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위원회 칼럼(lb) 2005-04-18   1114

<안국동窓> 과연 누가 무식해서 용감한가

지난 14일,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의 비정규직 법안에 대한 의견표명이 있었다. 그동안 인권위에서는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고용의 불안정성과 심각한 차별대우, 노동3권 행사에서의 제약 등 노동인권에 있어 심각한 훼손을 받고 있는데 주목,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노동인권의 보호와 차별의 해소가 우리 사회의 중요한 사회적 과제라고 판단해” 비정규노동전문가들로 <비정규직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하여 지난 2년 동안 운영하면서 비정규 노동자들의 차별 실태와 이의 극복 방안에 대해 심도 깊은 연구와 공청회 등을 진행하였다. 이번 의견 표명은 바로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인권위 의견의 핵심은 조영황 위원장의 모두 발언에 잘 담겨져 있다. 바로 “비정규직이 결코 고용의 일반원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따라서 “비정규직은 고용형태에서 예외적으로,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비정규직 근로가 제한적으로 인정된다고 해도 이들에 대한 근로조건은 정규직과 근본적으로 다를 수 없으며” 그러므로 “차별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것이다.

이번 인권위의 의견 표명은 우리 사회 임금노동자의 절반을 훌쩍 넘겨버린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남용 규제와 차별 해소에 대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원칙을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인권위의 입장에 대해서 비정규 노동자 보호의 최고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노동부 김대환 장관이나 비정규 입법안 관련 국회 논의의 책임을 지고 있는 열린우리당 이목희 의원이 보인 반응은 한심한 수준이다. 즉흥적이고 원색적인 비난 일색이다.

극언으로 일관된 발언의 요지는 “단세포”, “무지”, “월권”, “황당무계” 등의 단어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한마디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것이다. 조 위원장이 인권위 입장 발표가 최근 국회에서 진행 중인 노사정 대화에 영향을 미칠 것을 고민한 듯 “우리 위원회의 입장에 이견을 가지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지만, “위원회도 고심하였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드리며”, “2년을 꼬박 고민한 결과,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우리가 지향하지 않으면 진정한 사회발전은 없다는 말에 힘을 싣지 않을 수 없다”며 고뇌어린 발언을 한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김대환 장관과 이목희 의원의 발언 수준은 대거리를 할 가치조차 없다는 게 중평일 테지만(김대환 장관의 말을 빌리면 “지금은 바쁘니까 그냥 가겠다.”), 그래도 인권위가 비정규 관련 법안에 대해 의견 표명을 한 것이 과연 월권인지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김대환 장관은 특히 이번 문제에 관해 인권위가 “인권위에는 비정규 보호와 관련된 전문가가 없다” 면서 “비전문성에 대해 찔리는 바가 있었는지 권고는 하지 못하고 의견 제시를 하는데 그쳤다”는 히스테리컬한 반응까지 보이며 불쾌감을 숨기지 못했다.

김장관이 말하는 이른바 ‘비정규 보호와 관련한 전문가’는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인권위 <비정규직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하고 있는 노동법 전공 교수, 노동 전문 변호사, 노동 경제학자, 비정규 관련 연구자들은 뭐라고 칭해야 할까. 사실상 ‘무늬만 보호법안’이라는 비난이 쇄도하는 ‘비정규 보호’법안을 낸 ‘노동부 비정규대책과 공무원들’이 김장관이 말하는 소위 ‘비정규 전문가’인가. 아니면 노동부의 법안에 찬성의견을 가진 소위 노동법 전공교수, 노동전문 변호사, 노동경제학자, 비정규관련 연구자들을 말하는 것인가.

노동부의 의견에 찬성하는 그룹은 전문가이고, 그에 반대하면 비전문가라는 식으로 편을 가르고 이들을 폄하한다면 앞으로 누가 노동부의 정책에 제대로 된 고언을 할 것이며 그 정책에 진심으로 힘을 보태겠는가.

