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6년 09월 2016-08-31   627

[읽자] 기억은 켜켜이, 역사는 곳곳에

 

기억은 켜켜이,
역사는 곳곳에

 

 

글. 박태근 알라딘 인문 MD
온라인 책방 알라딘에서 인문, 사회, 역사, 과학 분야를 맡습니다. 편집자란 언제나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는 사람이라 믿으며, 언젠가 ‘편집자를 위한 실험실’을 짓고 책과 출판을 연구하는 꿈을 품고 삽니다.

 

각자는 매일 무언가를 잊으며 살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때로는 잊히지 않는 기억이 쌓이고, 이를 잊지 않으려 곳곳에 역사의 징검다리를 놓기도 한다. 사람들이 자주 밟는 돌덩이는 반들반들해진 모습만큼이나 익숙한 탓에 오히려 눈에 띄지 않지만, 아무도 오가지 않는 곳에 놓인 돌덩이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으니, 내가 흔적을 남겨 기억이 되는 하나의 돌덩이라면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결정에 앞서 주변에 켜켜이 쌓인 기억, 자주 마주하면서도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친 곳곳의 역사를 둘러보자.

 

참여사회 2016년 9월호(통권 238호)

동물원 기행_런던에서 상하이까지, 도시의 기억을 간직한 세계 14개 동물원을 가다 / 나디아 허 지음 / 어크로스

 

도시의 기억, 각자의 추억, 동물의 시간이 공존하는 곳
유명한 대도시에는 으레 동물원이 있다. 다른 세계를 탐험하거나 정복하면서 말로만 듣거나 상상도 하지 못한 동물을 끌고 와서 보여주는 전시장으로 시작되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거칠게 말하면 돈과 권력이 모이는 곳에 동물원이 자리할 수밖에 없다. 이런 동물원의 연원이 어둠이라면, 그곳에서 보낸 한때는 각자에게 밝은 추억으로 남을 터, 수백수천 마리의 동물이 동물원 이전을 맞아 퍼레이드 하듯 줄을 지어 거리를 걷던 때를 기억하는 소설가 나디아 허의 『동물원 기행』은, 유럽부터 아시아까지 열네 곳의 동물원에 남은 흔적을 더듬으며 어둠과 밝음을 뒤섞어, 동물원을 새로운 기억의 공간으로 되새긴다. 

1828년 개장하여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런던 동물원, 그곳에는 그때부터 세대를 이어가며 살아온 동물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고, 파리 동물원 신생아실에서 마주하는 막 태어난 아기 동물을 보면, 자연과는 다른 공간에서 그가 물려받은 유전자와는 다른 시간을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란 것이 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되묻게 된다. “끊임없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 동물원의 시간은 늘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하다”는 작가의 말은 인간이 만들어 놓고도 인간조차 이해할 수 없는 동물원이란 공간의 시간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옮긴 문장이 아닐까 싶다. 확실한 건 “세상에 난데없이 우리 앞에 나타난 종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기억도, 추억도 여기에서 시작해야겠다.

 

참여사회 2016년 9월호(통권 238호)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_화폐 인물로 만나는 시대의 도전자들 / 알파고 시나씨 지음 / 헤이북스

 

숫자만큼 중요한 화폐 속 인물들
카드와 온라인 결제가 익숙해지며 지폐와 동전을 쓰는 일이 줄었지만, 그럼에도 화폐는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드러내는 가장 적극적인 프로파간다다. 그래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화폐의 인물을 바꾸기도 하고, 실제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종종 누구를 화폐에 새기는 게 좋을지 설문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터키에서 나고 자라 지금은 한국에서 정치학과 외교학을 공부하는 알파고 시나씨의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는 시대의 도전자를 기억하는 방법으로써 화폐에 주목한다. 오늘날 국가 상당수가 지난 100여 년 사이에 혁명이나 독립전쟁을 거쳐 탄생했기에, 독립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역사를 확정하고 국민을 통합하려 상징적인 인물을 화폐에 넣었기 때문이다.

위조지폐 슈퍼노트로 잘 알려진 미국의 100달러 벤자민 프랭클린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는 자유와 투쟁의 대륙 라틴아메리카의 베네수엘라와 브라질을 거쳐, 분단과 통합을 기억하는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네팔을 지나, 시대의 전환을 함께 겪은 동아시아의 일본, 타이완, 중국에 이르렀다가 저 멀리 투르크메니스탄과 키르기스스탄까지 이어지며 ‘변혁의 도전 정신’이란 가치로 전 세계의 화폐를 읽는다. 정신없이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나니 문득 한국을 지나친 기분이 들어 차례를 다시 살핀다. 아, 한국은 없다. 다시 지갑을, 아니 머릿속을 뒤져 화폐에 오른 인물을 떠올린다. 작가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책에는 한국 화폐에 대한 내용이 없다. 필자는 세계 각국의 자유, 독립, 건국, 민주주의 등 투쟁 영웅들 위주로 이 책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한국 화폐에는 공교롭게도 해당 인물이 없었다. 한국 독자의 이해와 양해를 부탁드린다.” 기억의 필요와 방향과 방법은 각기 다르겠지만, 생각해볼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참여사회 2016년 9월호(통권 238호)

각주의 역사_각주는 어떻게 역사의 증인이 되었는가 / 앤서니 그래프턴 지음 / 테오리아

 

지나치기 쉽지만, 어쩌면 가장 확실한 기억의 공간
마지막으로 살펴볼 기억과 역사의 공간은 각주다. 그렇다. 책을 읽다 보면 본문에 숫자나 약물로 표시를 하고 본문 아래에 따로 출처나 설명을 붙이는 그곳 말이다. 연구자나 전공자가 아니라면 대체로 지나치기 쉬운 이 공간은 그 자체로 해당 내용의 연원을 밝히는 기록 행위이지만, 점차 본문과 거리가 멀어져 때로는 아예 본문이 끝나는 책 끄트머리로 밀리면서 기억에서 잊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역사학자 앤서니 그래프턴은 각주가 어떤 방식으로 생겨나 활용되었는지부터 각주로 인해 생겨난 새로운 학문의 방법과 지적 혁명까지 『각주의 역사』를 처음으로 그려내는데,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누리는 근대의 학문이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고 발전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즐거운 경험을 전한다.

앞서도 말했듯 요즘 나오는 책에서는 각주가 점점 뒤로 밀려 본문과 상관없는 영역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니, 확인이 필요한 경우라 해도 굳이 뒤를 넘겨보지 않고 무한한 신뢰를 나누기도 한다. 그렇지만 (저자도 지적하듯) 각주 없이도 칭찬하거나 반박할 수는 있지만 검증하거나 반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일단의 주에서 무엇을 포획할지 쉽고 능숙하게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같은 기록의 수면 아래를 샅샅이 훑는 소수의 독자뿐”이니, 각주를 살펴보는 일이 줄어들수록 각주의 의미 역시 줄어들 게 분명하다. 여기에서 꼼꼼하게 따지고 세세하게 기록하고 끊임없이 확인하는 일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한국사회가 겹쳐진다면 지나친 각주일까. 조금 지나쳐도 괜찮을 거라며 각주 없는 기대를 전한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