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위원회 노사관계 2012-07-06   1553

[언론기획] 쌍용차, ‘죽음의 행진’을 멈춰라 <2> “쌍용차 문제 해결은 ‘박정희 넘어서기’의 출발점”

 

 

참여연대와 프레시안은 6월 마지막 주부터 8월 말까지 “쌍용차, ‘죽음의 행진’을 멈춰라”라는 주제로 릴레이 칼럼을 연재합니다. 이번 칼럼기획은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에 대해 각계각층의 사회 인사들이 다각적인 시선에서 사태의 원인을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칼럼은 매주 목요일마다 연재됩니다. 앞으로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어제(7/5)는 참여연대 부집행위원장이신 홍성태 상지대 교수님의 칼럼이 실렸습니다.

본문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쌍용차, ‘죽음의 행진’을 멈춰라] 쌍용자동차 문제와 한국 사회

 

 

< 칼럼 전문 >

 

“쌍용차 문제 해결은 ‘박정희 넘어서기’의 출발점”

[쌍용차, ‘죽음의 행진’을 멈춰라 <2>] 쌍용자동차 문제와 한국 사회

 

홍성태 상지대학교 교수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가 천 일이 넘도록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동안 무려 22명의 해고노동자 및 가족이 해고의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프레시안>과 참여연대는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를 진단하는 릴레이 기고를 진행합니다. 이번 기고를 통해 여러 전문가들이 다각적인 시선에서 쌍용차 사태의 원인을 진단하고, 사회적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1.
오늘날 한국은 확실히 경제 대국이다. 국토는 세계 109위밖에 되지 않지만 경제력은 국내총생산 기준으로 세계 12위, OECD 8위의 수준이다. 그러나 삶의 질은 여전히 세계 30위 수준이고, 환경 질은 무려 세계 130위 수준이다. 노동과 자연에 대한 이중의 착취를 통해 이룬 박정희식 독재형 고성장의 문제가 여전히 한국에 만연해 있는 것이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단순히 고성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질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 이중의 착취를 당연시하는 ‘박정희 체계’를 혁파해야 한다. 한국은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 이상한 나라이다. 이명박-새누리 정권이 극단화한 이상한 나라 한국의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그 한복판에 쌍용자동차 문제가 놓여 있다.

 

경기도 평택에 있는 쌍용자동차의 해고 노동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그들의 고통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의 고통은 한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 핵심적인 과제를 너무나 아프게 제시해 주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갈수록 많은 국민들이 쌍용자동차의 해고 노동자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연대의 뜻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쌍용자동차의 해고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단지 그들만의 고통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진정한 선진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고통이다. 쌍용자동차 문제는 한국 사회의 발전에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회피할 수 없고 묵인할 수 없는 문제이다.

 

2.
나는 3년 전인 2009년 7월에 여러 교수들과 함께 쌍용자동차 공장을 방문했다. 나는 서울에서 혼자 전철을 타고 평택의 쌍용자동차 공장으로 향했다. 새로 지은 거대하고 괴이한 형태의 평택역에 내리니 역 앞에서는 땡볕 아래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을 위한 시민서명을 받고 있었다. 그 옆에서 택시를 타고 시내를 가로질러 쌍용자동차 공장으로 갔다. 시내의 차도에서는 여기저기 노란 물이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며칠 전 노동자들이 시내 행진을 할 때 경찰이 헬리콥터에서 뿌린 최루액의 자취였다. 조현오가 지휘한 경찰의 폭력적 행태는 옥쇄파업의 진압에서 참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사실 이미 그 한참 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그렇게 시내를 지나 쌍용자동차 공장에 이르러서 나는 그만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수십 대의 경찰 버스들이 그 앞을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공장 앞으로 갈 수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정도로 많은 경찰들이 배치되어 쌍용자동차 공장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다행히 경찰들은 오가는 차량들을 통제하지는 않았다. 나는 택시에서 내려 민교협, 국교협, 교수노조 등의 여러 교수단체들을 대표해서 온 교수들을 만나서 집회 준비를 했다. 우리는 집회를 열기 전에 정문 맞은편에 작은 천막을 치고 농성이 무사히 끝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을 잠시 만났다. 그 더위에 천막 아래서 자고 있던 3-4살 정도 된 아이들의 모습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이미 그곳은 어린 아이들조차 보호되지 않는 참혹한 고통의 현장이었다.

