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6년 07월 2016-06-29   1002

[특집] 혐오와 처벌

특집4_강남역 10번 출구

 

 

혐오와 처벌

 

 

글.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소장

 

 

혐오표현은 ‘혐오스러운 표현’이 아니다. 소수의 표현이 다수에게 혐오스럽다고 해서 그 표현을 규제해야 한다는 당위는 도리어 인류 최대의 차별, 폭력, 심지어 학살을 불러왔다. 표현은 그 자체로 처벌되어서는 안 된다. 표현 그 자체는 듣는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지는데 그 결과의 책임을 말한 사람에게 전부 뒤집어 씌우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2mb18noma’라는 트위터 계정을 누구는 대통령에 대한 욕설로 읽지만 다른 누구는 권력자에 대한 유쾌한 언어유희로 읽는다. 당사자인 전 대통령이 ‘Fuck Obama’ 계정을 웃어넘기는 다른 나라 대통령처럼 웃어넘길지 절망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혐오표현은 모두 규제 대상일까
혐오표현은 특정 그룹에 대한 차별·증오·폭력을 선동하는 표현을 말한다. 혐오표현이 규제되려면 다른 표현과 마찬가지로 그 표현이 물리적 해악을 발생시킬 ‘명백하고 현존한 위험’이 있어야 한다. 국가보안법 제7조 찬양고무 조항이 가진 문제는 바로 그런 외부적 해악을 발생시킬 위험이 없는 표현들까지도 모두 처벌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혐오표현(여혐)과 남성에 대한 그것이 규범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는 것도 여혐은 남성들이 사회 곳곳에서 지배력을 행사하는 사회구조에서 실제로 여성에 대한 차별 내지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남혐은 실제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혐오표현은 이미 배선된hard-wired 차별성향을 자극하여 실제 행동으로 옮기도록 하는 전류와도 같은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2차 대전 중에 유태인들이 나치당원들을 향해 ‘찢어죽일 아리안 놈들’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 말을 혐오표현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표현이 즉각적으로 가동시킬 차별적 구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UN자유권규약 제 20조가 인종, 종교, 국적에 따른 차별·증오·폭력을 선동하는 발언을 규제할 의무를 규약당사국들에게 부과한 이유는 인종·종교·국적 혐오표현이 실제 차별 증오 폭력으로 발현된 사례들이 역사적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혐오표현 규제가 없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32조 제3항에 ‘지역사회, 직장 등에서 장애인을 장애를 사유로 모욕해서는 안 된다’는 벌칙 없는 조항이 하나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특정 그룹에 대한 차별 증오 폭력이 ‘인종전쟁’, ‘종교전쟁’의 수준으로 발현된 적이 없기 때문일까?

그러나 전쟁은 이미 벌어지고 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tvN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드>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인생은 자식과 부모 사이의 전쟁이야.” 자식과 부모는 서로에게 필수불가결한 존재이지만 바로 그런 역할 때문에 그들의 관계는 갈등, 투쟁, 억압으로 점철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통해서만 쾌락과 의미를 얻기 때문이다. 여성과 남성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특정 여성과 특정 남성의 관계는 “너 없이 못사는” 그것에서 “너 때문에 죽겠다”는 그것 사이에서 격렬하게 진동한다. 여성을 살해한 가해자들의 몇 프로가 한때 그 여성을 사랑했던 남성이었는지를 살펴보라. 성 전쟁은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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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표현 처벌, 사회인식 수준 고려해야
강간도 성 전쟁, 즉 여성혐오 범죄이다. 여성혐오가 반드시 여성성을 표면적으로 혐오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바닷가에서 갯고동을 잡아 물병에 넣는다. 갯고동을 ‘사랑’해서이다. 거실 어딘가에 놓인 갯고동은 병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지만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갯고동의 고통을 알 수가 없다. 이 시나리오에서 갯고동은 생명의 주체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무지 속에서 주체성이 경시되어 (아마도 갯고둥의 의사에 반하게) 하나의 장난감으로 존재할 뿐이다. 

