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4년 11월 2014-11-03   1048

[만남] 황금박쥐는, 있다 – 김동한 회원

황금박쥐는, 있다

김동한 회원

호모아줌마데스

사진 Nina ahn

1967년 어느 동네. 손에 막대기를 든 아이들이 우르르 골목 안으로 쏟아져 나온다.  

“어디 어디 어디에서 오느냐 황금박쥐~ 빛나는 해골은 정의의 용사다~”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녀석들이 향하는 곳은 장독대. 장독대 끝에 서서 하늘로 뛰어오르는 아이들의 목엔 보자기가 하나씩 묶여있다. 그 기세에 호응이라도 하듯 바람이 불어와 보자기가 한껏 부풀면 아이들의 가슴도 덩달아 달아올랐다. 등 뒤에서 펄럭이는 보자기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그 시절. 동네 골목을 지키던 그 많은 영웅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참여사회 2014년 11월호 (통권 216호)

날개를 달아주세요

2013년 참여연대 회원 송년의 밤. 그는 ‘황금박쥐상’을 받았다. 황금박쥐상이 뭐지, 하는 순간 박쥐의 날개와 ‘날개를 달아주세요’가 겹치며 답이 나왔다. 그렇다. 그는 참여사회 한편에 늘 실리는 ‘날개를 달아주세요’ 코너에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회원이다. 

“황금박쥐는 만화영화인데, 지금 여기 계신 분들은 아마 못 보셨을 거예요, 예전 만화라서. 황금박쥐는 스파이더맨이나 그런 영웅들처럼 사람들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 갑자기 나타나서 도와주거든요. 아마 제가 통보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서 종이를 놓고 가곤 하니까 참여연대에 계신 분들이 그런 별명을 떠올리신 거 아닐까요?”

그가 날개로 달아주었던 건 A4용지. 1년 하고도 12달, 날개를 달아달라는 코너에 빠짐없이 실리는 품목이다.

“『참여사회』를 읽다가 물품 후원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품목들을 자세히 보니 컴퓨터 관련된 제품들은 뭔지 잘 모르겠고 ‘종이’ 정도라면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종이를 취급하는 지인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이곳저곳을 수소문한 끝에 운 좋게도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곳을 발견했어요. 그 이후론 여유가 생길 때마다 종이를 구입해서 차에 싣고 참여연대로 달려옵니다.”

무게가 많이 나가는 종이는 택배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그는 자신의 차로 직접 참여연대까지 배달을 한다. ‘날개’를 달아주기 위해 그가 들인 노력과 시간들이 따스하기만 하다.

“참여연대를 보면 정부나 기업들로부터 재정적 독립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게 보여요. 『참여사회』하나만 봐도 다른 시민단체들 소식지는 종이도 하얗고 표지는 코팅도 되어 있고 안에 내용들도 칼라 인쇄를 하는데, 여기는 그렇게 할 형편이 안 되는 거잖아요. ‘날개’도 새 것만이 아니라 쓰던 것도 받더라고요. 남들이 안 쓰는 물건 갖다가 쓰고 하는 모습이 절약하는 것 같아 좋아 보이기도 하고 때론 안쓰럽기도 하고 그래요.”

그의 따스함이 자꾸만 나를 숙연하게 만드는 동안에도 솔직하다 못해 순박하기 그지없는 그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인터뷰를 하자고 하니까 이것저것 기억도 떠올리게 되고 참여연대에 대해서 물어볼 것 같아서 공부도 좀 하고 왔어요.”

공부요? 그의 솔직함 앞에서 빵 터져버린 나의 웃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럼 공부도 하셨으니 모범답안을 기대한다고 하자 손사래를 치며 쑥스럽게 웃기만 하던 그. “제가 2008년에 가입했는데요, 참여연대의 공식행사에 참여한 건 서울광장조례개정운동 때였어요. 시민들이 서명한 용지를 서울시에 전달하는 행사였는데 저도 그 종이뭉치들을 함께 들고 날랐죠. 이 사회에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그때의 기억 때문에 ‘날개’ 품목 중에 종이가 유독 그의 시선을 잡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날 손끝에 전해져오던 종이뭉치의 묵직함. 그 무게를 잊을 수 없어 그는 다시 아무 것도 적히지 않은 새하얀 종이를 들고 참여연대로 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중동이 뭔가요?

