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4년 10월 2014-09-29   1240

[여는글] 가을 편지

가을 편지

참여사회 2014년 10월호 (통권 215호)

R 선생님께.

어느새 가을입니다. 건강하신지요. 그간 격조隔阻했습니다. 꼭 세월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무거운 마음의 빚, 바람이라도 쏘여 좀 덜고 오겠다며 훌쩍 떠나시더니 여름이 지났습니다. 언제 돌아오시나요.  

일전에 선생님은 “예술가로 사는 삶이란 참 고단하고 쓸쓸한 일이다”라고 말씀하셨지요. 예술과는 거리를 두고 지내며 흔히 작은 일상사에서도 쉽게 지치곤 하는 저에게도 어쩐지 그 말씀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당시 선생님은 한동안 공들여 하던 작업을 막 끝낸 뒤였지요. 그 말씀을 듣고 저는 ‘쓸쓸함’이란 아마도 어떤 일을 하든지 혼신의 열정을 쏟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심사가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일을 마친 후, 그 일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아쉬움은 여전히 남습니다. 일을 완수하기 위해 남김없이 쏟아 부었기에 생긴 그 마음의 빈자리, 그렇게 해서 생긴 자연스러운 허전함과 그 빈자리를 보고 무상함을 확인하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대개의 참된 예술가는 그 ‘참된’ 성격 때문에 평생 고독과 쓸쓸함을 벗으로 삼아야 할지 모릅니다. 물론 더러 환희와 갈채의 시간, 각광으로 조명을 받는 때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몹시 드물고 오히려 찰나적임을 봅니다. 사회의 모순이 삶의 일부가 된 예술가 자신은 종종 갈등 속에서 고통을 겪지만, 그가 작품에서 형상화한 우리 삶의 진실한 모습은 보통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위안을 줍니다. 마치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그림처럼.

R 선생님, 어디선가 가을빛 자락을 골똘하게 응시하고 계실 선생님의 모습을 그려 보자니, 오래 전에 읽은 소설이 하나 생각났습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주위 학생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그는 이를테면 축구 대신 바닷가에 나가 먼 수평선을 보거나 공상에 잠기기를 좋아 합니다. 일상에서 그는 자신의 취향과는 다른 남녀 학생들을 선망하며 가까워지려 애를 쓰지만, 이들로부터 그가 바라는 우정이나 사랑은 좀처럼 얻지 못합니다. 그는 결국 고향을 떠나 긴 방랑 끝에 시인이 됩니다. 중년이 된 그는 고향 부근의 호숫가의 유람선에서 그가 한때 친해지려 했던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춤을 추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이들을 곁눈으로 훔쳐보며 지난 시간들을 회상합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 작품이 반드시 예술가의 초상만을 그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파우스트』에 “사람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말은 보통사람 누구에게나 해당된다고 여겨졌습니다. 우리 각자는 의미 있는 무언가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기 마련인데,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회의하고 진리의 주변을 배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R 선생님, 선생님도 먼발치에서 혹 소식을 들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지난 9월 15일 참여연대는 창립 20주년 기념식을 가졌습니다. 그 자리에는 회원들을 포함하여 평소 저희를 후원해 온 분들이 참석하여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노동계, 학계, 종교계와 시민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해 온 인사들과 세월호 유가족들도 오셨습니다. 그리고 참여연대의 전 현직 임원들과 상근 활동가들도 자리를 함께 하였습니다. 이날 이태호 사무처장은 참여연대 20주년을 평가하면서 참여연대의 활동이 시지포스Sisyphos, 영원한 죄수의 화신와 유사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시지포스야말로 인간 실존의 부조리를 상징한다고 썼습니다. 참여민주사회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 온 참여연대의 전·현직 활동가들은 각자가 시지포스와 유사한 위치에 있습니다. 이들은 시지포스처럼 바위를 산꼭대기에 올려놓기 위하여 부단히 애를 써 왔습니다. 그러나 이 바위는 정상에 놓이는 순간 바로 아래로 구르기 시작합니다. 시지포스는 이를 다시 올리기 위하여 산 아래로 걸어 내려갑니다. 그 광경은 영원한 비판자의 숙명을 타고난 참여연대 활동가들의 실존적 모습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그날 기념식 자리에 계셨더라면, 참여연대의 오늘을 있게 한 전직 활동가들과 그날 기념식 주위를 분주하게 맴 돌며 진행에 힘쓰던 현직 활동가들에 공감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번 대선 때의 한 슬로건처럼 ‘저녁이 있는 삶’은 참여연대 활동가들에게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시민들의 많은 요구에 부응하느라 이는 종종 후순위로 돌려져 왔습니다. 이제 참여연대가 성년이 된 만큼 시민들의 공적 이익 대변과 함께 참여연대 활동가들도 스스로 치열함과 여유를 같이 추구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R 선생님,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곧 다시 뵙기를 소망합니다. 선생님은 참여연대에 편하게 얘기를 나눌 마땅한 장소가 없다고 말씀하시곤 하였지요. 이번에 참여연대의 공간을 대폭 바꾸었습니다. 그 콘셉트는 시민의 놀이터이자 동반자로서의 참여연대입니다. 통인 카페에 한번 오시지요. 넓고 아늑하며 분위기 좋게 바뀐 이곳에서 잊지 못할 향기로운 차 한 잔 대접하고 싶습니다. 

이석태

참여연대 공동대표. 변호사. 주변을 구경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고, 현장에서 열심히 뛰는 참여연대 식구들에게 늘 감사함과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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