강간은 여성성을 탐닉한 나머지 신체적 약자인 여성을 물리적으로 강제하는 것으로, 이 과정에서 여성의 주체성은 경시되고 여성은 하나의 쾌락의 도구가 되고 만다. 여성혐오는 다른 주체의 주체성에 대한 천진난만한 경시에서 비롯된다. 강남역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인지 묻지마 범죄인지 물을 필요가 없는 이유이다. 

최근 고려대학교 특정 교양수업을 수강하는 남학생들 9명이 카톡방에서 동료 여학생들에 대한 강간을 연상시키는 대화를 한 것이 발각되었다. 모든 강간은 여성혐오죄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의 대화를 그대로 흘려보낼 수 없는 것이다. 묵시적으로 서로 비밀을 지킬 것을 약속한 사이에서 오간 이야기들에 모욕죄나 명예훼손죄를 묻기는 어렵지만 제2, 제3의 밀양 사건의 바탕을 이루는 여성혐오성향이 이런 은밀한 대화 속에서 풀무질되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대로 흘려보낼 수 없는 것이다.

염재호 총장은 ‘부총장 산하의’ 특별대책팀에서 “조사 내용과 학칙에 따라 엄정한 사후 조치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재발 방지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 및 시스템 개발 등 최선의 대책을 강구할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성 전쟁은 9명의 남학생들을 엄정하게 다루는 것에 방점이 찍혀서는 안 될 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그 카톡방에서의 대화를 ‘벌 받을 짓’, 즉 사회에는 문제가 없는데 그사회에서 예외적으로 발생한 ‘썩은 사과’로 규정하는 순간 성 전쟁을 막을 기회를 잃게 된다.

 

또 강남역 사건과 같이 곧바로 피해를일으키는 여성혐오’범죄’는 우리 사회가 일벌백계로 안전에 대한 입장을 단호히 표명해야 하지만, 아직 차별금지법도 통과시키지 못한 우리 사회가 범죄로 규정하지 못한 여성혐오표현을 어떻게 다룰 지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민주적인 입법절차의 포기는 여성혐오 만큼 우리 스스로에 대한 주체성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신중함 속에서 사회적인 해결책도 찾아질 것이다.  

 

 

모두가 동참해야 사회가 바뀐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2015년 초 캐나다 노바스코시아주의 댈로우지 치과대학원에서 있었던 유사한 사건을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입학정원이 38명에 불과한 이들은 모두 입학과 동시에 학년별 페이스북 페이지에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2015년 졸업반 학생들은 전체 학년 페이스북 페이지와 별도로 남학생 페이지와 여학생 페이지를 만들었다. 그런데 2014년 12월 당시 12명이 2015년 졸업반 남학생 페이지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때 몇몇 학생들이 같은 학교 여학생들을 성적 대상으로 비하하는 설문을 진행했다. ‘가장 혐오성교hate fuck를 하고 싶은 대상’ 또는 ‘가장 운동성교sport fuck를 하고 싶은 대상’을 뽑는 설문을 하였고 여학생들을 실명으로 거론하였다. 이것이 발각되자 곧바로 지역 언론에 대서특필되었고 댈로우지 대학의 많은 학생들은 위 12명의 제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댈로우지 대학은 주변의 세찬 비난에도 불구하고 ‘회복적 정의’ 절차를 밟아 나갔다. 해당 남학생들 외에도 자발적으로 참여를 선택한 여학생들까지 포함해 치과대학원 총정원의 약 70%가 함께 ‘회복적 정의’ 절차를 밟았다. 12명의 남학생들은 각각 150시간 넘게 피해자들 및 동료학생들과 함께 성억압적 사회구조에 대해 토론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이같은 ‘회복적 정의’ 절차는 시급해 보인다. 대한민국이 여성들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인지, 차별금지법이 왜 필요한지 등에 대해 고려대학교 캠퍼스 전체적인 교육이 필요하지 않을까? 댈로우지 대학 사태의 최종보고서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가 성차별적 사회에서 살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지금 고려대 8인을 벌할 자격이 있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모두가 동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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