회원 가입 년도가 2008년인 걸 보니 혹시 광우병 촛불시위의 영향 때문이었나요?

“직접적인 가입 계기는 한 친구를 만나고 나서예요. 2008년에 직장 문제로 서울로 이사를 왔는데 그전까진 울산에 살았거든요. 서울로 올라오고 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 입에서 ‘조중동’이라는 생전 처음 듣는 단어가 나오는 거예요. 뜻을 알고 나서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죠.”

그 단어 하나 때문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참여연대에 가입하게 되었다는 말씀이신가요?

“제가 이래봬도 한겨레 창간독자이자 창간주주예요. 근데 친구로부터 ‘조중동’이란 단어를 들었을 무렵 저도 보수신문을 보고 있었어요. 그러니 충격을 받을 수밖에요.”

아니 한겨레 창간주주께서 왜 보수신문을???

“단순하게 민주화가 많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거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절을 겪으며 전 이제 민주화가 됐구나 하고 세상의 많은 일들을 잊고 살았어요. 친구 입에서 ‘조중동’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알게 된 거죠. 내가 생각하던 세상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걸.”

2008년은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해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그는 다시 진보매체를 보고 집회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MB를 가리켜 괜히 계몽군주라 하는 게 아닌가 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동안 제겐 주말이 없다시피 했어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주말마다 집회 현장에 다녔거든요. 아이들은 뭐 이제 다 컸고, 집사람은 함께 해주진 않지만 심정적으로 동의해주죠. 어찌 보면 제가 우리집안 대표로 집회에 나간다고 할 수도 있겠죠.”

이 사회의 부조리와 불의함 때문에 평범한 이들의 주말마저 전혀 평범하지 않게 흘러간다.

“검찰청, 헌법재판소 등에서 1인시위도 많이 했어요. 어떨 땐 지방까지도 가서 하고. 많은 이들이 동참하는 대형 집회도 중요하지만 1인시위도 그것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봐요. 시민들이 정부기관 앞에 가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면 그것을 바라보는 해당 조직의 내부 사람들도 뭔가 느끼고 깨닫는 게 있지 않을까요? 또 ‘고발자 정신’이라고 해야 하나,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말하는 행동 그 자체만으로 무척 의미가 있는 거고, 지나는 시민들에게 용기를 줄 수도 있고. 그래서 전 앞으로도 1인 시위를 계속해 나갈 겁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문득, 어린 시절 그는 어떤 아이였을까 싶었다. 그도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골목을 뛰어다니며 황금박쥐 행세를 하던 개구쟁이였을까?

“어릴 때요? (웃음) 순한 아이였어요. 대학생 때도 학생운동 안 했어요. 79년도에 전투경찰들이 학교로 쳐들어왔던 날에도, 건물 옥상에 올라가 돌을 집어 들긴 했는데 못 던지겠더라고요. 겁나고 무서워서.”

마음을 마음으로 갚다

세상이 겁나고 무섭기만 하던 그도 살벌한 일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노동자 대투쟁과 대통령직선제를 요구하는 6월 항쟁이 있었던 1986년, 그는 울산에 있었다. 

“1986년, 같은 회사에 다니는 수만 명의 노동자들과 연대해서 시위를 했어요.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벌이는 시위였죠. 당시 함께 했던 이들 대부분은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었고 전 사무직이었는데, 그 일 때문에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회사에서 찍혔죠. 살벌했어요.”

돌 던지는 것보다 그 일이 더 무서웠을 것 같은데 왜 그러셨어요?

“제가 군대에 있을 때 박정희가 죽었어요. 대한민국 군인 전부가 문상을 가야했죠. 모두 가도 한 사람은 남아서 내무반을 지켜야 하는데 그때 소대장이 저를 지목하는 거예요. 군대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쫄병인 날 말이죠. 고참들은 전부 문상 가고. 소대장은 나름 절 배려해 준 거예요. 이상하게도 그 기억이 아직도 두고두고 남아요.”

