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4년 12월 2014-12-01   1455

[역사] 1914년의 동아시아, 그리고 2014년

1914년의 동아시아,
그리고 2014년

 

참여사회 2014년 12월호(통권 217호)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100년 전의 동아시아와 제1차 세계대전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올해로 꼭 100년이 된다. 세계는 100주년을 회고하고 성찰하며 20세기 끝없는 전쟁의 서막을 열었던 제1차 세계대전의 기억을 기념했다. 동아시아에서는 120년 전인 1894년, 갑오년을 상기하는 학술행사가 다채롭게 열렸다. 중국과 일본은 청일전쟁을, 우리는 동학농민전쟁을 기념했다. 2014년 동아시아의 현실이 중국과 일본이 동아시아 패권을 둘러싸고 전쟁을 벌인 1894년의 상황과 흡사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만큼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전쟁을 묶은 ‘1894년 동아시아 전쟁’에 대한 조명이 활발했다.

그러나 100년 전, 중국과 일본이 참전하고 둘 다 승전국 자격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여했던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특히, 1910년대를 무단통치시대로만 이해하는 한국사적 인식에 갇힌 우리는 세계사는 물론 동아시아사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갖는 의미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했다. 그 시절 한국인은 일본으로부터 들어오는 신문을 통해 세계대전을 읽었으며, 중국을 둘러싸고 서구열강과 일본이 벌이는 치열한 외교전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는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때맞춰 3.1운동을 일으켰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패전국에만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전후 세계 질서 재편 과정에서 독립의 의지를 알리고자 모의한 것이었다. 2014년의 우리는 1914년의 조선인보다 더 폐쇄적인 세계 인식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3.1운동의 주모자들이 민족자결주의가 패전국에 적용되는 걸 제대로 모르고 독립선언과 시위를 준비했다는 허무맹랑한 비판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외교전의 달인, 일본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참전을 선언하고 중국 산둥성을 점령한 뒤 독일 이권을 접수했다. 이어 일본 해군은 독일령인 적도 이북의 여러 섬들을 점령했다. 반면, 중국은 처음에 중립을 선언하고 일본에는 산둥성에서 나갈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중국에 ‘21개조 요구’를 들이밀었다. 이 요구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침략하고 지배하는 과정을 연상시킬 정도로 중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내용들이었다. 서구 열강은 아연 긴장했고 중국은 굴욕적인 요구를 수용했다.

유럽에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동아시아로 이어져 중국을 둘러싸고 일본 대 영국·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세력이 갈등 구도를 형성해갔다. 동아시아를 무대로 한 열강의 외교전은 종전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치열해졌다. 일본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고 중국에는 참전을 종용했다. 중국은 1917년 8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그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1억 4,500만 엔의 차관을 제공받았다. 1917년 4월에 참전한 미국은 유럽에서의 전쟁에 몰두하기 위해 일본과 랜싱-이시이 협정을 체결하여 중국 내 일본의 특권적 지위를 인정했다. 이처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동아시아에서의 열강의 대립과 갈등은 일본을 주축으로 조정되었고, 모든 협상의 결과는 일본의 입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끝나지 않는 전쟁
제1차 세계대전은 4년여 간의 전쟁 끝에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1919년 1월부터 열린 파리강화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한 회합이었다. 일본은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와 함께 최고이사회의 일원으로 모든 회의에 참여하며 옛 독일령인 산둥성과 적도 이북 여러 섬에 대한 지배권을 확정하기 위한 외교전을 펼쳤다. 중국 대표단은 ‘21개조 요구’는 강압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이며, 산둥성도 마땅히 중국에 반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세는 일본 편이었다. 파리강화회의는 산둥성의 독일 이권을 일본에 넘길 것을 결정했다. 중국인은 분노했고 전국적으로 2개월에 걸쳐 5.4운동을 일으켰다. 결국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중국 대표단은 강화조약에 대한 조인을 거부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3·1운동과 5·4운동으로 일본의 국제적 이미지는 실추되었고, 동아시아 질서 구상에도 차질이 생겼다. 파리강화회의 기간 중에 발발한 3·1운동과 5·4운동은 일본 제국주의가 항일의 높은 파고를 넘어 조선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고, 중국을 지배하려는 야망을 실현시키는 일이 결코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 동아시아에 몰고 온 파고가 2014년, 오늘의 시점에서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건 한·중·일 외에 미국이라는 변수가 더해지면서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지고 있는 격동의 동아시아 현실 때문은 아닐까?

 

김정인

참여연대 창립 멤버, 현 참여연대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하였다. 한국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궤적을 좇는 작업과 함께 동아시아사 연구와 교육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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