열린우리당 이목희 의원의 인권위에 대한 비난도 김장관의 ‘신경질적 반응’과 다르지 않다. 이의원은 인권위 입장 표명이 “황당무계”하다며 난데없이 인권위 업무 영역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이야말로 ‘황당무계’하다.

국가인권위법에 따르면 인권위 설립의 목적은 “모든 개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고 그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구현하고 민주적 기본질서 확립에 이바지” 하는 것이다. 정규직과 동일한 업무를 하면서도 임금이나 사회보험, 기업복지 등 모든 분야에서 눈에 보이는 차별을 받고 있고 노동 기본권에서 배제되어 있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입장 표명이 인권위 업무 영역이 아니라면 무엇이 인권위의 업무 영역인가. 오히려 비정규 문제에 대해 인권위가 침묵하고 있다면, 그것을 문제삼아야 타당하다. 혹시 이의원은 비정규 노동자들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누릴 집단이 아니며 그러므로 ‘인권위 업무영역의 밖’이라고 판단한 것인가.

다른 누구도 아닌 환경노동위 소속 의원인 이목희 의원의 이같은 반응에서 우리는 감당하기 어려운 비애를 느낀다. 이의원이야말로 비정규 노동자들의 참담한 일상과 고단한 노동, 불안한 미래를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 그러나 이의원은 비정규법안이 ‘인권’의 문제가 아니고 ‘정책’의 문제라는 황당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노동자들이 생명과 맞바꾸며 지켜왔던 노동기본권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이다.

비정규 문제 해결을 외치며 생명을 걸고 투쟁했던 이들은 멀리 있지 않다. 최근만 떠올려도 이미 고인이 된 근로복지공단 계약직 노동자 이용석,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 박일수, 한진 중공업 촉탁직 노동자 김춘봉씨 등을 비롯해 . 얼마 전 동맥을 끊고 자살을 시도한 한원CC 특수 노동자 원춘희씨나 아직도 병원에서 화마와 싸우고 있는 현대 중공업 비정규 노동자 최남선씨 등의 일들이 또렷하다.

“왜 이 문제를 이 시기에 인권위가 의견 표명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비정규법안을 둘러싸고 지난해부터 노정간 대립국면이 지속되어 왔으며, 현재 국회 내의 노사정 대화가 매우 예민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상황을 십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국회에서 논의하고 있는 사안이므로 이 사안에 대해 입장을 발표하는 것은 인권위의 월권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사안은 ‘의견 표명 금지’라는 것인가. 지난 2월 임시국회에서 상임위 논의를 거쳐 본회의에서 처리한 의안만 110건에 달한다. 모든 법안은 국민의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크던 작던 영향력을 미친다. 따라서 모든 개인, 집단은 자신들의 입장을 가질 수 있으며 발표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다.

더욱이 노동부 통계만으로도 516만 명에 이른다는 비정규 노동자에 대한 ‘비정규 관련 법안’은 그야말로 국민들의 인권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안이다. 그런데도 이에 대해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독립적인 국가기구라는 위상을 가지고 있는 인권위의 입장 발표조차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월권이다. 인권 보호를 목적으로 한 인권위의 설립 취지를 무시하는 것이며, 나아가 인권위의 업무 방임을 사주하는 것이다.

이번 인권위 입장 발표가 소중한 것은 비정규직이 다수가 되어 버린 우리 사회의 비정상성에 대해 각성을 촉구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특히 비정규 보호의 직접적 책임을 가진 노동부와 국회 환노위 소속 의원들은) 인권위의 입장을 비정규직이 ‘정상적’인 고용형태가 되어 버리고, 정규직이 ‘예외적’이 고용형태로 뒤바뀌게 될 사회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인권위의 촉구를 “노동시장 선진화로 가는 과정에서 나온 마지막 돌부리”로만 치부한다면 우리 사회의 건강한 미래는 없다. 단연코 없을 것이다.

박영선 (참여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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