누군가한테 배려 받았던 그 마음이 때론 따스하게 때론 뭉클하게 남아서 나도 누군가에게 갚을 수 있길 바라며 살았다. 두려웠지만 수만 명의 노동자들과 손잡고 거리에 섰던 것, 틈날 때마다 종이를 사 들고 참여연대를 찾는 건, 바로 그 마음 때문이다.

“제 주위를 둘러봐도 세상이나 사회의 부조리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전히 조중동을 보고 있죠. (깊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 참, 사람을 바꾸는 건 어려워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그런 얘기는 거의 안 해요.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나가는 건 객관적인 이론을 가지고 말이나 글로 설득해야 하는 건데 그런 일을 제 대신 해달라고, 그리고 그런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참여연대에 이렇게 종이를 가지고 오는 거예요. 종이 갖다 주고 시위에 참여하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정도네요.”

은퇴계획을 묻자 취미인 등산과 마라톤도 더 열심히 하고 싶고 후원도 더 하고 싶고, 노인들을 위한 일들도 해보고 싶다던 그가 가장 하고 싶은 걸로 꼽은 건 바로 이것이다.

“근데 그 무엇보다 사회의 문제들을 바로 잡는데 더 많은 힘을 보태고 싶어요. 사회운동을 몸으로 하고 싶어요.”

1시간 남짓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면 한 사람의 세상과 삶에 대한 자세가 내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경험을 하곤 한다. 시종 담담하고 소박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주던 그 앞에서 내 마음이 자꾸만 숙연해졌던 건 그가 살아온 길이 간직하고 있는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서 꼭 하나만 바꿀 수 있다면 무얼 바꾸고 싶으세요?

이 질문에 그는 한참이나 답을 하지 못했다. 이 세상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일들이 어디 한둘인가. 쉬이 대답을 못하는 그의 마음을, 쉬이 떨어지지 않는 그의 입을 하릴없이 바라봐야만 하는 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차별이요.”

어렵게 답을 내밀던 그의 눈가에 살짝 물기가 서리는 듯싶었다. 그 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듯싶기도 했다. 그는 차별이라는 단어 하나를 입 밖에 내뱉고는 별다른 설명도 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단어 위에 세상이 올려놓은 무게는 얼마나 무거운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장애인과 정상인. 일일이 나열할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기준에 의해 갈라지는 세상과 위계화 되는 인간의 삶. 이 혼돈의 세월의 끝에 어쩌면 우리는 우리를 규정짓는 단 하나의 이름조차 잊게 될 지도 모른다. ‘사람’이라는 우리의 첫 번째 이름을 말이다.

참여사회 2014년 11월호 (통권 216호)

골목에서 세상으로 나오다

서울광장조례개정을 위해 시민들이 서명한 용지를 옮기던 날. 그의 손에 들려진 것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이름 하나 내주며 세상을 바꿔보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 날개가 달린 옷이나 특수한 능력 따윈 지니지 못한 지극히 평범한 이들의 이름이 하얀 종이 위에 끝도 없이 적혀 있었다. 영웅인 아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다른 이의 이름 밑에 나란히 적어 넣는 일 뿐이었다. 하나의 행렬을 이루며 적힌 10만 2,741명의 이름을 마주한 그 순간, 그의 손에 전해진 묵직함은 종이의 무게가 아니었다. 그것은 평범한 이들이 자신의 이름 세 글자로 세상을 향해 외치는 거대한 함성의 무게였다. 

그 무게를 온몸으로 기억하기에 그는 오늘도 종이가 가득 든 상자를 차에 싣는다. 더 이상 목에 보자기를 매지도 손에 막대기도 들지 않은 그. 그 누구의 눈에도 영웅으로 비칠 리 없는 그는, 그러나 여전히 악당들을 물리치기 위해 싸우고 있는 중이다. 긴 세월을 돌아 다시 돌아온 황금박쥐. 이제 그가 골목이 아닌 세상을 지키는 싸움을 시작했다.

호모아줌마데스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애 엄마. 2007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과 동시에 자원활동 시작.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백인보’라는 코너에 비정규적으로 인터뷰 글을 쓰고 있음. 특기사항 : 합기도 빨간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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