 

우리는 정문 앞에서 집회를 하려고 했으나 경찰의 제지로 옆으로 옮겨서 보도 위에서 겨우 집회를 해야 했다. 이마저도 경찰과 상당한 실랑이를 해서 어렵게 얻은 결과였다. 그런데 더욱 화가 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경찰이 문제가 아니었다. 바로 파업 반대 노동자들이 문제였다. 당시 해고 노동자들은 공장 건물을 점거하고 있었고, 파업 반대 노동자들은 공장 부지를 점거하고 있었다. 파업 반대 노동자들은 문을 잠그고 아무도, 아무 것도 공장 안으로 들이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들은 교수들이 집회를 하는 보도 맞은편 담장 쪽으로 방송 차를 옮겨서 우리가 집회를 하는 내내 우리에게 민노총 빨갱이의 사주를 받은 빨갱이 교수들이라는 저열하기 짝이 없는 색깔론 욕설을 퍼부었다.

 

작열하는 7월의 땡볕 아래 귀를 때리는 파업 반대 노동자들의 욕설 방송을 견디며 겨우 집회를 마친 교수들은 해고 노동자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 물은 들여 보내달라고 정문을 지키고 있던 파업 반대 노동자들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그들은 냉정히 거부했다. 해고 노동자들이 살고 싶으면 공장 점거를 해제하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파업 반대 노동자들에게 공장을 점거한 해고 노동자들은 동료 노동자가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일 뿐이었다. 그들은 해고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목숨이 경각에 처해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밀린 주거비와 교육비를 걱정하며 공장을 점거한 해고 노동자들을 격렬히 비난했다.

 

얼마 뒤 쌍용자동차의 해고 노동자들은 처절히 진압되었다. 경찰은 실탄 발포를 빼고 쓸 수 있는 모든 폭력을 써서 공장을 점거하고 있던 해고 노동자들을 진압했다. 마치 로보캅처럼 보일 정도로 두툼하게 무장한 경찰들이 공장 지붕으로 올라가서 해고 노동자들에게 주먹질, 발길질 등 온갖 폭력을 마구 휘둘러댔다. 그리고 이렇듯 처절한 희생을 치르고 노사합의가 이루어졌으나 여전히 실행되지 않고 있다. 고통을 견디다 못한 해고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자살이 이어졌으나 여전히 쌍용자동차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노동이라는 당연하고 필수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참혹한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저열한 사회, 이것이 한국 사회의 어두운 실상이다.

 

3.
해고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고통으로 나타나고 있는 쌍용자동차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것은 그저 정리해고의 문제일 뿐인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누구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과제이다.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여기는 사회는 누구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와 거리가 멀기만 하다. 쌍용자동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과제를 이루는 것이다. 쌍용자동차 문제는 반노동의 문제를 넘어선 반인권과 반민주의 문제이며, 한국 사회의 진정한 선진화를 이루기 위한 핵심적인 과제이다. 우리는 이러한 쌍용자동차 문제의 복합성과 전면성을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자본, 노동, 국가, 시민의 차원에서 이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보자.

 

자본은 최대 이윤의 목표를 적극 추구한다. 이 때문에 자본은 언제나 비인간화의 문제를 안고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자본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돈 사회’가 될 수 있다. ‘돈 사회’는 ‘돈이 지배하는 사회’이자 그 결과 ‘돌아버린 사회’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이른바 선진국에서는 자본의 비인간화를 막기 위한 다양한 정책과 실천이 끊임없이 실행된다. 최대 이윤의 목표에 함몰되어 비인간화의 문제를 악화시키고 ‘돈 사회’의 문제를 조장하는 자본은 타파되어야 한다. 자본은 사회의 산물이며, 사회 속에서 존재한다. 사회를 망치고 인간을 해치는 반사회적 반인간적 자본은 해체되어야 한다. 쌍용자동차 자본은 자신의 문제를 반성하고 적극 개혁해야 한다.

