보적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기대가 컸던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10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는 그를 회원에서 제명하자고 결의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예 시민사회에서 그의 해임을 요구하고 나서기에 이르렀다. 이유는 같다. 노동부장관이 노동자를 보호하기보다 사용자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코노미스트> 2003년 1월 7일호는 그를 아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를 ‘가난한 사람 편에 서고 개혁 마인드가 투철한 사람’이라고 말한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는 결과적으로 굉장히 심각한 오보가 되고 말았다.

김대환 노동부장관의 반노동자정책이 노동운동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킨 가운데 김태환 한국노총 충주지부장이 레미콘차에 깔려 머리가 박살나서 죽는 참혹한 사고가 일어났다. 6월 14일 충주시 앙성면의 사조레미콘 앞에서 회사측이 고용한 대체근로 레미콘차의 기사가 일으킨 사고였다. 죽은 김태환 지부장은 올해 39살의 창창한 나이였고, 가해자인 최모씨는 25살의 더욱 창창한 나이였다.

김태환 지부장은 왜 죽었는가? 그의 죽음은 이른바 ‘특수고용직’으로 분류되는 레미콘 지입차주들의 임금단체협약과 노동자 신분 인정을 요구하는 집회에서 일어난 참담한 사고였다. ‘특수고용직’이란 계약형태로는 ‘개인사업자’로 되어 있어서 노동3권과 4대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를 가리킨다. 결국 비정규직 노동자의 한 형태인 것이다. 이런 특수고용직 노동자는 2004년 10월 기준으로 보험설계사 206,676명, 학습지 교사 10,000명, 골프장 경기보조원 14,000명, 레미콘 지입차주 20,000명, 방송사 구성작가․퀵서비스 배달원 등 기타 370,000명을 합해서 모두 710,000명에 이른다

비정규직은 한국 경제의 수치이자 약한 고리이다. 그런데 이런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가 이미 800만명을 훌쩍 넘은 상태이다. 이런 사회가 질적으로 성숙하기를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나무에서 물고기를 찾는 것과 같다. 가족까지 헤아리면 1000만명이 넘는 사람들, 쉽게 말해서 전체 인구의 1/4 정도가 혹독한 비정규의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갈등의 골이 깊어지지 않으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것이다. 양극화가 격화될수록 사회해체의 위험은 더욱 커지게 된다. 이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무엇보다 양극화를 막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모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비정규직의 삶을 개선하는 것은 분명히 가능하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이미 바닥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부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이것이다. 노동부는 노동‘착취’부나 노동‘관리’부가 아니다. 노동부는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고, 그를 통해 이 사회의 질적 성숙을 꾀해야 한다. 그러나 김대환 노동부장관은 이런 요청에 대해 ‘모르면 용감해진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알아서 비겁하다’고 해야 하나? 도대체 그가 아는 것은 무엇일까?

김대환 노동부장관은 노동운동에 대단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이것도 그가 노동부장관이 된 뒤에 드러난 ‘정체’이다. 그는 “노동운동이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것이 뭐가 있느냐”고 말했다. 나는 그가 학단협 공동의장이었다는 사실을,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아니, 나는 그가 교수였다는 사실조차 믿을 수가 없다. 김태환 지부장의 죽음과 관련해서 김대환 노동부장관은 “나와는 무관한 사건이다.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일어난 사건이다”고 또 다시 망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사람이라는 사실마저 의심하게 하는 망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코노미스트> 2003년 1월 7일호는 그를 아는 사람들이 그를 ‘철저한 원칙론자로 충분히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로 여긴다고 보도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사실은 그를 몰랐던 것이다. 그가 노동부장관에 임명되고 사흘 뒤에 김진균 선생이 암으로 세상을 뜨셨다. 노동자들은 선생을 ‘민중의 스승’으로 불렀다. 김대환 노동부장관도 문상을 왔다. 그러나 그는 너무도 빠르게 선생의 삶을 잊은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가 선생의 문상을 와서는 여러 선배, 동료, 후배들로부터 격려를 받았던 일이 참으로 어이없게 느껴진다.

김진균 선생은 돌아가시기 두 달 전에 암의 고통에 시달리면서 ‘장례위원 명단이 신문 광고에 나올 때마다 소름이 끼친다’는 제목의 짧은 글을 썼다. 노동자들이 여전히 죽음으로 저항해야 하는 이 사회의 척박한 상황을 비판한 글이다. 이 글은 내가 편집을 해서 올 2월에 문화과학사에서 발간한 선생의 유고집인 <불나비처럼>이라는 제목의 책에 실렸다. 이 글의 두 귀절을 김대환 노동부장관에게 전해주고 싶다.

비정규직을 철폐하라는 절규, 그리고 손해배상청구를 철회하라는 피맺힌 절규에도 사회의, 국가의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한국 사회가 사람 목숨을 이렇게 가볍게 대접하는가? 살아 있어서 절규하는 이야기를 왜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는가? 우리나라가 어느 지경까지 추락하고자 하는 것인가?

홍성태(정책위원장, 상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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