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4년 08월 2014-08-04   1321

[특집]여가는 삶의 목표다

특집 일과 휴가

 

여가는 삶의 목표다

 

 

박홍순 사회학·인문학 작가

 

참여사회 2014년 8월호 (통권 213호)

 

여가와 게으름을 악덕으로 여기는 사회

 

우리는 여가를 게으름과 연결시키고 곧바로 악덕의 딱지를 붙이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습관적으로 『이솝우화』에 나오는 베짱이를 떠올린다. 원래는 매미 이야기인데 어쩌다 한국에서 베짱이로 돌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름에 노래하고 즐기느라 겨울을 대비 못해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작 이솝이 고대 그리스 노예제 사회의 인물이라는 점, 적지 않은 내용이 은연중에 노예제 논리를 대변하는 점은 까맣게 모른다.

 

서양과 동양, 시대를 막론하고 여가나 게으름을 악덕으로 여기도록 강제 받아 왔다. 서양의 경우 막스 베버가 강조했듯이, 종교개혁으로 강화된 근면한 노동윤리가 자본주의 발전을 가능케 한 가장 중요한 원동력으로 여겨졌다. 종교개혁을 대표하는 루터와 칼뱅은 게으름은 죄악이고, 노동에 힘쓰는 것이 신의 계시라고 강조했다.

 

동양사회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낮잠을 즐기는 제자를 크게 나무란다. “썩은 나무로는 조각을 할 수 없고, 더러운 흙으로 친 담은 흙손으로 다듬을 수 없다.” 낮잠, 즉 게으름을 피우는 자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썩은 나무고, 더러운 흙에 불과하다. 실용적 학문을 주장한 관중이나 법가의 한비 역시 유가와 많은 점에서 이견을 가졌지만 적어도 게으름을 경멸하는 데 있어서는 한 목소리를 냈다.

 

현대사회에 와서는 더욱 극단으로 치닫는다. 동작 낭비를 제거해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일을 하도록 고안된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과 포드주의가 기업과 사회의 운영원리로 뿌리내리면서 노동윤리가 더 강화되었다. 이로 인해 기업 입장에서는 생산성이 증가했지만, 노동자 입장에서는 노동 강도가 대폭 강화되었다. 니체가 사람들이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허둥대며’ 일해야 하는 현실을 개탄한 말은 경청할 만하다.

 

“오늘날 휴식을 부끄러워하며, 한참 생각에 몰두할 경우엔 양심에 문제가 있다는 핀잔을 들을 정도다. 그들은 한쪽 손목에 시계를 찬 상태에서 생각에 잠긴다.” 휴식을 부끄러워하고 손목시계를 보며 생각하는 근대인은 차라리 순진하다. 휴식을 경멸하는 현대인은 손목시계만이 아니라 다른 손에는 패스트푸드, 탁자에는 노트북을 펼쳐놓아야 덜 불안해하고 비로소 직성이 풀린다.

 

일을 위한 여가가 아니라 여가를 위한 일

 

현대사회에서 노동조합운동의 발달과 함께 일정하게 휴가와 여가 개념이 생겼다. 러셀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지적하듯이 현대사회의 조건이 여가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현대 기술은 여가를 소수 특권 계층만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공동체 전체가 고르게 향유할 수 있는 권리로 만들어주었다. 현대 세계에서 근로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다.”

 

