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4년 10월 2014-09-29   1329

[만남] ‘그’라는 한 권의 책 – 김정현 회원

‘그’라는
한 권의 책

김정현 회원 

호모아줌마데스사진 Nina ahn

참여사회 2014년 10월호 (통권 215호)

외국인들은 동양인의 외모가 다 비슷해 보여 구분을 잘 못한다 들었다. 외국인도 아닌 난 한국 사람들의 나이가 가늠이 잘 되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면 자꾸 나이부터 가늠해보는 몹쓸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도 정작 정답률이 너무 낮아 쓸모가 없다. 그의 경우도 그랬다. 참여연대 아카데미에서 그를 만나온 것이 벌써 몇 년째인가. 언제나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을 참을성 있게 듣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떼던 그. 정돈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차분하게 몇 마디의 말로 묶어낸 후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던 그. 그래선지 그가 말을 시작하면 이상하리만치 모두 귀담아 들었다. 성우 같은 목소리와 설득력 있는 억양 때문일까? 암튼 나보다 동생이라는데 난 자꾸만 그가 큰오빠 같다. 대체 이놈의 가늠자는 언제쯤 제 역할을 하려나.

정체가 수상하다

1층 카페통인에 들어섰다. 들어서는 입구부터 카페 내부까지 확 바뀌어서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더 넓어지고 더 환해진, 그러나 아직 채 정리가 되지 않은 카페에 그가 앉아 있었다. 

“카페 많이 바뀌었죠? 어때요, 지금이 훨씬 좋지 않나요?”

그의 질문을 받으니 생각났다. 참여연대 리모델링과 관련한 일을 하는 공간개선위원회에 그가 속해 있다는 걸.

“참여연대에서 하는 일이요? 청소년TF팀이랑 공간개선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구요. 올해 들어 새로 시작한 것에는 ‘회원 월례모임’이 있는데 기획에도 참여하고 진행을 맡기도 해요. 아카데미에서 참여하고 있는 건 강좌를 기획하고 모니터링하는 느티나무지기 모임이 있고, 최근엔 가을학기 오픈특강으로 ‘휴먼 라이브러리’를 기획하고 진행했죠.”

그는 간사가 아니다. 근데 그처럼 간사와 회원의 중간 어디쯤 위치하는 수상한 이들이 참여연대엔 꽤 있다. 간사보다 일을 더 많이 하는 것 같다고 하자 그가 멋쩍게 웃는다. 

“일주일에 3일 정도는 참여연대에 오는 것 같아요. 참, 이번 가을학기에 ‘세상의 모든 협동’이라는 7주짜리 강의를 함께 기획했는데 거기선 강사로도 참여하게 되었어요.”

참여연대에서 하는 수많은 활동 중에 어떤 것에 가장 열정을 느끼세요?

“아무래도 느티나무 강의를 기획하는 일에 가장 관심이 가죠. 기존의 강좌들을 보면 거의 텍스트 중심으로 되어 있잖아요. 지식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강사가 중심에 서다보니 강의의 형식 또한 일방적일 수밖에 없구요. 제가 기획하고 싶은 강의는 수강자들의 참여도 더 많이 이루어지고 쌍방향적인 소통이 가능한, 워크숍 형식이 결합된 것이에요.”

느티나무를 포함해 숱한 단체를 돌아다니며 들은 강의만도 700회 가까이 된다고. 배움은 답을 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품게 하는 것이니, 엄청난 공부 끝에 그가 품게 된 질문의 깊이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의자에 앉아 칠판만을 향하는 강의가 아니라 머리와 몸을 동시에 움직이는 공부, 좀 더 동적이고 입체적인 배움을 만들어내고 싶어요. 사람들 안에 숨어있는 자발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그래서 세상을 향해 한발 더 나아가게 하는 그런 공부 말이죠.”

배움이 이루어지는 장에 대한 고민들, 일방적인 지식 전달 그리고 이성과 판단 중심의 에너지만을 쓰는 공부에 대한 고민들은 그에게 또 다른 숙제를 남겼다. 시간을 내서 강의를 듣고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그리고 그 다음은?

“사람을 남기는 강의를 만들고 싶어요. 공부가 끝나면 모든 볼 일이 끝났다는 듯 각자의 자리로 흩어져 버리는 그런 공부 말구요. 공부가 끝난 자리에 사람들이 남아 그 이후의 형태가 더 심화된 공부이든 함께 취미를 공유하는 것이든 간에 그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그런 배움을 만들어내고 싶습니다.”

