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4년 02월 2014-02-07   1258

[특집] 시민정치와 고민을 함께하는 진보정당을 향하여

특집 정당의 실종

느리고 지겹지만 꼭 이끌어내야 하는 새누리당의 변화 이준석
민주당, 버리는 게 답인가? 이철희
민주당을 대체하려는 신당의 꿈과 현실 이대근
시민정치와 고민을 함께하는 진보정당을 향하여  김만권

 

 

시민정치와 고민을 함께하는
진보정당을 향하여 

 

김만권 연세대학교 강사 

 

 

외면당한 진보, 더 외면당한 진보정당들  

 

스스로를 진보라고 생각지 않는 자유주의자에게, 더군다나 정당정치를 전공하지 않은 정치이론가에게 진보정당들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에 대한 제안을 달라는 원고 청탁에 조금은 난감했다. 그래서 내부자가 아닌 진보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더 나아가 시민으로서 이 글을 쓰고자 한다. 비판의 창끝은 날카로워야 하되 그 날카로움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난 상처를 도려내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함이며, 전망의 제안은 전지적 시선에서 무엇인가를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문제를 함께 고민하기 위함이다. 이 글은 그 맘으로 쓴다.  

 

진보의 입장에서 돌아보면 지난 두어 해는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다. 진보정당의 입장에선 더더욱 그러했다. 통합진보당은 당내 부정선거 사태의 여파로 인해 지난 19대 총선에서 공식적으로 10.3%에 이르렀던 지지율이 여론조사에서 한때 1% 아래로 곤두박질쳤고 지금은 2% 안팎의 지지율에 그치고 있다. 당 역시 기존의 통합진보당과 정의당으로 분리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통합진보당 사태는 일반 시민들의 진보 자체에 대한 외면 혹은 혐오로 이어졌고 ‘진보’라는 용어 혹은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모든 진보정치가 너무나 큰 타격을 입었던 시간이었다. 나아가 도저히 질 수 없다고 보았던 지난 대선에서 패하는 데 한몫을 하고야 말았다.   

 

참여사회 2014-02월호

 

정치공학과 극단화란 함정에 갇힌 진보정당들 

 

19대 총선 당시 10% 이상의 지지율을 얻었던 통합진보당은 부정선거 사태 이후 통합진보당과 정의당으로 분리되며 그 존재감을 잃었고, 현재 우리 정당정치는 사실상 새누리당과 민주당 양당체제로 재편되어 있는 상태다. 통합진보당의 내분으로 인한 혼란과 좌절은 제도권 정치 내 진보정치의 좌절을 의미했다. 예를 들어, 지난 총선에서 진보신당은 1.13%(24만 3,065표)로, 녹색당은 지지율 0.48%(10만 3,842표)로 (사실상 위헌 소지가 다분한) 2% 득표율 제한에 걸렸다. 그로 인해 진보신당과 녹색당은 당을 해체하고 당명을 각각 노동당과 녹색당+로 바꾸어 재창당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진보정당들의 혼란과 그 존재감의 상실의 중심에는 ‘정치공학’이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어 통합진보당의 출범이 그러했다. 진보의 제도권 진출이란 목표는 누구나 긍정하고 수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내 의석 확보란 숨겨도 숨길 수 없는 정치공학적인 발상 아래 같이 갈 수 없는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란 서로 다른 세력이 통합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누구나 알다시피 참담했다. 또 한편으론 총선이나 대선 때마다 나오는 보수 세력에 맞서 진보가 결집해야 한다는 발상은 야권연대 혹은 야권후보 단일화라는 또 다른 정치공학으로 귀결한다. 쉽게 말해, 자신들의 입장을 가장 잘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정치공학적인 발상 때문에 스스로 포기하거나 포기하길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진보정당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정강이나 정책을 일반 시민들과 공유할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하고 있다. 

