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4년 04월 2014-04-07   4263

[특집] ‘자살’이라 쓰고 ‘사회적 타살’이라 읽다

특집 빈곤과 자살

특집속지

ⓒatopy

‘자살’이라 쓰고
‘사회적 타살’이라 읽다

이선희 참여사회 기자

지난 2월 26일 송파구 석촌동 지하 셋방에 살던 세 모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책상위에 놓인 봉투 안에는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쓰인 편지와 함께 70만 원이 들어있었다.

세 모녀의 죽음 이후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이분들이 기초수급자 신청을 했거나, 관할 구청 혹은 주민센터에서 상황을 알았더라면 정부의 긴급복지지원제도를 통해 여러 지원을 받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 정말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현오석 경제부총리는 “세 모녀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복지 공무원을 추가로 충원하고 국민에게 찾아가는 복지를 실현 하겠다”고 했다.

복지 사각지대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겠다는 정부의 대책은 ‘생계형 자살’을 막을 수 있을까? 막연한 안타까움을 넘어, 빈곤한 사람들의 자살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참여사회 2014-04월호

돌파구 없는 생존 투쟁의 끝 ‘생계형 자살’

‘생계형 자살’은 온전히 경제 연동적인 현상이다. 경제지표들이 나쁘면 자살률은 높게 되어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살의 통계학은 소위 ‘경기’와 자살의 거시적 상관성을 나타낸다. 한국 자본주의는 자연법칙처럼 이를 예민하게 관철해왔다.

세계 최고라는 한국의 자살률은 1998년 IMF 구제금융 시기의 기록적 증가와 2002년의 반등, 그리고 이후의 꾸준한 상승으로 달성된 것이다. 1998년의 자살자는 1997년 대비 42.6% 증가했다. 자살이 경제와 관계 깊은 사회적 사실이라는 점은 이 시기 자살자의 구성에도 나타나 있다. 모든 연령대의 자살이 늘었지만 특히 25세~44세 남성 자살자는 49.7%, 45~64세의 남성 자살자는 무려 67.8%가 늘었다. 실업자, 사업 실패자, 주식 투자 실패자 들이 폭증을 주도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후 자살률은 1999년과 2000년에 각각 -17.4%와 -8.3%로 낮아졌다. 자살이 극적으로 줄어들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이 기록적, 역사적 양상을 ‘IMF 극복·경기 활성화’ 이외의 다른 이유로 설명할 길이 별로 없다.

그러나 IMF처럼 특별한 경제위기가 아닐 때도 ‘생계형 자살’은 발생한다. 통계는 빈곤 때문에 자살에 이르는 개인과 경제의 구체적 양상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GDP, 실업률, 환율 등의 거시경제 지표와 숫자들로 가득한 통계적 상황 이면에는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현실’이 존재한다. 우리는 무슨 돈으로 학교를 다니거나 어떻게 집을 얻을 돈을 구하는가? 어떻게 ‘보통 사람들’이 돈을 융통하거나 빚을 지는가, 또는 그렇지 못하는가? 개인은 생존투쟁 앞에서 자신이 가진 사회자본을 총동원해야 하는데, 가난한 사람일수록 그런 자원은 충분하지 않다. 가난해도 돈을 빌 데가 있고, 사금융 이자율과 대부금 추심 방법이 달라지면, 그리고 실업급여 지급 기간과 급여액이 높아지면 자살률은 낮아질지 모른다.

죽음의 무게도 혼자 지는 ‘경쟁’ 사회

정부와 언론은 언제나 높은 자살률을 걱정하고 그 치유를 고민하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사회복지 공무원을 늘리고 긴급 복지지원제도를 늘린다는 정부의 태도는 ‘생계형 자살’ 앞에 무기력 하며 기만적이다. 일련의 자살사태의 배후에 있는 계층적·시대적 상황을 제대로 분석하고 진단하며 치유할 대안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로는 높은 자살률을 걱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양극화 무한경쟁을 고무·조장한다.

2012년 건강보험 심사평가원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등록된 요양기관의 우울증 진료 건수는 2007년 248만 건에서 2011년 244만 건으로 5년 동안 38.9%나 증가했다. 이는 우울증 자체가 단기간 늘었다기보다 우울증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병원이 개인의 ‘자아’를 치료하기 위한 중요한 장이 되고 있으며, 기본적인 인간·사회관계망, 즉 가족·친구·학교 등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것을 방증한다. 우울한 개인들은 주변의 친밀한 관계들로부터 구조 받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다.

오늘날 ‘자살공화국’이 된 대한민국은 ‘자기계발 공화국’이기도 하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자본주의는 본격적으로 유연화와 탈규제화, 전지구화 등으로 요약되는 ‘신자유주의적’ 변화를 겪는다. 국가는 새로운 ‘국가인적자원개발’ 정책을 형성하고, 대자본과 함께 새로운 방식으로 노동 주체를 관리하고 지배한다. 그 구체적인 양상은 ‘스펙 쌓기’에 골몰하는 대학생이나 재테크에 열중하는 직장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모든 연령대의 개인들에게 외모와 능력, 출신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경쟁’의 무기가 되고 관리 되어야 한다. 모든 계량 가능하거나 그렇지 않은 것은 타인과 끝없이 비교(당)하게 된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심화·확장이 가져다준 문화정치의 총체적 변화와 그것이 개인에게 부여한 엄청난 고난이다.

참여사회 2014-04월호
출처 : 『자살론 : 고통과 해석 사이에서』, 천정환, 2013, 문학동네
개인들의 자살생각 및 자살행동을 유발하는 경제 문제나 생활고는 ‘희망’에 대한 나름의 합리적 판단과 주관적인 심리적 정황, 그리고 위기에 처한 사람을 둘러싼 지지망의 유무 등의 구조적 요인과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소득이나 실업, 또는 부채나 경제활동 여부 같은 구체적인 경제적 요인들도 자아와 가족의 상황과 연관될 때만 의미있다.

자살은 ‘윤리적 개인-사적 관계-사회적 상황’의 연쇄 고리 위의 어느 점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해결하기 어려운 개인적인 삶의 모순과 함께 사회적 삶의 질곡이 만나는 접점들이 있고, 그것이 모두 파탄에 이를 때 자살이라는 비극이 야기된다. 삶의 지속 여부에 대한 최종 결정은 개인의 몫이다. 그러나 자살 행동의 심리적 원인이 되는 고립감에 휩싸여 있을 때, 그것을 위로해줄 타인과의 관계와 사회적 안전망이 존재한다면 자살은 제어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양극화와 무한 경쟁을 조장하는 한 ‘생계형 자살’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 빈곤과 자살의 상관관계는 저자의 동의를 얻어 『자살론 : 고통과 해석 사이에서』(천정환 지음, 문학동네)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다.

이선희 하고 많은 복 중 일복이 따라다니는 불행한 이력의 소유자. 무상급식, 반값등록금, 주거 등의 일을 하다가 루틴(Routine) 있는 삶을 찾아 『참여사회』로 옮김.

2014. 4월호 특집 – 빈곤과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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