긴 배움 끝에 그의 고민이 닿은 곳은‘공부 그 이후’이다. 그가 대표로 있다는 기획사의 이름 ‘그리고.’그 짧은 이름에서 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긴 문장들을 읽는다. 

참여사회 2014년 10월호 (통권 215호)
김정현 회원은 참여연대 느티나무 아카데미 강의, 청소년 인문학 프로젝트 등 다양한 공익 프로그램을 기획·진행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공익프로그램 전문기획사 ‘그리고’

느티나무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한낮은 아직 땡볕인데 여긴 이미 가을 공부가 시작되었다. 그가 기획하고 강의도 한다는‘세상의 모든 협동.’강의 소개가 실린 페이지 밑에 눈에 선  로고 하나가 보인다. ‘공동주최 : 공익프로그램 전문기획사 그리고.’

앞서 그의 정체가 수상하다고 했지만 그가 하고 있는 일 또한 수상하긴 매한가지다. 

“올 4월에 법인 설립을 했는데 이 회사를 차리기 전에 한국어린이도서관협회에서 청소년인문학프로그램 담당자로 근무했었어요. 일의 성격만 놓고 보면 그전에 하던 것과 비슷해요. 공익프로그램 기획하고 컨설팅하고 진행도 하고.”

사회적기업진흥원에서 운영하는 사회적기업가양성프로그램에 선발된 것이 독립의 계기가 되었다. 그 덕에 사무실과 사업비의 일부를 지원받는다. 

“주위에 보면 공익프로그램들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이런 일들을 하는 분들은 꽤 있는데 힘을 합쳐서 의미 있는 일들을 도모할 만한 팀 단위는 없어요. 이번에 참여연대 창립총회 때도 그랬을 텐데, 그런 행사에 가보면 대부분 행사기획사에 외주를 맡겨 운영하고 거기서 계약한 음향업체나 케더링catering 업체들이 들어오는 식이에요. 근데 그런 기획사들은 상업적인 성격이 강하다 보니 공익프로그램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또 단가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음식, 기념품 등 행사에 제공되는 것들의 품질이 대부분 낮아요. 적정한 수익을 목표로 하면 보다 적은 예산으로 더 좋은 행사들을 진행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를 통해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이런 거죠. 근데 아무래도 단체에 속해 있다 보면 제약들이 있을 수밖에 없고,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을 맘껏 해보고 싶어서 독립을 하게 되었죠.”

‘그리고’에서 만든 프로그램을 소개해 달라 했더니 그가 휴대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나무로 만든 작은 의자 하나와 그 아래 공간에 들어가 있는 열권의 책.

“이번에 한 기업체랑 같이 진행한‘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이라는 프로젝트예요. 이 의자도 제가 직접 디자인한 거구요. 기업체의 임직원이 가족자원봉사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참여해서 함께 의자를 조립하고 사포질도 하고 페인트칠도 했어요. 의자가 다 만들어지면  자신이 감명 깊게 읽었던 책 10권을 가져오거나 구입해서 의자 안에 꽂아 넣어요.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이 완성되면 농어촌에 있는 학교에 보내는 거죠.”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사유의 힘이라 믿는다는 그. 아이들의 생각주머니를 키워주고 싶다는 그의 꿈이 작은 의자 밑에 오롯이 앉아 있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동안 그가 거쳐 온 직업만도 4개. 지금 하고 있는 기획사 일은 그의 다섯 번째 직업이다.

“충청남도 금산에 있는 간디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한 게 첫 사회생활이었죠. 전공이 생물교육학이라 주로 과학을 가르치긴 했는데 비인가 학교였던 관계로 제가 해보고 싶은 수업들도 이것저것 만들어서 다양하게 가르쳤어요. 제일 열심히 한 건 축구였죠. 하루 7시간씩 했으니까, 하하하. 가까운 곳을 여행하고 지역문화재 탐방도 하는 수업, 영화를 보고 토론하는 수업도 하고. 5년 정도 있었는데 무척 재밌었어요.”

근데 왜 그만 두신 거예요?

“대안학교 교사들은 에너지 소모가 커요. 학생들 하고 24시간 붙어 있어야 하는 문제도 있구요. 저도 결혼하고도 기숙사 사감도 하고 당직도 서고 그랬죠. 그러다 보니 힘에 부치는 거죠. 에너지 보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학교를 떠난 이후엔 국제워크캠프라는 NGO단체에서 일했다. 그가 맡은 일은 국내에서 활동하고 싶은 외국인들을 교육시키고 지역사회와 연계하여 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자원봉사 프로그램들을 개발하는 것. 하지만 이곳도 5년 정도 머문 후 정리. 그 후 새롭게 시작한 일은 아름다운 가게의 간사. 