 

진보정당들이 일반 시민들과 점점 멀어지는 현상이 더욱 안타까운 까닭은 이로 인해 나타나는 ‘극단화’란 함정 때문이다. 보수와 진보라는 세력으로의 양극화, 일반 시민들의 진보와 특히 진보정당 정체 세력에 대한 무관심 혹은 혐오, 진보 세력 내에서의 제도권 진보에 대한 비판, 더 나아가 제도권 진보 내에서의 서로 간의 입장 차는 이제 진보들 내부에서조차 입장이 다른 이들끼리 얼굴을 맞대지 않는 현상을 낳고 있다. 카스 선스타인Cass Sunstein이 『사회에는 왜 이견이 필요한가?』(Why Societies need dissent)에서 밝히고 있듯 신념이 같은 이들끼리의 대화는 같은 의견을 공유한 이들의 입장을 더욱 극단화시키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자기 신념의 방어를 탓할 바는 없으나 그 신념의 방어가 극단화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은 대개 근본주의다. 근본주의자들의 특징은 설득하지 않고 신념을 강요하거나 같은 신념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을 경멸하고 외면한다. ‘극단화된 자기 입장에만 갇혀 있는 진보정당.’ 필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우리 시민의 눈에 비친 진보정당들의 모습이다.   

 

시민사회와 결합된 진보정당 활동 

 

제도권 정치라는 입장에서 진보정당들을 바라보면 사회 대다수 구성원들에게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입장에만 갇혀 있는 자기들만의 리그를 펼치는 집단’이라는 비판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이러저러 변명이 가능하겠지만 그저 변명일 뿐이다. 그렇다면 제도권 정치로서 진보정당들은 진정 무의미한 것일까?   

 

필자는 우리 사회 맥락에서 진보정당들의 활동은 시민정치의 강화와 맞물릴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녹색당의 활동을 보자. 19대 총선 이후 정당 해산을 통해 재창당의 고난을 걸었던 녹색당은 특이한 정치적 실험에 나섰다.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추첨제로 대표자를 선출하고 있고 그 대표자의 범위는 초등학생에 이르고 있다. 또한 거수가 아닌 토론이 중심이 되는 대의원 회의를 열고 작게는 자신들의 정당 이념에 맞추어 참여자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탄소 제로’의 대의원회의를 열고 있다. 필자는 이런 녹색당의 활동을 두고 ‘참여민주주의 싹을 틔웠다’와 같은 과장된 평가를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런 실험 그 자체가 제도권 정치를 넘어 시민정치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직접 참여하는 정치 교육의 현장’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사실 이런 ‘녹색당’ 모델은 지역에 그 지부를 두지만 주된 활동은 중앙의 당 지도부를 통해 이뤄지는 방식의 현 대의제 정당정치에는 그 적실성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이런 모델은 정치의 중심을 중앙에서 지역으로 옮겨놓고 더 나아가 시민으로 옮겨 놓는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이런 모델을 중심에 놓고 사고한다면 기존 진보정당의 활동 무대는 중앙 제도권이라기보다는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과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기초의회’가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기초의회 활동에 기반을 두고 지역 사회의 시민들과 시민단체들에게 활짝 문을 열어둠으로써 제도권 정당정치와 시민정치를 잇고 짓는 세력화야말로 기본적으로 풀뿌리 민주주의를 추구해 온 진보정당들이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진 않을까? 

 

덧붙이는 말. 

 

다만 이런 제안 역시 고민스러운 까닭은 최근에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기초의회 정당공천폐지 논의 때문이다. 기초의회에서 정당공천이 폐지된다면 정당의 정체성을 명확히 유지하며 지역 시민사회에 접근하는 일 또한 쉽지 않을 것이다. 이래저래 사면초가에 놓인 진보정당들의 현실이다. 

 

 

김만권 연세대학교 강사
뉴스쿨에서 ‘정치적 적들 간의 화해를 위한 헌법짓기’를 주제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자유주의에 관한 짧은 에세이들』, 『정치가 떠난 자리』 등을 썼고,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2013년 여름부터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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