과학기술은 생산력 증가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아마 백 년 전에 비해 생산력은 적어도 수십 배 이상 향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물가에 대비한 실질임금 상승은 몇 배 정도에 불과하다. 노동시간은 어떠한가? 생산력 발전을 고려하면 최소한 몇 시간은 줄고 휴가일수도 몇 배 이상 늘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8시간 노동제를 기본으로 한다.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 7시간 노동제로 단축된 것이 고작이어서 아예 변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가가 대폭 늘어났어야 정상임에도 계속 근면한 노동만을 강조하는 근로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에 불과하다. 지배세력은 개미와 베짱이의 중간에 해당하는 곤충이나 동물도 있다는 걸 도무지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설사 여가를 누리더라도 일을 위한 ‘재충전’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주어진 일을 더 열심히 잘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를 보충하는 기간 정도로 여긴다. 여전히 여가가 일에서 독립해 있지 못하고 일을 위한 보조수단으로 방치된다. 러셀은 “다수의 노동이 가치 있는 이유는 일이 좋아서가 아니라 여가가 좋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을 위한 여가가 아니라, 반대로 더 많은 여가를 위해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 여가를 통해 편안함과 즐거움을 누리는 삶 자체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이제 노예의 도덕을 거부하고 게을러지자고, 여가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만큼의 일을 하는 사회를 만들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가, 발상의 전환과 교육이 필요하다

 

여가를 바라보는 시각은 삶에 대한 가치관 문제다. 장자는 『장자』에서 크지만 곧지 않은 나무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논리를 비판한다. “당신은 어째서 넓은 들에 그것을 심어 놓고, 하는 일 없이 그 곁을 왔다 갔다 하거나 그 아래 어슬렁거리다가 드러누워 낮잠을 자지 않소?” 효율성·근면성 논리에서 벗어나 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자라는 장자의 지적은 개인적 취향이 아니라, 사회의 지배적 가치에 대한 도전이었다. 아마 장자가 현대인의 노동 강도와 이를 강제하는 노동윤리를 접했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근면성과 효율성 여부가 절대 기준이 된 현대사회에서 장자의 문제제기는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일차적으로 여가 확대를 위해 노동시간을 단축하려는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노동시간은 점심시간을 포함하여 하루 8시간으로 엄격하게 제한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모든 사업장에서 잔업과 철야를 법적으로 금지시키고 휴가 일수를 대폭 늘려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6~7시간 노동제로 전환하여 노동이 삶의 거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로 바뀌어야 한다.

 

여가 시간의 확대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막상 주5일제 근무로 주말 휴일이 늘어나고, 휴가 기간이 돼도 무엇을 할지 막연해 하고 습관적으로 시간을 보낸다. 주말은 부족한 잠으로 시간을 때우거나 가족과의 외식으로 체면치레를 한다. 자녀가 중·고등학생이 되면 공부에 방해된다며 여행도 사라진다. 그래서 러셀은 “여가의 현명한 이용은 문명과 교육에 의해 가능하다. 평생 장시간 일해 온 사람이 갑자기 일을 하지 않으면 따분해질 것이다”라고 한다. 우리는 여가를 단지 시간의 문제로 생각한다.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알차게 즐길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정작 상당한 여가 시간이 생기면 3~4일 정도는 어떻게 때운다 하더라도 일주일 이상의 시간에는 오히려 불안해한다. 정년퇴직 이후에는 더 심각하다.

 

여가가 노동을 위한 재충전이 아니라 삶의 즐거움을 충만하게 만드는 과정이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 등산이나 자전거 등 스포츠·레저 교육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주로 주말에 잠시 시간을 내서 즐길 수 있는 종류의 활동이다. 일정 기간 지속적으로 정신과 몸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활동을 체계적으로 습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회적으로 평생교육 시스템과 프로그램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인간의 삶은 특정 직업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전인적全人的 인간이기 위해서는 직장인이나 사업가이면서 동시에 예술가나 학자, 혹은 사회활동가일 수 있어야 한다. 정부의 지원 하에 대학과 시민단체, 지역주민의 결합 방식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취미 활동은 물론이고 미술·음악·무용 등 예술 활동, 나아가서는 학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과정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봉사활동을 비롯하여 공적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통로도 있어야 한다. 만약 그럴 있으면 인간은 다시 시간을 자신의 의지로 조절함으로써 시간과의 능동적 관계를 다시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박홍순

글쓰기와 강연을 통해 인문학을 넓히는 활동을 해왔다. 저서로 『미술관 옆 인문학』,『사유와 매혹』, 『저는 인문학이 처음인데요』,『장자처럼 살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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