“아름다운 가게에서는 꼭 한 번 일해보고 싶었어요. 한국에서는 꽤 규모 있는 사회적 기업이기도 하고 나눔과 순환을 통한, 지속가능한 비즈니스 모델도 갖고 있고. 일하면서도 아주 재밌었어요. 300명의 동료들과 일하다 보면 재밌는 일이 많이 생기죠. 사람들도 정말 다양하고 그래서인지 새로운 것도 많이 시도해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도 이제 40대에 접어들었다.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새롭고 도전적인 일을 하기에 때론 그 숫자가 버거울 때도 있다. 그의 용기와 열정이 해가 가도 식지 않는 비법이 있는 듯 했다.

“창업을 준비하면서 사실 저도 많은 고민을 했어요.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과연 지금이 이 일을 시작할 적기인가? 그런데 그동안 살아왔던 인생을 돌이켜보니 어차피 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왔던 사람이더라고요. 이왕 겪을 거면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겪어보자, 이런 생각도 들었고요. 비법이요? 적게 벌고 적게 쓰는 삶에 익숙해지는 것? 준비라면 그게 가장 큰 준비일 거예요. 중요한 건 그게 단지 각오를 말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 몸에 습관처럼 배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고등학교 때 그의 학교엔 젊은 선생님들이 많았다. 대부분 전교조 소속의 선생님들이었다. 공부 못하면 사람 취급 못 받던 세상에서 그 선생님들은 다른 꿈을 꿈꾸었다. 낙오자로만, 문제아로만 취급당하던 아이들을 모아 연극 동아리를 만들었다. 그도 그들과 함께 연극을 하며 무대에 올랐다. 그때 깨달았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교사에게서 온다는 것을. 그렇게 그의 인생길이 정해졌고 이제껏 살아오는 내내 그의 삶은 그 주변을 멀리 떠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교육이란 폭력적이라고 생각해요. 간디학교를 떠나오면서 남아계신 선생님들한테도 그렇게 말했어요. 이 땅의 모든 학교는 사라져야 한다고.”

사유하는 힘과 배움을 전하는 자들이 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고 믿는 그에게서 나온 말이다. 제도권 내의 공부가 살아있는 공부가 아님을 뼈아프게 지적하는 말이다. 배움이란 철학에 대한 공부이며 인생에 대한 공부이며 그래서 결국 인문학에 대한 공부여야 한다고, 그렇게 공부는 세상의 모든 ‘근본’에 대한 공부여야 한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그를 바라본다. 그 순간, 세상과 인생에 대해 그가 품는 고민들이 슬며시 내 어깨위로 옮겨 앉았다.

참여사회 2014년 10월호 (통권 215호)

‘그’라는 한권의 책

인터뷰를 마친 그가 인터뷰와 함께 실릴 사진을 찍기 위해 카페 안 피아노로 자리를 옮긴다. 우연히 서점에서 산 『피아노 일주일 만에 죽이게 치는 법』이라는 소설책을 읽고 혼자서 피아노를 배웠단다.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한 시간 남짓 들었던 그의 인생이야기를 머릿속에서 되감는다. 문득 그가 한 권의 책이라면 어떨까 싶었다. 그러자 인디밴드 크라잉넛이 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이 떠올랐다. 

원하는 일을 하며 산다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그 누구보다 스스로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인생을 산다는 건 정말이지 쉽지 않다. 인생이 즐겁고 재밌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한바탕 삶을 건 진지한 결단의 순간도 있어야 하고 무섭고 두렵더라도 일단 앞으로 내달릴 수 있는 용기 또한 필요하다. 내가 그를 이 밴드와 견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인디밴드가 무대 위에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고 소리 칠 때 그 외침 속에서 뿜어져 나오던 삶의 열기. 세상이 규정짓는 성공적인 삶 따위에 현혹되지 않는 자의 자유로움이 그에게서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저 멋진 꿈을 꾸기만 하는 것으론 만족하지 않는 ‘그’라는 책. 그 책을 자주독립 밴드 크라잉넛 옆에 나란히 꽂는다.

호모아줌마데스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애 엄마. 2007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과 동시에 자원활동 시작.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백인보’라는 코너에 비정규적으로 인터뷰 글을 쓰고 있음. 특기사항 : 합기도 빨간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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