 

노동은 이 세상을 유지하는 직접적인 실행 주체이다. 그러나 노동은 최대 이윤의 목표를 추구하는 자본에 의해 쉽게 지배될 수 있는 사회적 약자이다. 노동이 단지 사회적 약자에만 머물러 있는 사회는 결코 누구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없다. 대다수의 사람이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에 맞서는 노동의 힘은 단결에서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쉽지 않다. 쌍용자동차 문제는 원칙적으로 올바른 노동의 단결이 현실적으로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가장 처절히 드러났던 노동의 분열을 직시해야 한다. 그 처절한 현실 속에서 노동의 단결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국가는 시장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사회를 위한 수단인 시장이 사회를 지배하면 사람답게 사는 사회는 불가능해지고 만다. 국가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국가가 사회보다 시장을 존중한다면, 국가가 시장의 약자인 노동보다 시장의 승자인 자본을 존중한다면, 그런 곳은 야수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아수라장에 가까운 곳이 되고 만다. 초강력 친자본의 이명박-새누리 정권은 국가를 참으로 저열한 자본의 도구로 만들었다. 그 결과 국토 파괴, 혈세 탕진, 부패 만연, 재벌 강화, 불평등 심화 등의 심각한 문제들이 속출했다. 쌍용자동차 문제도 그 핵심적인 사례이다. 국가의 중요성을 직시하고, 그 개혁에 힘을 모아야 한다.

 

시민은 민주주의의 주체를 뜻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시민으로 태어나고 살아간다. 그러나 시민답게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시민은 의무를 다하고 권리를 지키기 위해 애써야 한다. 동료 시민이 의무를 잘 이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의 의무를 잘 이행해야 하며,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도 동료 시민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이런 상호성의 윤리가 확립되는 속에서 시민답게 사는 사회가 형성된다. 쌍용자동차 문제는 일부 해고 노동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동료 시민들의 참담한 고통을 통해 드러난 이 사회 전체의 문제이다. 시민답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쌍용자동차 문제와 같은 반민주, 반인권의 문제에 적극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4.
한국 사회의 진정한 선진화를 위해 쌍용자동차 문제의 해결은 실로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므로 마이클 셀던과 같은 미국의 정치철학자나 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유럽의 맑스주의 철학자 등에게 이 문제를 알리고 초청해서 강연을 듣는 것도 나름대로 필요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셀던이나 지젝이 쌍용자동차 문제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을까? 그리고 그들이 과연 미국과 유럽으로 돌아가서 쌍용자동차 문제를 널리 알릴까? 이런 점에서 보자면, 더욱 더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우리가 쌍용자동차 문제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 내용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것이다. 요컨대 외부의 인사를 들여오는 것보다 내부의 인사를 내보내는 것을 더 강화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양심 경영, 윤리 경영의 풍조가 계속 강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과 자연에 대한 박정희식 이중의 착취는 갈수록 수치스러운 것이 되고 있다. 유엔 본부나 ILO 본부로 가서 세계에 쌍용자동차 문제를 알리고, 나아가 수치스러운 이중의 착취가 여전히 만연된 한국의 어두운 실상을 알려야 한다. 쌍용자동차 문제는 ‘박정희 체계’의 개혁을 위한 중대한 역사적 계기이다.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쌍용자동차의 해고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지키는 것이지만, 우리의 노력이 ‘박정희 체계’를 개혁하고 진정한 선진화를 이끄는 것으로 나아가기를 고대한다. 열심히 살았으나 참담한 최후를 맞아야 했던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더욱 더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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