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6년 09월 2016-08-31   1416

[듣자] 베토벤,  삶에 감사하는 세 개의 노래

 

베토벤, 
삶에 감사하는 세 개의 노래

 

 

글. 이채훈 MBC 해직PD
MBC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클래식 음악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2012년 해직된 뒤 ‘진실의 힘 음악 여행’ 등 음악 강연으로 이 시대 마음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저서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 『우리들의 현대 침묵사』(공저) 등.

 

베토벤은 평생 세 차례 감사의 노래를 불렀다. 첫 번째는 교향곡 6번 <전원>의 피날레, ‘폭풍우가 지난 뒤 양치기가 부르는 감사의 노래’다. 베토벤이 여름에 휴양했던 하일리겐슈타트, 청각상실로 사람들에게 멀어지고 오해 받고 상처 입은 그는 이곳의 숲속에서 위안을 찾았다. 숲길을 산책하며 그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전능하신 신이여, 숲속에서 나는 행복합니다. 여기서 나무들은 모두 당신의 말을 합니다. 이곳은 얼마나 장엄합니까!” 

 

시골에 도착하는 순간 유쾌한 기분이 눈 뜬다. 시냇가를 따라 야생동물이 뛰놀고 멀리 뻐꾸기와 꾀꼬리가 노래한다. 베토벤은 물소리, 새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미세한 공기의 떨림으로 그 소리를 느낀다. 순박한 농민들의 축제가 벌어진다. 풍성한 과일, 달콤한 와인과 함께 농민들은 즐겁게 춤을 춘다. 축제가 무르익을 무렵,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 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진다. 대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작고 나약한 존재인가! 잔인한 폭풍우 앞에서 인간은 이를 악물고 슬픔의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다. 이윽고 폭풍우가 가라앉고 감사의 노래가 펼쳐진다. 이제 행복한 시간이다.

 

월트 디즈니의 <판타지아>는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을 고대 그리스의 신들이 사는 올림포스의 하루로 묘사했다. 신들의 왕 제우스가 심심풀이로 벼락을 내리꽂을 때 인간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쩔 줄을 모른다. 폭풍우가 몰려간 뒤 무지개가 뜨면 인간은 신들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베토벤은 이 5악장에서 성악을 사용할 생각도 했지만, 결국 순수한 기악으로 완성했다. 노랫말이 없어도 우리는 이 곡이 ‘감사의 노래’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전원> 교향곡의 피날레는 인간이 자연과 좀 더 가깝던 시절의 순박한 음악이다. 

 

베토벤 <전원> 교향곡 중 4악장과 5악장 (디즈니 만화영화 <판타지아>)

이 곡을 듣고 싶다면? 유투브에서 Fantasia Pastoral을 검색하세요.
https://youtu.be/3rY7VNbaZb4

 

기나긴 폭염이 가고 추석을 앞둔 지금, 우리는 베토벤처럼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지구 온난화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는 한 노래는 시기상조다. 잔디구장처럼 펼쳐진 녹조라떼는 4대강을 흉물스레 막아놓은 보를 허물지 않는 한 내년에도 되풀이 될 것이기에 아직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없다. 

 

두 번째는 현악사중주곡 15번 A단조의 3악장 ‘몰토 아다지오molto adagio,아주 느리게’, ‘위장병에서 나은 이가 신에게 바치는 성스러운 감사의 노래’다. 베토벤은 20대 중반 청각에 이상이 생길 무렵부터 평생 위장병을 앓았다. 약을 먹고 온천욕을 했지만 병은 완치되지 않은 채 30년 넘도록 베토벤을 괴롭혔다. 1824년 이 사중주곡을 작곡하기 시작할 무렵, 베토벤은 배의 통증이 심해져서 펜을 멈춰야 했다. 초로의 베토벤은 삶의 의욕을 상실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배의 통증은 어느덧 사라졌고, 베토벤은 예정에 없던 장대한 ‘감사의 노래’를 작곡했다. 베토벤은 이 아다지오의 악보에 ‘새로운 힘을 다시 느낀다’고 써 넣었다. 고요한 기쁨으로 가득한 화음, 고통을 겪어 본 자만이 부를 수 있는 감사의 노래다. 

 

베토벤 현악사중주곡 15번 A단조 3악장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 

이 곡을 듣고 싶다면? 유투브에서 Beethoven Quartet Op.132 Alban Berg을 검색하세요.

 

 

 

문득, ‘더 이상 나쁠 수 없는’ 이 정권에서 우리 모두 위장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극악한 빈부격차, 탈세와 부패, 증오와 대립, 무지와 불통, 그리고, ‘향그런 흙가슴’에 상처를 입히는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라는 ‘쇠붙이’…. 이 위장병을 치료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괴로움을 더 겪어야 하는 걸까. 1년여가 지나면 비로소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아직은 아니다. 

 

세 번째는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의 2악장이다. 베토벤 자신이 ‘감사의 노래’라 부르지는 않았지만, 삶에 대한 애틋한 감사의 마음이 배어있다. 아르헨티나의 민중가수 메르세데스 소사가 부른 ‘삶에 감사Gracias a la Vida’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까. 베토벤은 청각상실로 30대 중반에 연주활동을 중단했다. 대중 앞에서 화려하게 기교를 뽐내는 피아노 협주곡을 5곡밖에 작곡하지 않은 건 청각상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만은 평생 32곡을 썼다. 말년의 피아노 소나타는 대중에게 선보이기 위한 게 아니라 그 자신의 내면의 고백이었다.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2번 C단조 2악장 

이 곡을 듣고 싶다면? 유투브에서 Beethoven Op.111 Serkin을 검색하세요.
https://youtu.be/KsLojxzbuFM

 

이 곡의 2악장은 C장조의 고요한 주제와 다섯 개의 변주로 이뤄져 있다. 베토벤은 눈물을 머금고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본다. 그러나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맺혀 있다. 온갖 고통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감정이 격해져서 목이 메지만, 고요한 눈빛으로 마무리한다. 

 

비서 신틀러가 이 곡에 따로 피날레가 붙어있지 않은 이유를 묻자 베토벤은 “시간이 없어서 못 썼다”고 우스개로 대답했다. 그러나, 이미 “안녕, 안녕” 했는데 무슨 피날레가 더 필요할까? 이 악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베토벤의 영혼이 요동쳐 드높이 치솟을 때, 우리는 베토벤이 삶에 감사하며 32곡의 피아노 소나타, 그 대장정을 마무리하고 있다는 걸 자연스레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언제든지 삶에 감사할 수 있다. 힘든 나날이지만 아직 남은 건강이 있음에 감사한다. 세상이 아무리 험해도 함께 하는 동료들이 있음에 감사한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귀와 느낄 마음이 있음에 감사한다. 우리보다 먼저 ‘감사의 노래’를 부르고 남겨 준 베토벤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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