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4년 12월 2014-12-01   1126

[듣자] 슬픔의 위대한 힘, 고르디에바 ‘아다지에토’

 

슬픔의 위대한 힘,
고르디에바‘아다지에토’

 

 

이채훈 MBC 해직 PD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는 19살 연하의 알마 신틀러와 결혼할 때 아름다운 <아다지에토Adagietto>를 선물했다. 오케스트라의 현악기와 하프만으로 꿈꾸듯 노래하는 이 곡은 두 사람의 사랑의 기념비로 남아 있다. 이 곡의 느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까? 부드럽고, 따뜻하고, 애틋하고, 안타깝고…. 사랑하는 마음처럼, 음악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있다. 작곡자 말러의 말이다.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작곡한다. 말로 할 수 있다면 그냥 말로 하지, 왜 구태여 작곡을 하겠는가?”

 

<아다지에토>는 교향곡 5번의 네 번째 악장인데, 무척 아름다워서 별도로 연주되는 일이 많다. 미국에서는 1963년 암살당한 케네디 대통령을 추도하는 음악으로 TV에 등장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이 곡을 들으면서 그를 기억하고 슬퍼한다고 한다. 이 곡은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에 삽입되면서 더 유명해졌다. 열병에 걸린 예술가 구스타프 아센바흐가 미소년 타지오를 애틋한 눈길로 바라볼 때 이 곡이 흐른다. 죽음을 예감하는 예술가의 안타까운 사랑이다. 

 

참여사회 2014년 12월호(통권 217호)

1994년 릴리함메르 동계 올림픽에서 베토벤의 <월광>에 맞춰 연기하고 있는 고르디에바와  그린코프.

 

피겨 여왕 에카테리나 고르디에바도 말러의 <아다지에토>에 맞춰 연기했다. 1996년 미국 전역에 생중계된 이날 공연의 제목은 <삶의 찬가Celebration of a Life>. 24살 고르디에바는 혼자 춤을 춘다. 손짓 하나, 몸짓 하나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이 어려 있다. 관객 모두 눈물을 흘렸고, 그녀 자신도 눈물을 흘렸다. 공연이 끝난 뒤 그녀는 말했다. “세르게이가 함께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가 곁에 있기 때문에 저는 두 배로 힘을 낼 수 있었어요.” 

 

세르게이 그린코프(1967~1995)는 누구일까? 그는 고르디에바의 모든 것이었다. 1984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에서 두 사람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세르게이는 15살, 고르디에바는 11살이었다. 고르디에바와 그린코프가 호흡을 맞춘 음악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가 작곡한 <그리스인 조르바>였다. 어린 두 사람의 완벽한 연기는 놀라웠고, 특히 고르디에바의 앳된 모습은 세계인의 화제가 됐다. 세계의 스포츠 캐스터들은 입을 모았다. “고르디에바는 4살 때 스케이트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구소련에는 이 꼬마에게 맞는 스케이트가 없어서 양말을 여러 겹 신어야 했다지요?” 

 

세계 피겨 스케이팅의 미래는 두 사람의 것이었다. 그들은 1988년 캘거리, 1994년 릴레함메르Lillehammer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네 차례의 세계 선수권대회를 석권했다. 고르디에바는 해가 갈수록 키가 컸고, 그와 비례하여 세르게이에 대한 사랑도 쑥쑥 자라났다. 1988년 새해 축하 공연에서 첫 키스를 나눈 두 사람은 1991년 4월 드디어 결혼했다. 이듬해 9월엔 딸 다리야가 태어났다. 두 사람은 사랑했고, 세상은 그들의 것이었다. 그들은 젊음과 행복의 절정에 서 있었다.   

 

세르게이의 죽음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1995년 11월 20일, 뉴욕 플래시드 호수에서 연습하던 그는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르게이는 28살, 고르디에바는 24살이었다. 고르디에바는 그가 없는 세상을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왜 여전히 살아 있는 걸까? 세상은 어째서 그대로 돌아가고 있을까?  

 

사랑하던 세르게이는 사라졌지만 젊은 그녀는 숨 쉬고 있었다. 그리고 세 살 난 딸 다리야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석 달 뒤, 그녀는 빙판 위로 돌아왔다. 죽은 남편에게 바치는 공연이었다. 구스타프 말러의 <아다지에토>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였지만 세르게이가 곁에 있는 것만 같았다. 세르게이는 빙판 위에, <아다지에토> 선율 속에 살아 있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이날 공연은 TV로 생중계됐고, 고르디에바는 그날의 기록을 <나의 세르게이 : 러브 스토리>란 책으로 남겼다. 

 

인간은 슬픔을 통해서 고결함을 얻는 걸까?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운 말러의 <아다지에토>는 고르디에바의 <삶의 찬가>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 슬픔의 위대한 힘이다. 삶은 계속된다. 그녀는 1998년 <다리야를 위한 일기>를 펴냈고, 새 남편과 함께 스케이터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참여사회 2014년 12월호(통권 217호)

 

● 고르디에바 <아다지에토>, 이 음악을 듣고 싶다면? 

유투브에서 Gordeeva Celebration을 검색하세요. 

http://youtu.be/7vbIGjZXeAQ 

● 1984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에서 국제무대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고르디에바와 그린코프.

두 사람의 연기를 더 보고 싶다면? 유투브에서 Gordeeva Grinkov를 검색하세요.

http://youtu.be/AF98R57oQ9s 

 

이채훈 

MBC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클래식 음악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2012년 해직된 뒤 ‘진실의 힘 음악 여행’ 등 음악 강연으로 이 시대 마음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저서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 『우리들의 현대 침묵사』(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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